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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에게 여자란? 피카소의 여인들 속 작품 따라가기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에게 여자란 회화에서 붓과 같은 것, 즉 없어서는 안 되며,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것이었다”라고 페르낭드 올리비에(1881~1966)는 자신의 회고록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에서 언급한다. 


여자란, 피카소의 창조적 작업의 원천이자 인생과 예술 속에 녹아 있는 불가결의 존재였다. 피카소의 여인을 따라가 보면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피카소, 입체파, 자화상


▦ 피카소와 여인


피카소는 그와 함께했던 여인에 따라 작품의 스타일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시대나 사회의 영향이 적었다거나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피카소가 사귄 여인과의 관계는 그의 양식의 변화에 확실한 선을 그어주기 때문에 그 여인을 따라가 보면 그가 남긴 5만 점이나 되는 작품의 복잡한 조형적 흐름이 쉽게 파악된다는 뜻이다. 



▦ 최초의 여인 페르낭드


피카소가 페르낭드를 만난 것은 고향 스페인을 떠나 파리 몽마르트르의 허름한 작업실에 자리를 잡았을 무렵이었다. 아직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라면, 그리고 아름답고 마음 얻기도 쉬운 뮤즈 같은 여자라면 모두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모여들고 있을 때였다. 


피카소 페르낭드


이 시기에 피카소가 그린 그림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벌거벗은 그의 상태를 말해준다. ‘검소한 식사’에서 왼쪽에 있는 핼쑥한 옆얼굴의 남자는 맹인 같아 보인다. 비쩍 마르다 못해 뼈가 앙상한 팔과 손가락. 두 사람은 딱딱해 보이는 빵과 싸구려 포도주로 방금 끼니를 때운 모양인데, 얼굴을 보니 세상에 즐거움이란 하나도 없다는 표정이다.


모델이었던 페르낭드는 ‘미녀 페르낭드(la Belle Fernande)’라고 불렸다. 다갈색 머리칼과 초록색 눈, 우윳빛 피부와 굴곡 있는 몸매, 그리고 무엇보다 무심한 성격에서 뿜어 나오는 그녀의 매력에 ‘미녀’라는 단어는 결코 아깝지 않았다. 페르낭드의 싱그러움은 피카소의 캔버스를 지배하던 우울한 청색을 차츰 몰아냈고, 그녀가 자기 짐을 피카소의 아틀리에로 옮긴 후에 푸른색은 완연한 장밋빛으로 바뀌었다.



▦ 또 다른 뮤즈


유명해지면서 피카소의 생활은 달라졌다. 가난한 몽마르트르에서 벗어나 종종 시내에서 외식을 즐겼다. 그 무렵의 작품이 ‘선술집’이다. 좁은 테이블 위에는 메뉴가 놓여있고 샴페인 코르크, 포크와 나이프가 보인다. 코르크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표면에 톱밥을 붙여 표현했다.



파블로 피카소, 선술집, 피카소 작품,



위 그림은 테이블마다 사람들로 북적북적하고 약간은 떠들썩한 레스토랑에서 얼굴을 서로 들이대듯 마주하고 있는 연인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피카소의 앞자리에도 어느덧 페르낭드가 아닌 새로 만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이렇게 첫 여자 친구의 요리와 함께했던 몽마르트르 시대는 막을 내린다



▦ 마지막 여인 자크린


1961년 3월 14일, 피카소가 자크린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신문의 표제를 장식했다. 피카소보다 거의 50세 연하였던 자크린은 그림자처럼 피카소의 옆을 지켰고, 피카소의 모든 변덕을 이해하고 받아주었다. 그녀의 요리는 자극적인 맛대신 피카소의 건강을 위한 배려가 담겨있다.


피카소 자크린


자크린의 존재감은 피카소의 그림에 나타단다. ‘장어 마틀로트’는 피카소가 자크린을 위해 그린 헌사다. 스태미나에 좋다는 장어와 양파가 주재료인 이 요리는 그림으로 보기에도 성적인 상징성을 띤다. 구불구불 꿈틀대는 긴 장어는 힘 있는 남성을, 붉은 빛을 띤 즙 많은 둥근 양파는 여성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