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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라는 공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여준다. 집주인의 취향, 성격은 물론이고 생각의 논리회로, 일종의 알고리즘(algorithm)까지 무의식적으로 투영한다. 나는 조용히 읊조리는 음악을 좋아하고, 강약이 없는 단조로운 글을 쓰는데다 별것 아닌 소소한 농담에 웃음이 터진다. 그래서인지 내가 꾸미는 공간도 자연스레 복잡한 장식이 없는 심심한 공간이 되곤 한다. 보이는 것 이면의 ‘근원’을 추구하는 내 알고리즘이 투영된 까닭이다.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저 색들의 바탕은 무엇인가, 기교적으로 꾸며놓은 장식물을 만들어낸 근원의 에너지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시작된 최초의 점들을 깊이 쫓아갈수록 분별은 사라지고 형태는 무의미해진다.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 최소한의 가구와 소품만 두는 심플한 인테리어 안에도 고유한 알고리즘이 숨어 있다. ‘단순화할 수 있는가, 없는가’. 집이라는 공간을 가장 손쉽게 단순화하려면 비우고 버리는 것이 최고다. 공간을 미니멀리즘으로 꾸미는 사람은 누군가를 만날 때도 일을 할 때도 관계를 단순화하고 싶은 욕구가 꿈틀댄다. 개인주의가 강해질수록 미니멀리즘 인테리어가 강세인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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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만든 공간을 보면 내 머릿속 세상이 보인다. 내가 공간을 구획하고 분할하고 배치하는 방식대로 우리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행해나간다. 경기도 이천시 중심가에 있는 A씨의 집도 집주인의 알고리즘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40평대의 비교적 새 아파트로 지난해 리모델링을 거친 이 집은 한눈에 봐도 트렌디하고 깔끔해 보였다. 최근 인터넷 블로그에서 유행하는 스타일로 꾸민 탁 트인 주방. 작은 유아용 세면기가 있는 욕실. 아이들 책과 장난감으로 채워진 거실과 방들. 이런 집 안의 포인트들을 하나로 연결하면 A씨 만의 알고리즘이 보이기 시작한다.
▒ 자녀 물건으로 채운 집일수록 불화가 잦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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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아이가 자라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발판을 두는 데 그치지만 ‘지금 당장’이 중요한 A씨에게 유아용 세면기는 꼭 필요한 아이템이다. 아이들 책과 물건들로 채워진 거실과 방들 역시 요즘 그녀가 집중하고 있는 게 ‘교육’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안방을 제외한 방 3개가 모두 아이들 공부방과 놀이방으로 꾸며져 있었고, 널찍한 거실마저 아이들용 책상과 책장이 한편에 있었다. 이 집은 한마디로 두 아이만을 위한 40평짜리 ‘키즈카페’이자 공부방이었던 셈이다.
사실 오늘 만나게 된 것도 아이들에게 도움 되는 공간을 꾸미고 싶다는 A씨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집을 모두 돌아본 뒤, 내가 정말 궁금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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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4개나 되는데 가장의 공간은 없나요? 아빠도 쉬고 재충전할 공간이 필요할 텐데요.”
“그렇긴 한데, 아빠가 방에 있으면 어차피 애들이 들어와서 같이 놀기 때문에 따로 공간을 둔다는 게 의미가 없어서요.”
그때 옆에서 A씨의 얘기를 조용히 듣던 A씨의 남편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 넓은 집에 제 공간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욕실 안 작은 욕조요. 제가 유일하게 혼자 쉴 수 있는 곳이죠.”
개인사업을 하는 A씨의 남편은 젊은 나이에 꽤 성공했지만 그만큼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한민국 가장이 그렇듯, 그는 집 안에서도 쉴 곳이 없었다. 다행히 워낙 가정적인 성품이라 지금까지는 아내가 하자는 대로 군말 없이 따라왔지만 지치고 예민한 날엔 부부가 충돌하는 일도 잦았다. 이날도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흘렀다.
“집 안 전체에서 아이들을 소중히 잘 키우려는 엄마의 노력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그 부분은 남편 분도 인정하고 계시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곳은 단지 아이들만의 집이 아니라는 거예요. 부모도 함께 쉬고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집에 정말 필요한 것은 ‘공간 민주주의’예요.”
온 가족이 함께 사는 집 전체가 특정한 한 가지 아이템으로 도배돼 있다고 상상해보자. 예를 들어 아빠가 분재를 너무 좋아해 거실이며 심지어 아이들 방까지 화분들로 가득 채운 집에 들어가면 어떤 기분을 느낄까. 아마도 강박증 환자를 보는 듯한, 숨 막힘이 밀려올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집을 꾸미는 당사자들은 사방에 널린 분재를 보며 끊임없이 분재에 대한 얘기만 한다. 그러니 이런 집에서 가족 간에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갈 리 없다.
