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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고종황제, 운명론에 심취하다

망국의 왕이기도 하며 구국의 황제이기도 한 고종, 자신감과 결단력이 부족한 고종은 을미사변을 겪은 이후 노력으로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기보단 역술가를 의존해 상황을 바꾸고자 한 운명론에 심취해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 이전까지 고종은 항상 누군가에 의지해 살았다. 12세에 왕이 됐을 때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그 후로는 흥선대원군이 10년간에 걸쳐 섭정했다. 대원군 하야 이후로는 명성황후 민씨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동안 결정적인 판단력과 추진력은 고종 자신이 아닌 신정왕후 조씨,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등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황제가 된 후 고종에게 더 이상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고종이 총애하는 엄 상궁은 명성황후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종은 이제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 스스로가 져야 했다.


이것이 두려운 고종은 결정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때마다 무당이나 역술가에게 의지했다. 자신감이 약한 고종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황제가 되기 전에도 무당이나 역술가를 좋아한 왕이었다. 그런 성향은 을미사변 이후 더욱 심해졌다. <매천야록>에서는 황제가 돼서도 사기꾼들에게 어이없이 당하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고종황제

▎고종황제는 적극적이지도 과감하지도 못했던 탓에 늘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했다. 고종이 외국공사를 접견하는 모습을 재현한 장면. / 사진·중앙포토


▧ 조선왕조의 멸망을 물은 고종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고종을 사로잡은 역술가는 정환덕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 아는 사람들을 통해 인사청탁을 했다. 당시 경운궁의 전화과장이던 이재찬이 정환덕을 고종에게 추천하게 됐다. 이재찬은 정환덕을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생의 길흉화복’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했다. 요컨대 정환덕의 역술점괘가 잘 맞는다는 뜻이었다.


고종의 질문은 자기 대에서 조선왕조가 멸망할 것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왕조의 생명이 500년이라는 예언들이 횡행했다. 그 증거가 종묘의 정문 이름인 ‘창엽’이라는 것이었다. ‘창엽’이라는 글자에는 조선이 태조 이성계 이후 20세대가 되거나 28대째 되는 임금 때에 망한다는 예언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고종이 정환덕을 만난 1901년은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이미 509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또한 고종은 조선의 26대 임금이었지만 세대로 치면 철종이 20세 대였다. 예언대로라면 조선왕조는 철종 대에 망했거나 아니면 고종 당대 또는 늦어도 손자 대에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강화도조약 이래의 온갖 풍파가 혹 왕조멸망의 징조는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다.


정환덕은 “폐하의 운수로는 정유년(1897)부터 11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 운수는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907년까지는 고종이 황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그 이후는 황태자가 계승할지 아니면 왕조가 멸망할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종은 “그렇다면 혹 기도한다면 꽉 막힌 운수를 피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 황제 자리를 연장하고 왕조의 운수도 연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종이 가장 알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정환덕은 “인재를 얻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고종은 뭔가 신통한 방법이 있을까 질문했는데 정환덕은 원론적으로 대답하고 만 셈이었다.


이날의 첫만남은 고종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무엇보다도 고종의 황제 운수가 1907년에 끝난다는 말 때문이었다. 정환덕은 마지막으로 “12월 그믐쯤에 화재의 염려가 있습니다”라는 예언을 하고 물러났다.


고종황제

▎덕수궁 함녕전의 황제 거처.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뒤인 1897년부터 함녕전에서 기거했으며 1919년 이곳에서 승하했다. / 사진·중앙포토


▧ 대한제국의 운명을 예언하다


신기하게도 12월 그믐에 정말로 화재가 발생했다. 고종은 정환덕의 신통한 예언에 감탄했다. 해가 바뀐 광무 6년(1902) 1월 7일에 고종은 함녕전 침실에서 정환덕을 만났다. 당시 그곳에는 오직 황태자와 엄비만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전에 딱 두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정환덕을 침실에서 만난다는 사실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그만큼 고종은 운수 또는 운명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고종은 명색이 황제인데도 나라가 보존될지 아니면 망할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고종은 내우외환에 휩싸인 대한제국을 살릴 자신도 없었으며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지도 잘 몰랐던 것이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내우외환을 극복할 생각보다는 혹 그런 내우외환이 운명은 아닐까 하고 의심한 것이었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인간적인 노력보다는 운명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어떤 신통한 방법에 매달리고 싶었던 것이다. 정환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였다. 자신은 신기한 예언력으로 고종에게 부름받았으므로 대한제국의 미래를 예언해야 했다. 그렇다고 망한다고 예언할 수는 없었다.


정환덕은 대한제국의 미래를 광무 9년(1905)까지라고 예언했다. 주역으로 본다면 그때가 건괘 초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묵은 것이 끝나고 새것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묵은 것이 끝난다는 의미는 망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거듭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정환덕은 망한다고 하지 않고 잘하면 더 좋아질 수 있다고 희망적으로 이야기했다.


