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부장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드라마 <미생>에서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마 부장, 무심한 척 부하직원을 챙기는 김 부장, <개그콘서트>의 '렛잇비'에서 야근과 회식을 강요하는 이 부장은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부장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진짜 부장의 모습'은 어떨까?
이코노미스트는 대·중견·중소·공기업 부장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다. 1월 26~30일 닷새간 300여명을 상대로 e-메일을 보내고 회수하는 방식으로 진행했으며, 설문지는 기초조사, 회사생활, 라이프스타일, 경제생활, 사회 인식 및 정치관으로 구성했다. 설문조사 응답자는 189명. 부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① 대한민국 부장의 회사생활
'저녁이 있는 삶'. 소박해보이지만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는 사치스러운 소리다. 야근을 당연시하는 문화, 살인적인 업무 강도, 치열한 경쟁 탓에 '저녁 시간 = 업무 시간'의 공식이 탄생했다. 부장도 마찬가지일까?
그들 역시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부장 10명 중 9명 이상이 야근을 하고 있으며, 3명 중 2명은 일주일의 절반 이상을 야근한다. 그리고 82.5%가 주 1~4회 저녁 술자리를 갖는다고 답했다.
이처럼 부장들 역시 개인·가정 생활을 포기하고 회사 생활에 몰두하지만, 정작 직장 내에서는 많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극심한 경쟁과 중간관리자로서의 소통 문제가 외로움의 원인이다.
신입 1000명 중 24명만이 달 수 있는 부장이 되었지만, 부장 10명 중 7명은 임원 승진 경쟁에서 탈락하는 극심한 경쟁에 피가 마르고, "후배들에게는 입을 닫고 지갑을 열어야 하고, 상급자에게는 전화와 주말을 헌납"하는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다.
② 대한민국 부장의 라이프스타일
강 부장의 하루를 함께해보자. 아침부터 실적 타령을 하는 상무의 질책을 받고, 담배 몇 모금에 마음을 진정시킨다. 화장실에 들러 거울 앞에 선 자신을 보니, 많이 늙었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까지 대학에 보내려면 한참 멀었는데 건강이 걱정되어 점심 때 잠깐 건물 지하 헬스클럽에 간다. 그래 봐야 일주일에 한두 번이지만 말이다.
오후 업무를 보고 바이어와 만나는 저녁 식사에 동석한다. 횟집에서 1차를 하고 2차를 옮겼다. 하필 술 세기로 유명한 바이어 앞에서 술 못하는 상무 눈치 보랴, 빈잔 채우랴, 폭탄주 마시랴, 내가 부장이 맞나? 어느 덧 12시가 되고 겨우 택시를 잡아 바이어를 보낸다. 상무는 기사가 모시러 왔다. 나는? 또다시 간신히 택시를 잡았다.
1시 30분에 집에 도착하니, 당연히 아내와 아이는 자고 있다. 거실 소파에 잠시 기대 눈을 떠보니 아침 6시. 조금만 더 자려 했는데 큰 아이가 거실로 나왔다. 목만 까딱하는 녀석,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로 부쩍 말수가 줄었다. 초등학생인 둘째까지 일어나 정말 오랜만에 온 식구가 아침식사를 한다.
그래도 여전히 말은 없다. 침묵을 깨고 싶어 몇 마디를 던져보지만, 돌아오는건 단답뿐이다. 내가 누구를 위해 일하나 싶다. 8시, 씁쓸한 마음으로 회사에 도착한다. 졸음이 몰려와 커피 한 잔 뽑으러 가는 순간 문자메시지가 뜬다. '상무님께서 찾으십니다.' 잠이 확 달아난다. 전쟁은 오늘도 계속 된다.
③ 대한민국 부장들의 경제생활
대한민국 부장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여느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어보인다. 그들의 경제생활은 어떨까?
평균 연봉이 대략 7000만~1억원 선인 그들은 10명 중 8명 이상이 내 집 마련에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그들 중 절반 정도는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고 답했다. 즉, 대한민국 부장들의 절반은 대략 연봉 8500만원을 받지만 주택담보대출을 끼고 집을 보유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부장들은 돈을 어디에 많이 쓸까? 설문조사 결과, 그들은 수입의 4분의 1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자녀 교육비에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연봉을 8500만원이라고 본다면, 이 중 2400만원을 자녀 교육비에 투자한다는 말이다. 또 연봉의 12.6%가 대출금 상환에 들어가 대출원리금 상환 압박도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달리 본인에게 투자하는 돈은 적어,노후 대비를 어떻게 하고 있을지도 궁금해졌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노후 대비를 하고 있다'는 응답자가 다수(65.6%)였지만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도 30.7%로 꽤 많았다. 자신의 미래보다는 자녀의 미래를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④ 대한민국 부장들의 사회 인식 & 정치관
40~50대에 중상위수준의 소득을 가진 계층의 대한민국 부장들. 그들의 사회인식과 정치관은 어떨까?
본지 설문에 응한 부장들 중 절반 이상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이며,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응답했다. 박근혜정부의 국정수행 능력에 대해선 낙제점을 줬으며,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은 여야의 공동 책임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기업 정책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았고, 기업에 대한 시각 역시 냉소적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정부와 기업, 팍팍한 생활에 이민을 생각하는 이들은 절반이 넘었다. 자신은 이미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았지만, 아이들은 더 살기 편하고 공정한 사회에서 자라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다. 자식에게는 공정한 사회를 물려주고 싶지만, 부장들 대부분(80%)는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다.
이들이 원하는 공정한 사회란 '출발과 과정에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고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 사회'.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개혁이 가장 시급한 분야는 '정치'라는 답변이 단연 많았다. 그들이 원하는 공정한 사회가 실현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바랄뿐이다.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대한민국에서 부장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189명의 부장들에게 '대한민국에서 부장은 ( )다'란 문장의 빈칸을 채워달라 부탁했다.
임원이 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삶을 준비해야 하는 '미생'이자 권한 없이 책임에만 내몰리는 '계륵'. 실무에도 조직 통솔에도 뛰어나야 하는 '수퍼맨'이지만 위로는 임원, 아래로는 부하 직원의 눈치를 봐야하는 '동네북'. 그래도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리더'이자 조직을 이끌어가는 '살림꾼'.
신입사원에서 부장이 되기까지 평균 17.9년이 걸린다고 한다. 20년 안팎이라는 긴 시간 자신의 젊음을 회사에 바쳐온 그들. 미디에선 때론 악당처럼, 또는 수퍼맨처럼 그려지지만, 어찌 보면 20년 가까이 버텨 그 자리에 오른 월급쟁이일 뿐이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에서 부장이라는 직함이 결코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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