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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부산행으로 퍼진 대한민국의 좀비 열풍

<부산행>을 뒤이은 좀비열풍이 계속되고 있다. 기존의 흉가체험의 공포체험을 넘어 오감 자극형 엔터테인먼트로 좀비 호러가 진화한 탓이다. 과학 기술과 스포츠를 접목하여 대중성을 높여가는 좀비 체험의 인기로 주요 테마파크는 이미 좀비가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좀비


수풀이 우거진 사파리, 생명의 기운 대신 적막만 흐른다. 부엉이만이 간간이 애처롭게 운다. 애써 눈을 크게 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보지만 정체 모를 안개만 자욱하다. 바로 그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괴상한 몰골의 생명체(?)들이 버스를 에워싸더니 창문을 두드린다. “쾅쾅쾅!” 버스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죽을힘을 다해 탈출한 버스, 이번에는 길가에 멈춰 선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으니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란다. 승객들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뗀다. 뒤통수로 전해지는 서늘한 기운이 점점 가까워진다. 눈동자를 굴려 고개를 돌린 그 순간, “끄아아아! 켁! 엑!” 목이 반은 꺾인,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된(?) 괴생명체가 흰자위를 번뜩이며 삼킬 듯 입을 벌린다.


에버랜드


“꺄아아악!” 사람들 모두 출구를 향해 달려갔다. 이번엔 정면에서도 다가온다. 출구를 황급히 빠져나가자 닫힌 철문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며 절규한다. 다리에 힘이 풀려 숨을 고르는 사이, 환한 조명이 켜졌다. “축하합니다! 여러분은 호러 사파리를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경기도 용인의 삼성 에버랜드 ‘호러 사파리’는 기존의 동물원 사파리가 17년 전 사고로 폐장했다는 스토리에 기반하는 공포체험이다. 동물 대신 좀비 연기자 십수 명을 투입하며 공포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9월 6일 에버랜드를 찾은 김태민(24·부산 해운대구) 씨는 “우리가 알던 사파리에서 버스를 타고 체험하는 공포는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며 “별로 안 무서울 줄 알았는데 순간순간 깜짝 놀라 여러 차례 비명을 질렀다”고 말했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의 야외 어드벤처인 매직아일랜드는 섬 전체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할로윈 축제를 준비하다 미쳐버린 공연감독 ‘빅대디’가 매직 아일랜드에 좀비 바이러스를 들여온 까닭이다.


호러메이즈


9월 3일 오후 6시, 석촌호수를 가로지르는 메인 브리지에서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휴대용 스피커를 통해 경고 방송이 들리자 경비대는 즉시 섬을 ‘통제구역 M’으로 선포하고 다리에 검문소를 설치했다. 격리된 섬은 금세 어두컴컴해졌다. 누가 나와 같은 사람인지, 좀비인지 모른 채 관객들은 거리를 헤맸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린다.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좀비의 얼굴을 보자마자 관객들은 혼비백산했다. 놀이시설도 ‘감염’됐다.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동심의 세계로 안내하던 ‘판타지 드림’은 ‘좀비 나이트메어(nightmare)’로 변했고 회전그네 시설은 핏빛으로 물든 ‘저주받은 나무’가 됐다.


국내의 대표적인 테마파크인 에버랜드와 롯데월드가 10월 31일 할로윈데이를 앞두고 좀비 이벤트로 맞불을 놓았다. 9월 8일 개장한 ‘할로윈&호러나이츠’ 축제에 앞서 1일 먼저 문을 연 에버랜드 ‘호러 사파리’는 첫 주말 (9월 3~4일)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별도의 유료시설임에도 총 이용가능 인원의 90%가량이 들어찰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9월 3일 롯데월드에서 개장한 ‘호러할로윈: 좀비아일랜드’는 개장 당일 기준으로 전년 대비 25%가량 입장객이 늘었다고 한다.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 장비를 착용하고 걸어서 탈출하는 체험시설 ‘감독의 방’은 사전예약 20분 만에 매진이 됐다.


할로윈


좀비 호러 바람이 거세다. TV라면 리모컨을 돌려버리면 되고, 영화관이라면 밖으로 나오면 된다.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인 공포물이지만 놀이공원 등은 서로 ‘체험’하겠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에버랜드좀비


▒ ‘체험형’으로 변모하면서 매니어층 늘어


올해 상반기 한국 영화계에서는 좀비가 명실상부한 캐릭터로 자리 잡았다. 뜬금없이 좀비가 출현하는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 687만 관객을 동원했고, 한국 역사상 첫 좀비 영화인<부산행>은 누적관객수 1100만을 넘겼다. 사전 예매량은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 1위를 기록했을 만큼 관객들의 기대도 상당했다. <부산행>의 프리퀄(속편) 애니메이션 <서울역>은 ‘한국형 좀비 바이러스’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좀비(zombie)는 ‘되살아난 시체’다. 서인도 제도 원주민의 미신과 부두교의 제사장들이 주술 또는 마약을 투여해 살려낸 시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좀비는 한국처럼 한(恨)을 갖고 쫓아다니는 ‘머리 긴’ 귀신이 아닌 무자비로 감염되는 서양 귀신이다.


