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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대기업 임원이 퇴직 후 책방을 차린 이유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성지가 생겼습니다. 문을 연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이미 입소문이 났는데요. 


책방 주인 백영란 대표는 어렸을 적부터 역사를 사랑한 '역사덕후'입니다. 그녀는 대기업 임원 퇴직 후, 오랜 꿈을 이루게 되었는데요. 백영란 대표와 역사 책방에 관한 이야기,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백영란 대표

 

“독립 서점은 일종의 자영업입니다. 책방 주인으로서 모든 의사결정을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죠. 대기업 임원 시절엔 그렇지 않았고, 프리랜서는 자유롭기는 하지만 사업에 관한 의사결정을 하는 건 아니죠.” LG유플러스 상무 출신인 백영란 역사책방 대표는 “독립 서점은, 그렇다고 출판사처럼 경우에 따라 대박이 날 수 있는 비즈니스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봄 백 대표가 차린 서울 통의동의 역사책방은 주 7일 문을 연다. 편의점과 다를 게 없다. 경복궁 서쪽 서촌 사람들은 역사 이야기를 쇼핑하러 동네 편의점 드나들듯 매일 아무 때나 역사책방을 찾을 수 있다. 조선의 문무백관이 드나든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 앞에 자리 잡아 관광객도 들른다. “주 7일 오전 10시 반에 열고 10시에 문을 닫아요. 책방을 찾는 고객의 눈높이에서 주 7일 개점은 당연한 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그 역시 이 책방으로 반 년째 매일 출근한다. 그러느라 고3인 둘째 딸을 제대로 못 돌보고 집안일은 대부분 남편의 차지가 돼 버렸다. “세컨드 라이프에 대해 가족에게 어떻게 이해를 구하느냐에 달렸다고 봅니다. 인생 2막은 학창 시절처럼 역사책에 파묻혀 재미있게 살고 싶다고 식구들에게 정직하고 진지하게 말했어요. 역사책이 재미있어 책방에 새 책이 들어오면 실제로 제가 가장 먼저 달려가요.”

 

반 년 간 휴일 없이 일하다 보니 여행을 버킷리스트에 올리게 됐다. 그는 평소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백 대표는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NHN을 거쳐 LG유플러스에 입사한 후 2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했다. 


“사내 첫 사업 담당 임원 시절 한 여직원에게서 당신이 나의 롤모델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지만 조직생활을 하는 동안 여자라는 사실을 의식하지는 않았습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했고, 퇴직하면 내 일을 벌이겠다는 꿈을 꿨죠.”

IT 업계에서 오래 일하는 동안 실적이 좋았지만 조직 생활에 어려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사람관계로 힘들 때도 많았다. “사람 때문에 겪는 문제는 ‘먹고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쪽으로 정리했습니다. 힘들어도 견딘 건 몰입도와 호기심이 남달랐기 때문이죠. 지루한 일을 피하고 새 일에 도전하면 스트레스가 오히려 적어요.”


땅을 파면 유물이 나온다는 동네에서 역사로 먹고 사는 건 그에게 ‘오래된 미래’였다. 역사책방엔 서구 역사의 창시자인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책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있다. 유시민이 [역사의 역사]에서 다룬 역사서들이다. 


대형 서점에서 보기 힘든 책들, 연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지역인 중앙아시아 연구서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지역을 다룬 책에, 북한을 다룬 책들도 모았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 같은 만화도 있다.


역사는 사실 백 대표의 전공 분야이다. 어려서부터 역사를 좋아해 사학과 아니면 대학 갈 생각이 없었다는 그는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석사까지 마친 후 도미해 UCLA에서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 시절 마르크시즘에 경도됐었지만 자본주의의 본산 격인 미국으로 건너가 자본주의 경제학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대학에 몸담을 수도 있었지만 다수의 학생에게 교양과목을 가르치는 일에 별로 흥미를 못 느꼈다.