정환덕의 신기한 역술에 감탄한 고종은 이 말도 믿었다. 정환덕의 말대로라면 대한제국은 1905년에 결정적인 전환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전환기를 반전의 기회로 삼아야 했다. 그러려면 정환덕처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후 고종은 정환덕이 하는 말은 거의 들어줬다. 그런 면에서 정환덕은 대한제국기 황제의 측근 자문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자문관이 역술가였다는 점이다. 역술가의 현실 판단과 미래 비전은 말 그대로 현실보다는 역술에 기초했다. 그런 면에서 고종의 광무개혁은 적어도 역술만큼 근대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고종황제

▎짧게 머리를 깎고 서양식 군복을 입은 고종의 사진(왼쪽 사진)과 곤룡포를 입은 고종의 어진. / 사진·중앙포토


▧ 전통과 근대의 사이에 서있는 황제


어진 속의 고종 황제는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상태로 용상에 앉아 있다. 익선관이나 곤룡포는 조선시대 왕들이 평상시 근무할 때 입는 복장이었다. 고종 황제가 착용한 익선관이나 곤룡포는 그 형태가 조선시대 왕들의 것과 동일하다. 배경에 쓴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도 조선시대의 이미지와 다를 것이 없다. 신고 있는 신발도 마찬가지다. 전통시대와 마찬가지로 진전(眞殿) 속에 깊숙이 비장되었다. 그런 면에서 고종이 황제가 돼서도 조선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했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짧게 깎은 머리를 드러낸 상태에서 서양식 군복을 입고 가슴에는 주렁주렁 훈장을 달고 옆구리에는 칼까지 찬 고종황제의 사진에서는 전통적인 이미지를 찾기 어렵다. 구두를 신은 모습에서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을 느끼게도 된다. 이 이미지가 사진이라는 점에서도 비전통적이다.


사실 짧게 깎은 머리를 드러낸 이미지 자체가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고종은 을미사변 후 단발령을 반포하기에 앞서 머리를 깎았는데,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도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이런 부분에서 ‘광무개혁’을 추진한 고종의 근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짧은 머리와 마찬가지로 서양식 군복과 훈장도 근대문물을 상징했다.


군복은 철저하게 근대화됐다. 고종황제가 착용한 군복은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모자도, 복장도 철저하게 서양식 군복이었다. 가슴에 붙이는 훈장도 전통시대에는 없던 근대문물이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칼도 발에 신은 구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습만 보면 고종황제는 전통과 단절된 근대인으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의 본 모습은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어진과 전통과는 단절된 군복 중 어느 이미지에 가까울까? 만약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어진이 고종의 본 모습이라면 고종은 전혀 근대화되지 않은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전통과는 단절된 군복사진이 고종의 본 보습이라면 고종은 철저하게 근대화된 황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고종이 추구한 본 모습이 아니었다. 고종은 완전한 전통인이 되는 것도 또 완전한 근대인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고종 자신은 전통을 계승하는 근대인이 되고자 했다. 고종은 그런 이미지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다.


고종황제 가계도

▎고종황제의 가족사진으로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황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셋째 아들 영친왕, 고종황제, 순종황제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대비,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 사진·중앙포토


▧ 전통과 근대의 조화를 추구하다


1902년 말 고종은 경운궁의 중화전에서 서양화가 조셉 드 라 네지에르(Joseph, de la Neziere)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적이 있었다. 네지에르가 얼굴을 스케치하는 작업이 끝나자 고종은 다시 들어가 정복을 갖춰 입고 나와 용상에 앉았다.


당시 고종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었는데 거기에 더해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이라고 하는 훈장을 착용했다. 고종이 전통적인 익선관과 곤룡포 위에 더한 금척대수장은 고종의 근대화를 상징했다. 이 금척대수장은 대한제국기 최고의 훈장으로서 황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고종황제가 서양식 군복을 입었을 때 착용한 훈장도 바로 금척대수장이었다.


그런데 금척대수장은 태조 이성계가 꿈에서 받았다는 금척(金尺)을 상징하는 훈장이었다. 훈장은 정 중앙의 태극을 중심으로 열십자 형태의 금척과 백색광선 그리고 오얏꽃 문양으로 조각됐다.


중앙의 태극은 하늘의 태양, 금척은 태조 이성계가 꿈에서 받은 황금 자, 백색광선은 태양 빛 그리고 오얏꽃은 전주 이씨를 상징했다. 이 훈장을 황색의 띠에 달아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에 드리웠는데 훈장은 왼쪽 허리부분에 위치했다. 또한 왼쪽 가슴에도 이 훈장을 달았다. 띠에 매단 훈장을 정장(正章), 왼쪽 가슴에 다는 훈장을 부장(副章)이라고 했다.


고종황제는 꿈속의 금척을 바탕으로 근대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다. 광무개혁의 기본노선인 ‘구본신참’ 또는 ‘법고창신’에서 ‘구본’이나 ‘법고’의 핵심은 바로 꿈속의 금척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종황제가 의지한 역술가는 또 하나의 꿈속의 금척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고종황제를 좋지 않은 시각으로만 보는 것은 섣부르다. 그가 역술가를 의존하게 된 이유는 무너져가는 처참한 상황에서도 자신과 나라의 권력과 안위를 지키려 했던 부담감과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선왕조의 비극부터 대한제국의 선포까지 부단히 걸어온 발자취를 기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