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이 가장 거절하기 힘든 게 바로 채용 부탁이에요.” 전직 금융권 CEO의 말이다. 그는 “채용을 부탁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고위층인 경우가 많아 거절하면 관계가 소원해져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고, 그렇다고 채용할 수도 없고 그런 부탁이 올 때마다 참 괴로워요.”
지난해 10월 우리은행을 시작으로 금융권 채용비리 의혹이 연이어 불거졌다. 우리은행은 최근 3년 간 신입사원 공채에서 국가정보원과 금융감독원 직원, 은행 VIP 고객 자녀 30여 명을 특혜 채용했다는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 일로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은 스스로 물러났다. 이어 KEB하나은행과 KB국민은행도 2015년과 2016년에 채용에서 특혜를 주기 위해 각각 55명과 20명의 명단이 담긴 ‘VIP리스트’를 작성·관리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특히 KB국민은행은 윤종규 KB금융 회장 누나의 증손녀가 합격 점수에 미달했는데도 최종 합격된 것으로 알려져 특혜 의혹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사실 채용비리는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금융사는 물론 공기업, 사기업의 특혜 채용은 곳곳에 만연해 있다. 지난 10월부터 정부 합동으로 275개 공공기관 채용비리 전수조사 결과 점수 조작, 부정 지시 등 채용비리로 의심되는 사례가 143건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채용비리가 반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채용 부탁 거절 후에 생길 후폭풍 때문이다. 기업은 사업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정부에 입김이 센 기관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관계에서 정·관계 청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란 쉽지 않다. 기업 VIP고객의 부탁을 거절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CEO가 가장 거절하기 힘든 게 채용 부탁”
A증권사 CEO는 3년 전 B기업 CEO로부터 자신의 아들을 인턴사원으로 뽑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둘은 막역한 사이인데다 B기업은 A증권사 VIP고객이었다. A증권사 CEO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B기업 CEO 아들을 인턴사원으로 채용했다. 3개월 인턴이 끝난 후 B기업 CEO 아들은 정규직으로 전환돼 해당 증권사에서 현재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이 증권사 관계자는 “채용 부탁을 모두 들어주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비지니스 관계에서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면서 “그러나 채용점수가 미달될 때에는 가산점을 줄 수는 있지만 채용 자격조건에 미달되면 아무리 청탁이어도 들어주긴 어렵다”고 말했다.
일자리가 줄고 있는 것도 채용비리가 늘어나는 이유 중 하나다. 과거에는 수백 명씩 채용하는 기업이 많았지만 지금은 어려운 경영환경에 신규 채용이 줄어드는 추세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부터 올 1분기까지 300인 이상 사업체의 채용계획 인원은 3만 명에 그쳐 1년 전보다 8.8% 줄었다. 일자리는 줄면서 청년실업률은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청년실업률은 9.9%다. 지난 2000년 관련 통계를 편제한 이래 최고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기업의 서류 전형 평균 경쟁률은 수십대 1을 넘는다. 은행은 100대 1을 훌쩍 넘는다. 사람인에 따르면 2016년 기업 인사담당자 30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취업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는 응답은 전년도(30.7%)보다 10.0%포인트 증가한 40.7%나 됐다. 이 가운데 반 정도인 48.8%는 실제로 채용에 도움을 줬다’고 답했다.
여기에 기업 전·현직 임원이나 직원들의 자녀에게 가산점을 주거나 우선·특별채용하는 일명 ‘고용세습’ 조항도 문제다. 고용노동부가 2016년 2769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한 ‘단체협약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사업장의 약 40%에 이르는 사업장(694개)에서 전·현직 직원 가족의 직계자녀 등에게 채용 가산점을 부여하고 있었다.
고용노동부는 단체협약에 조합원 가족을 특별·우선 채용하는 내용이 있는 기업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리고 있지만 노동조합이 반발해 노사 간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대판 음서제(蔭敍制, 조선시대 공신, 고위 관리 자제가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관리로 등용되는 제도)로 불리는 이 조항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면서 SK하이닉스·SK이노베이션 등은 노사 단체협상에서 이 조항을 삭제했다.
그러나 현대·기아차, GM대우, 대한항공, GS칼텍스 등은 고용세습 조항을 단체협약에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만약 점수가 동일한 면접자가 있는데 그중 25년 이상의 장기 근속자 직원 자녀가 있다면 조직 인지도나 충성도 등을 감안할 때 직원 자녀가 나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GS칼텍스는 지난 2015년 조합원 자녀 우선채용 내용을 삭제했지만, 업무상 재해로 순직 또는 퇴사 경우 자녀 채용 조항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블라인드 채용, 적재적소 인재 뽑기 어려워
반복되는 채용비리 논란으로 업계에서는 청탁이 오면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하는 ‘청탁신고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채용비리에 연루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해임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불공정한 채용 사실이 밝혀졌을 때 해당 CEO뿐 아니라 해당 기업이나 기관도 불이익을 받도록 해서 채용 청탁을 근절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기업들도 특혜 채용 논란을 없애기 위한 자정노력을 하고 있다. 수년 전부터 출신 지역과 학력 등을 보지 않는 블라인드(Blind) 채용 방식을 도입한 데 이어 올해는 블라인드 방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공공기관 블라인드 채용계획을 밝히면서다.
현대모비스는 지난해 학력·학점·영어점수 없이 채용하는 ‘미래전략전형’을 도입했다. CJ그룹도 채용 인원의 20% 정도를 학교·학점 등을 기재하지 않는 ‘리스펙트 전형’을 신설했다. 신한카드도 학력·나이·성별 등을 보지 않고 디지털 역량만을 평가하는 ‘디지털 패스’ 전형을 선보였다. ‘디지털 패스’는 디지털과 카드를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담은 5분짜리 영상으로 평가를 받는 일종의 오디션 방식이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블라인드 채용은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회사 업종이나 직무에 따라 채용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가령 은행은 출신학교와 지역할당 제도가 있기 때문에 블라인드 채용으로 선발하기가 쉽지 않다”며 “또 요즘은 직무별로 뽑는 경우도 많아서 지원자의 실무능력에 대한 검증을 하지 않고서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뽑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유통업계 한 채용담당자는 “지원자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지원자의 품성이나 성향 등을 알려면 과거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등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본적인 소개서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