좀비귀신


좀비를 다룬 작품은 1932년 미국 <화이트 좀비>가 처음이다. ‘좀비 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로메로의 좀비 3부작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 <시체들의 새벽>(1978), <시체들의 날>(1985) 등은 잘 알려져 있다. 좀비 이미지는 대부분 여기에서 차용(借用)됐다. 떼지어 다니고 느릿느릿 걸어다니면서 물어뜯어 죽이는 무자비한 학살을 하고 전염성을 가졌다.


좀비는 90년대 중반 이후 드라큘라·늑대인간·뱀파이어가 인기를 끌면서 잠시 주춤했다. 그러다 <워킹 데드>(2010~), <월드워Z>(2013), <웜 바디스>(2013) 등 영화와 드라마에 액션 블록버스터 등을 입히면서부터 다시 각광을 받았다. 현재 미국드라마 <워킹 데드>는 시즌 6까지 방영하며 미 전역 시청률 1, 2위를 다투고 있다.


혈액주스


사실 한국에서 공포물 열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다 공포물이 ‘체험형’으로 변모하면서 매니어층이 더 늘었다. 앉아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관객을 이끄는 형식이다. 예컨대 국내 최초 동굴 공포체험인 강원도 정선의 화암동굴은 작은 손전등만 쥐고 통과하며 귀신을 마주하는 코스다. 이외에도 서울 대학로의 ‘귀신의 집’, 경기도 과천 ‘서울랜드 치맥나이트 존’과 ‘전주 한옥마을’, ‘대구국제호러연극제’, ‘합천호러축제’ 등 전국 여러 지역에서 체험형 호러 이벤트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온라인 카페에서는 수많은 공포 매니어가 오싹한 체험을 공유한다. 국내 최대 공포커뮤니티인 ‘잔혹한 소녀의 체험’은 회원 수만 16만 명에 달한다. 하루 방문자 수는 1000명 안팎이다. 엘리베이터·사무실·병원 등 평범한 일상에서 느낀 미스터리한 경험은 스릴감을 극대화시킨다. 심지어 이 카페에서는 종종 ‘흉가체험 모집’ 공고가 올라온다. 참가 희망자가 모이면 국내에서 가장 악명 높은 흉가로 알려진 경기도 광주시의 ‘곤지암정신병원(남양신경정신병원)’을 비롯해 전국의 폐교·흉가 등을 찾아간다. 때로는 퇴마사를 동반하기도 한다.


좀비


국내 테마파크 중 공포체험에 가장 먼저 팔을 걷어붙인 건 에버랜드다. 2011년 밀실 공포체험시설인 ‘호러메이즈 1’을 만들었고, 이듬해 ‘호러메이즈 2’도 선보였다. 호러메이즈를 경험한 김동건(23·서울 광진구) 씨는 “여자친구가 공포물을 좋아해서 따라왔는데 안 무서운 척하느라 혼났다”며 “다시 들어가자고 하면 절대 못 들어갈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곁에 있던 명주희(20·여·경기도 안산) 씨는 “호러물이라면 드라마·영화·체험 가리지 않고 찾아다닌다”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튀어나올까 봐 긴장하는 게 밀실 체험의 매력인 것 같다”고 말했다.



▒ 오직 물어뜯기만 하는 모습, 되레 친숙함으로


하지만 이러한 극한의 공포체험은 일부 매니어층에 국한돼 있는 만큼 지속적으로 이뤄지기 어렵다. 특히 실제 흉가를 찾아가거나 퇴마를 하는 체험은 초반에 관심을 끌지만 진정한 ‘공포 덕후’(광적인 팬 활동을 하는 ‘오타쿠’의 한국어 변형)가 아니면 도전하기 쉽지 않다.


공포와 재미의 ‘이종교배형’이 바로 좀비다. 좀비는 높은 대중성을 확보했다. 심영섭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좀비는 귀신보다 집단적 학살이 가능하지만 어찌 보면 코믹적 요소도 있다”며 “오직 물어뜯기만 하는, 구강적 욕망 가득한 모습은 마치 자본주의 시대의 단선적(單線的) 탐욕에 사로잡힌 우리의 자화상과 같다”고 말했다.



초등학생들에게도 좀비는 혐오스럽기보다 흥미로운 대상이다. 까치발을 들고 롯데월드의 좀비 퍼포먼스를 지켜보던 이동현(12·서울 송파구) 군은 “‘좀비 아일랜드’가 개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왔다”며 “직접 보니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다. 이군은 지나가는 좀비들을 볼 때마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와! 저 좀비가 허리를 더 잘 꺾어!” “거대 좀비는 정말 귀여워!”