 

“대학 시절 짬뽕 국물을 앞에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토론과 논쟁을 즐겼지만 가르치는 일은 그렇게 즐겁지 않았습니다. 직업으로서야 손색이 없죠.” 어쩌다 발을 들여놓은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에서 그는 온라인에 꽂혔고 LG유플러스 시절 모바일 시장의 최전선인 e비즈 사업을 담당했다. 오랜 외도에서 돌아와 차린 역사책방은 그에게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 같은 것이다.

 

역사의 너른 품에 안긴 그에게 5000종의 책이 진열된 132㎡ 남짓한 공간은 역사와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서가를 채운 책들은 스스로 골랐다. 서평을 찾아 읽어가며 선정했고 지인들의 추천도 받았다. 지적 허영을 자극하는 책들도 꽂아 놓았다. “그런 책을 찾는 고객들도 있습니다. 책이란 굳이 읽지 않고 바라만 봐도, 심지어 목침처럼 베고 자기만 해도 남는다는 분들이죠.”

 

서점도 공간을 파는 비즈니스

 

서점도 ‘진상고객’이 있다. 서가에서 책을 여러 권 골라 쌓아 놓고 폰카로 찍은 후 가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엄선’한 책들을 인터넷 서점서 할인가로 구매하려는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는 인터넷 구매 때 책값을 할인해 주는 정책이 책 시장을 키우는 효과에 대해 회의적이다. “프랑스에서는 온라인 구매한 책의 배송료를 본인이 부담한다고 합니다. 배송료를 수익자가 부담하도록 하는 거죠. 공공 도서관이 열람실에 비치할 책을 동네 독립 서점에서 사들이게 한다면 온·오프 서점의 상생에 도움이 될 거예요.”

스타벅스는 커피가 아니라 공간을 누리는 경험을 파는 곳이다. 백 대표도 책방을 차리면서 공간 비스니스를 염두에 뒀다. 역사책방에선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등이 강연하는 ‘플랫폼 12’를 들을 수 있다. 지난 여름 운영한 ‘션샤인 학당’은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세 나라 조선·일본·미국의 역사를 훑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신미양요 때 가족을 잃고 미국 군함에 올라 나라를 등진 후 미 해병대 장교가 되어 환국했다. 책방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는 정작 이 드라마를 제대로 못 봤다. 


역사책방에서는 커피는 물론 맥주를 홀짝거리며 ‘책맥’도 즐길 수 있다. 그는 “인근의 이탈리아 식당 주인이 드나들더니 단골손님 됐다”고 말했다. “인문적 가치란 다양성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록한 역사는 본래 다양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다양성과 기술이 융합할 때 산업면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역사 콘텐트도 다양하다. 역사책보다는 팩션 영화와 드라마가 강세다. 그는 “역사학자와 역사 저술가들이 분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사책방은 과연 책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지속가능해 책방의 역사에 한 줄 기록을 남길까? 


“비즈니스로 생각해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비즈니스를 잘 못하면 단명할 수도 있겠죠. 역사책은 어쩌면 이 책방의 인테리어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역사책방은 역사 소비의 거점, 역사라는 다양한 이야기 봉우리를 찾는 사람들의 베이스 캠프 같은 곳일 뿐입니다.”


386세대로서 대학 시절 마르크시즘에 탐닉했던 그는 한국인이 닫힌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단일민족은 과거 자존감이 낮았던 시절 우리의 긍지 같은 것입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낸 유일한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확장해 한반도, 동북아 나아가 유라시아로 활동 무대를 넓혀갈 때 우리의 새로운 활로가 열릴 거로 봐요.”

백 대표는 인생 2막에 할 일을 고르는 기준으로 재미와 마음의 소리를 제안했다. 워너비(Wanna Be)가 아니라 워너두(Wanna Do)를 찾으라는 것이다. 


“2막 준비는 재무 설계 같은 게 아니라 내가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스스로 알아내는 겁니다. 이때 무엇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아야 돼요. 은퇴한 남자들이 흔히 명함이 없어 스트레스를 받는데 직함은 중요하지 않아요. 남자들이 남의 시선을 의식해 나의 마음의 소리를 못 듣는 겁니다.”

 

이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