아이의 물건으로만 채워진 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집은 엄마의 머릿속에 오직 아이만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대로 말하면 아이 이외에는 삶의 희망과 즐거움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자녀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못 버린다는 것은 지금 새로운 추억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고, 아내가 남편에게 아이 얘기만 한다는 것은 부부가 오로지 아이를 매개로만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 가족 구성원 각자의 ‘자치구역’ 인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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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집 안 내 권력자의 의지대로만 공간이 만들어지거나, 한 사람이 아끼는 물건으로만 채워진 독재적인 공간은 사람으로 치자면 강박증이나 자폐에 걸린 것과도 같다. 이 때문에 공간도, 그곳에 사는 사람도 건강하려면 공간 민주주의가 구현돼야 한다.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민주적으로 공간을 배분하고, 각자의 물건이 적당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A씨에게 먼저 남편의 방을 따로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물론 아이들이 자연스레 아빠 방에 들어가겠지만 심리적으로 내 방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굉장히 큽니다. 작더라도 집 안에 내 영역, 내 공간이 있어야 아버지로서의 자존감도 지켜질 수 있어요. 지금처럼 정서적 유목민 생활을 계속하면 마음이 집에 안착하지 못하고 밖으로 떠돌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대한민국의 아버지가 자신만의 공간을 잃어버린 채 ‘소파 유목민’ ‘자동차 유목민’으로 살아간다.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왜 소파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느냐, 왜 집에 일찍 안 들어오느냐 타박하지만 사실 남편들은 그곳 외에는 갈 데가 없다. 남자를 집 안에서 활력 있게 움직이게 하려면 그럴 수 있는 공간을 먼저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형편상 방 하나를 내줄 수 없다면 안방의 한쪽 코너나 거실 한편도 좋다. 남편이 안정감을 느낄 만한 안락의자라든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놔두는 책상 등 그만의 영역, 함부로 터치할 수 없는 ‘자치구역’을 만들어 주면 된다. 이는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구획하고 편집하는 힘만 있으면 가능하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매스게임(mass game) 같은 공간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됐다. 과거 공산권이나 독재 시대에 유행했던 집단체조는 한 치의 오차 없는 일사불란함으로 체제의 견고함을 과시하곤 했다. 언뜻 보기에 화려해 보이지만 자유분방함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는 독재와 권위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그런데 집이라는 공간을 꾸밀 때는 한 사람의 기호대로 일사불란하게 꾸며진 집, 독재적인 인테리어를 멋있다고 느낀다. 뭔가 콘셉트가 통일되지 않고 부조화스러우면 촌스럽거나 혼란스럽다고 느끼는 것이다.
▒ ‘인테리어 콘셉트’보다 ‘가족의 철학’이 필요
나는 지금의 집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인테리어 콘셉트보다는 가족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의 철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내와 아이와 함께 만든 공간의 철학은 ‘영감이 떠오르는 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다. 고가구나 책을 보면 영감이 떠오르는 나는 서가와 진열대를 꾸몄고, 오래된 항아리를 보면서 편안한 감수성을 느끼는 아내는 아끼는 차항아리를 거실 한편에 두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작품들을 벽에 붙여놓고 볼 때마다 즐겁게 재잘댄다.
나침반 같은 공간의 철학을 만들되 이를 구현하는 방식은 각자에게 맡기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공간 민주주의다. ‘국민이 행복하게 잘사는 것이 공통의 지향점’일지라도 이를 구현하는 방식은 보수일 수도 진보일 수도 있다. 그걸 허용해주고 인정해주는 게 바로 민주주의 국가이고 살기 좋은 나라이듯, 공간도 각자의 취향과 요구를 인정해줘야 소통이 되고 활기를 띤다. 지금부터라도 공간에 정해진 지도를 만들려 하지 말고 나침반 같은 철학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공간 민주주의가 이뤄졌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그 민주적 공간을 꾸미느냐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공간을 차지하는 가구나 소품들의 위치다. 하지만 자가 설계가 아닌 대부분의 집들은 가구나 가전제품을 두어야 할 위치가 이미 정해져 있다. 거실은 한쪽 벽에 TV를 두고 반대쪽 벽에 소파를 두게끔 설계돼 있고, 주방은 거실과 연돼 냉장고나 식탁을 둬야 할 곳에 콘센트며 조명을 미리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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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자리가 정해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공간일지라도 소품들의 거리와 위치의 변화만으로도 공간은 다른 느낌과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개울물에 디딤돌을 두면 돌 주위의 유속이 달라지고 흐름이 바뀌듯 어떤 물건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그 공간에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필요한 스페이스로지, 공간의 기술이 바로 ‘120도의 법칙’이다. <눕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쓴 베른트 브루너는 대략 127도 정도로 편히 기댄 자세가 척추에 가장 편안한 자세라고 설명한다. 일직선이 되게 눕는 것이 아닌 적당히 구부러진 자세에서 척추가 받아야 하는 저항은 최소화되고 긴장은 풀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이 정도 각도로 기댄 자세를 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락한 휴식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몸의 감각은 우리가 세상을 느끼는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 거실 소파를 120도로 놓으면 ‘대화의 각’도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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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성뿐이 아니라 영혼을 다루는 운명학에서도 120도의 법칙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양의 점성학에서 영혼과 마음의 조화가 이뤄진다는 트라인(trine)은 행성 간의 위치가 120도(±8도)가 될 때를 말한다. 서로 다른 세 개의 힘이 모여 하나의 강력한 힘으로 변하는 명리학의 삼합(三合)도 중심에서 보았을 때 각 지지(地支)가 120도의 관계를 맺는다.
