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번역철학자 앙투안 베르만은 이렇게 말한다. '한 문학작품의 가치는 그것이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될 만 한가에 의해 결정된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국제부문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과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 이들이 일궈낸 번역, 문학상의 가치를 이야기해보자.
◈ 데보라 스미스 번역의 놀라운 성공
한강의 작품을 영어로 옮긴 이는 런던대학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한 데보라 스미스다. 영어로 옮긴 작품에 대해 평가를 하고 상을 주므로 그녀가 한강의 수상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상을 준 심의위원들은 한강의 소설에 대해 ‘생소함의 깊이로 놀라움을 자아내는, 감동적이고 암시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이 평가는 우리가 작품을 읽으며 느낄 수 있는 것을 그대로 잘 드러내주고 있다. 번역이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음을 방증하는 말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이 소설에 대한 평가 중 ‘생소함’은 극장에 막 들어갔을 때 어둠 속에서 어리바리하게 손과 발을 떼는 관객의 그것과 같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 속 그레고르 잠자처럼 작품의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작가는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의 인물들을 갑작스런 상황 속에 위치시킨다. 카프카의 경우처럼 결국 영혜는 주위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무언가에 반항을 하면서 죽어간다. 일상의 반란이다. 작가는 줄곧 겉, 즉 표면만을 이야기한다. 꿈 때문이라고 변죽을 울려놓고서는 겉만 이야기하고 속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줄곧 궁금하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표면 아래에서는 뭔가가 오래도록 부글부글 끓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시적인 상상력에 의한 산문으로 푸르고 작은 꽃잎, 푸른 몽고반점이 그림의 바탕에 깔리며, 그렇기 때문에 상징적인 측면이 강하다. 겉으로는 꽤 그로테스크하지만 이면에는 동화와 같은 분위기가 깃들어 있다. 또한 화자의 소곤대는 듯한 문체가 내적 독백처럼 번진다. 주인공 영혜는 자신의 신체를 새롭게 규정하려 한다. 그녀는 억압에 의해 규정된 운명을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것은 식물성으로 특징되는 존재, 즉 나무가 되는 것이다. 폭력과 슬픔이 남긴 흔적과 그에 대해 저항하려는 주인공의 의지가 조용하고도 굳건히 식물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인 의지에 의해 동반된다. 그녀의 저항방식은 나무처럼 수동적이고 끈질기다. 현실 속에서의 그녀의 사회적 기능은 마치 고장난 자명종이나 전자레인지 같다. 소설은 생명의 자연성과 인간의 인위적 이데올로기, 두 극단의 대결구도로 전개된다.
◈ 문체의 특징과 작품 전체의 분위기 살려야
그렇다면 작품에서 포인트가 될 만하며 번역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들은 무엇인가? 먼저 세 사람의 서술 문체의 특징을 살린 번역이 필요하다. 그 다음은 작품의 전체 분위기다. 오역은 한두 개 낱말의 그릇된 번역보다 전체 문맥과 분위기를 도외시하고 세세한 것에 얽매일 때 생긴다.
<채식주의자>가 영국의 출판사 포르토벨로 북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나온 것은 2015년의 일이다. 2016년 8월에는 이 소설이 베를린에 터를 둔 아우프바우 출판사에 의해 출간되면서 독일 언론의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다층적이고 감각적이고 시적이며 상궤를 벗어난 독특한 작품의 출간을 환영하는 글이었다. 한 매체는 “이 소설은 독자의 마음속을 온통 파헤치고 깊은 인상을 남겨놓는다”고 평했다.
이 작품의 영문 판본은 영국인 데보라 스미스가, 독일어 판본은 한국인 이기향이 각각 번역했다. 영어판의 경우는 직역보다는 소통 쪽에, 독일어판의 경우는 원문을 그대로-물론 영어판을 참조한 듯 약간씩의 변형은 있다-따르는 쪽의 번역을 택했다. 맨부커상을 받을 때 큰 공을 세운 것은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이다. 우리말 원본과 영문판 번역을 비교해보면 은근히 많은 부분이 원문과 다르게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의 현지화에 많이 신경을 쓴 모습이다. 물론 번역자는 우리말의 ‘소주’를 그냥 ‘소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면 영어 번역의 장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번역자가 원문이 함의하고 있는 큰 줄기를 잘 살려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돋보이게 할 것은 돋보이게 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악센트를 두지 않는 쪽을 택한 번역이다. 이런 면에서 심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독일어로 ‘Umdichtung’ 즉 ‘개작’에 가깝다. 원작에 봉사하는 번역이 아니라 수용하는 쪽의 효과에 역점을 둔 번역이다. 만약 번역 심사를 해서 최우수상을 뽑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작가의 섬세한 표현은 분위기와 줄거리를 위해 잘려나간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영국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번역의 충실성은 낱말들의 정확한 변환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즉 낱말 하나, 문장 하나의 오역이 전체를 호도할 수는 없다. 두 가지 텍스트 즉 원본과 번역본을 놓고 보았을 때 낱말 하나하나가 그릇된 것 같지 않은 번역이 사실은 작품을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직접 대조를 하면 문제가 없는 듯하지만 번역만 홀로 세워놓았을 때 완전한 독립체가 되지 못하는 번역이 있기 때문이다.
데보라 스미스의 작업은 이런 면에서 완전한 홀로서기에 성공한 번역이다. 번역이 어설프게 빗나가지 않고 탄착점이 완전하다. 물론 인칭 대명사를 잘못 파악하거나, 군데군데 빠진 문장이나 어구, 낱말들이 있는 것은 아쉽다. 그러나 그녀는 전체 문맥을 파악하여 원문을 다시 한 번 새겨서 영어로 옮기면서 더 많은 호소력을 가져오려고 애쓴 것 같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영어로 번역해 일본에 첫 노벨문학상(1968년)을 안긴 번역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는 “가와바타는 이 상의 절반은 나(사이덴스티커)의 것이라고 언론에 말했다”고 회고한다. 번역가가 작가와 작품을 잘 이해하여 도착어 문화의 환경에 적절한 언어로 옮기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있다.
그 땅의 독자들이 소개되는 문학에 아직 익숙하지 않을 때이다. 이것은 괴테가 말한 번역의 3단계로 설명된다. 첫 단계는 시작 단계로서 생소한 이질 문화의 산문적 번안(풀어쓰기)이고, 둘째 단계는 여기서 조금 나간 자기 것을 바탕으로 한 패러디의 단계(의역 수준)이며, 마지막 단계는 독자의 입장에서 외국문학에 대한 더 깊은 호기심의 발로로서 원문을 대체할 수 있는 번역에 대한 요구의 단계(직역 수준)이다. 귀화한 헤세나 릴케 같은 것이다. 이 마지막 단계는 사실 낯선 것에 대해 저항하는 독자들에게 비난을 듣기 십상인 번역이다. 이질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가능하다.
한강의 작품은 이제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는 길을 가는 가운데 점차 더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한강의 작품 속에는 번역을 요구하는 잠재된 요소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독자들에게서 한쪽에서 부족했던 모습이 다른 쪽을 통해 채워지며 괴테가 말한 온전한 ‘세계문학’을 향해가는 것이다. 작품은 독자의 가슴속에서 비로소 완성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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