직접 좀비가 돼보는 코스프레 체험이 인기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롯데월드 고객 체험 시설인 ‘감독의 분장실&의상실’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자신의 얼굴을 괴상하게 꾸미거나 칼날이 머리를 관통한 소품으로 좀비를 연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분장은 영화 속 좀비를 뺨칠 정도로 사실적이다. 한경원 롯데월드 상품팀장은 “고객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기 위해 마련한 이벤트인데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며 “특히 여성 고객들이나 청소년들 사이에서 호러 아이템에 거부감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게임을 접목한 체험도 늘었다. 소셜 벤처업체 ‘커무브’가 만든 국내 최대의 ‘좀비런 페스티벌’은 좀비와 추격전을 벌이는 술래잡기형 스포츠 이벤트다. 전국 여러 경기장에서 열리는 이 이벤트는 쫓고 쫓기며 미션을 수행하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2013년 연세대 축제 때 처음 등장한 이후 젊은층의 열렬한 호응을 얻어 체험형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재미를 입힌 이색적인 호러 카페와 식당도 인기다. 강남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마녀주방’은 수액(輸液)주머니에 빨간 칵테일을 담고, 잘린 손가락 쿠키가 얹어진 돈가스, 해골 프라이 등을 선보이고 있는데 기괴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워 계절에 상관없이 인기를 모은다.


롯데월드 카페에서 차용한 ‘좀비스러운’ 메뉴들도 마찬가지다. 새빨간 짜장면, 눈알 탕수육, 쑥딱 손가락 돈가스, 좀비 백신에이드, 눈알피자, 미라소시지, 눈알 퐁당 에이드, 피 터지는 꼬치, 손가락 버거 등 이름부터 기발한 메뉴들이 눈길을 끈다. 김재현 롯데월드 식음지원팀장은 “강력하게 시선을 끌 만한 아이템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며 “보는 즐거움뿐 아니라 공포의 식도락 테마로 찾아오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VR 증강현실 등 오감 자극형으로 진화


좀비는 과학기술과 어우러지며 한층 더 실감나게 진화했다. VR장비를 착용한 좀비가 가득한 통로를 지나는 롯데월드 ‘감독의 방’은 사실적인 움직임과 음향 때문에 공포감이 극대화된다. 중간에 장비를 벗어버리는 관객도 있고, 소리를 내지르며 통로를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다.


또 ‘다크케이지’는 영화와 연극을 결합시킨 상황극이다. 스크린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좀비 연기자들을 보다 보면 현실인지 가상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더 실감난다. 에버랜드는 적외선 셀프 액션캠을 통해 ‘호러메이즈’를 이용하는 본인의 얼굴을 촬영할 수 있는 체험도 마련했다. 공포에 질린 고객의 표정이 압권이다.


영화관도 보는 재미를 넘어섰다. 9월 22일 개봉하는 일본 좀비 영화 <아이 엠 어 히어로>는 전국 CGV 극장에서 4DX 상영을 결정했다.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모션 체어(움직이는 의자)를 사용한다. 좀비 1인칭 시점에서 카메라가 움직일 때마다 시선에 맞춰 흔들리고 좀비들이 내는 ‘그르렁’ 소리가 나올 때는 의자의 진동 효과가 더해진다. 관객들의 발목을 살짝 스치는 ‘티클러 효과’나 ‘페이스 에어샷’, ‘물 효과’ 등으로 촉감까지 사로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좀비분장


또 청각만으로 즐기는 가상현실 게임 ‘좀비 오디오’도 있다. ‘바이노럴 사운드 호러 게임’이라는 새로운 장르다. 이어폰만으로 청각 가상현실을 경험할 수 있도록 바이노럴(binaural) 기술을 적용해 마치 좀비가 앞·옆·뒤를 둘러싼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좀비물은 이제 단순한 공포 아이템이 아닌 축제형 엔터테인먼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보는 것에서부터 먹고, 듣고, 느끼는 체험으로 쾌감을 극대화한다.


VR 좀비


왜 좀비일까? 에버랜드에서 만난 이지영(28·여·대구 수성구) 씨는 “실제로 보여지고 만져진다는 점에서 좀비가 귀신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며 “나 또한 피해자(인간)가 아닌 가해자(좀비)가 될 수 있다는 공포도 스릴 있다”고 말했다. 심영섭 교수는 “사람들의 분노나 절망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공포영화나 체험을 통해 안전하고 극단적인 판타지로 배출할 수 있다”며 “우리 사회의 소외된 타자(他者)가 좀비가 돼 자신의 충동을 마음대로 행동화하는 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좀비 호러 아이템은 앞으로 더 강력한 ‘참신함’을 과제로 안고 있다. 유석준 에버랜드 크리에이티브팀장은 “최근 영화 <곡성>과 <부산행> 등의 히트에서 봤듯이 호러는 분명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며 “소비자들은 비슷한 공포물에는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매년 새롭고 업그레이드된 체험을 선보이기 위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오감을 자극하는 더 짜릿하고 소름 돋는 좀비 진화의 끝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