이런 120도의 법칙은 집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먼저 대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가구인 소파의 위치를 잡는 것이다. 집에 있는 소파가 일자형이라면 마주 보고 앉을 수 있는 일인용 소파나 의자를 마련하는 게 좋다. 거실이 좁아 불가능하다면 방석도 괜찮다. 소파 사이에는 테이블을 둔다. 이때 중요한 건 의자들의 위치가 120도를 유지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마주 보는 긴 소파가 있다면 앉는 자리를 조절하면 된다. 이렇게 공간 배치를 하고 나면 서로 앉아서 대화할 때 의외의 안정감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사람을 대할 때 눈을 보며 마주 앉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관찰 당하는 느낌이 들어 무안할 때가 있다. 또한 나오는 말도 90도 직각처럼 조금은 직선적으로 나오기 쉽다.
이때 120도의 각도를 유지해 보면 시선 처리의 편안함을 금방 느낄 수 있다. 카페 같은 곳에서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할 때도 살짝 옆으로 비켜난 곳에 앉으면 좀 더 부드러운 대화가 가능해진다.
한쪽에 의자나 소파를 뒀다면 120도의 각을 이루는 반대편에는 가족 모두의 추억이 담긴 소품이나 각자가 흥미롭게 읽었던 책 등을 진열하는 장식장을 두는 것이 좋다. 사람의 시야각 역시 120도가 정도 되는데 이는 내가 시선을 맞추지 않고도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를 말한다. 그 범위 안에 내가 좋아하고 함께 즐거워했던 물건을 두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무의식적인 긍정의 신호를 받게 된다. 잔잔히 깔리는 드라마의 배경음악처럼 대화에 리듬을 실어 주고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사소한 소품들이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소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마치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풍수 명당처럼 공간의 기운이 쉽게 새나가지 않고 힘 있게 모이게 된다. 넓게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거실을 휑하게 두는 것은 거실의 에너지를 분산시켜 생기를 잃게 만든다. 반면 힘 있는 공간은 그곳에 있는 사람을 무기력하게 두지 않는다. 서로를 소통시키고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 거실을 가족 모두의 ‘즐거운 놀이터’로 만들라
나는 거실의 구심점도 가족 모두의 장난감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편하고 재미있는 것. 아빠 혹은 엄마 한 사람에게만 재미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편하고 싫지 않은 것, 도움 되는 것으로 일종의 ‘가족 놀이터’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가족 공통의 취미나 공통점을 찾는다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직장인 B씨는 맞벌이하는 아내를 위해 거실 한편에 긴 방석을 놓고 작은 ‘마사지실’을 만들었다. 매일 야근에 지친 아내가 안쓰러워 밤마다 눕혀놓고 발을 밟아준 것이 처음 시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내도 서툰 솜씨로나마 남편의 등이며 어깨를 마사지해 주기 시작했고, 마사지 장비도 몇 개 들여놨다. 그렇게 서로의 뭉친 근육을 풀어주다 보니 오가는 대화도 바뀌기 시작했단다.
“사실 저희는 결혼한 지 15년이 넘어 평소에 별로 대화도 없었어요. 그런데 서로 마사지를 하면서부터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지 말도 부드러워지고, 아내가 지금 왜 힘든지 얼마나 힘든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속 깊은 얘기도 많이 하게 되고요. 지금은 가족들이 몸이 좀 뻐근하다 싶으면 자연스럽게 방석에 누워요. 저 마사지 방석이 저희 집의 작은 놀이터인 셈이죠.”
이처럼 놀이터의 아이템은 무엇이어도 좋다. 보드게임도 좋고, 악기도 좋고, 책도 좋다. 지금까지 없었다면 이제부터라도 만들면 된다. 중요한 것은 따뜻한 대화와 즐거운 교감이 오갈 수 있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만들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공간은 반드시 우리에게 기대 이상의 선물을 준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가장 고귀한 건축이 때로는 낮잠이나 아스피린이 주는 작은 위안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공간일지라도 우리에게 실질적인 힘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신기율 - 과학·종교·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대학 졸업 후 약 15년간 철학자로서의 남다른 혜안으로 세상과 사람의 깊은 본질을 마주한 결과 국내 최초로 ‘직관’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현재 직관과 마음 치유 그리고 차(茶)를 결합한 기율다원(己律茶院)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2015년 베스트셀러 <직관하면 보인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