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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전 한국경제학회장이 말하는 장기불황 한국경제의 앞날은?

일본이 겪었던 장기불황을 겪을 가능성이 큰 한국경제의 앞날. 외적으론 무역전쟁·환율변동, 내적으론 경제구조 노후화 등이 위기 원인입니다.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위기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전쟁과 폭정 같은 인간이 자초한 위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전의 위기는 주로 전염병과 기후변화에 따른 기근 때문이었다. 1347년 흑해 연안 카파(Caffa)에서 발병하기 시작한 흑사병은 무역선을 타고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1347년부터 1351년 사이 유럽 인구 3분의 1이 사망한 대재앙이었다.


신대륙 발견에 따라 피사로(1471~1541)와 코르테스(1485~1547) 같은 유럽의 정복자들이 옮긴 홍역·천연두 등 구대륙의 전염병 때문에 전혀 면역력이 없던 신대륙 원주민의 90%가 궤멸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밖에도 역사적으로 전염병이 수많은 피해자를 낳고 위기를 초래한 사건은 많다.


한편 기원전 202년 한나라가 창업된 이후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중국에서는 무려 1800차례 이상의 기근이 발생했다. 거의 매년 중국의 어딘가에서는 홍수·가뭄·병충해에 따른 흉작으로 기근이 발생했던 것이다.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소빙하기 기후변화 때문에 세계적인 위기가 발생하곤 했다.


15세기 기온이 하강하면서 영국에서는 포도 경작이 불가능해지고 와인 생산 또한 중단됐다. 추운 기후 탓에 1590년대 영국과 유럽대륙에서는 흉작과 높은 곡물 가격, 식량 부족으로 인한 폭동과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1709년 겨울 프랑스에서는 혹한으로 강물이 얼어붙어 정부가 구호 식량조차 나를 수가 없게 됐다. 17세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상 가장 혹독한 가뭄 가운데 하나를 경험했으며 역시 반란과 정치적 위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선진국에서 질병과 기근 때문에 발생하는 위기는 거의 없다. 의료 기술의 발전에 따라 전염병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게 됐으며 인간의 수명은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농업 기술의 발전에 따라 식량 부족 때문에 기근이 발생하는 경우 또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기근은 식량 생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식량 유통과 가격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경제에서 위기가 끊이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에 내재하는 불안정성 때문이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1723~1790)는 1776년 발표한 저서 [국부론(國富論)]에서 “시장경제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조화롭게 작동한다”고 설파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론]에서 단 한 차례 사용됐지만 시장경제의 안정성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늘 사용되고 있다.


시장경제가 과연 안정적이기만 한 것일까?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이 분업에 따른 노동생산성 향상에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분업과 특화 없이 세계 경제가 현재와 같이 높은 소득과 풍요로움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분업과 특화는 다른 한편으로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산업혁명 이전과 달리 현대에 우리가 스스로 의식주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 활동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가 생산하는 것은 대부분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고 정작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또 다른 누군가에 의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상호의존적인 체제의 안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의존하는 누군가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고, 우리에게 의존하는 누군가의 기대를 우리가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고 봤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가 그와 같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의지하는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우리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소비하는 빵이 맛있는 것은, 제과점 주인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소득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그런 빵을 생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분권화된 시장에서 경제적 의사결정은 이타적이 아니라 이기적인 기준에 따르지만 결과는 모든 시장참가자의 만족도를 각자의 주어진 제약에서 극대화하는 이타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과연 모든 거래가 애덤 스미스가 상상한 바와 같이 조화로운 결과로만 귀결되는 것일까? 그렇지 못한 것은 스미스 이후 자본주의 경제가 진화하는 과정을 보면 자명하다.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는 위기가 근본적으로 내재돼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불안정하다.


세계 경제가 산업화, 화폐경제화되고 분업과 특화가 극단적으로 추구되기 시작한 이후 시장참가자들의 선택이 서로의 기대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된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것으로 기대되면 수요가 더욱 증가하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더욱 상승한다. 환율이 오를 것으로 기대되면 외환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에 환율은 더더욱 상승한다.


이를 투기적 공격(speculative attack)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시장참가자들의 이해(利害)와 기대가 시장의 조화로운 안정성과 배치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1.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장기 불황 원인은 고령화와 노동시간 감소


일본


장기불황 여파가 10여 년 이어진 2000년대 초반, 씀씀이가 알뜰해진 일본인들 사이에서 100엔숍이 큰 인기를 모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90년까지 일본의 경제성장은 눈부셨다. 1960년부터 1990년까지 연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6%로 1990년에는 미국의 1인당 GDP에 근접했다. 1970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의 연평균 실업률은 2.1%로 매우 낮았다. 세계시장에서 자동차·선박·전자제품과 같은 일본 상품은 우수한 품질과 다양한 기능으로 유명했으며 일본의 은행과 금융회사들은 외국의 금융자산과 부동산을 다량 매입했다.


그러나 일본은 1990년 초반부터 장기불황을 겪는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의 연평균 GDP 증가율은 1.2%, 실업률은 3.9%였다.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인 경우도 몇 번 있었다. 200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황에서 빠져 나오는 듯했으나 2007년 시작된 세계적인 금융위기 때문에 다시 불황에 빠져들었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장기불황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장기불황에 관한 가설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금융 가설이고 다른 하나는 실물 가설이다.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보다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은 금융 가설이다. 1980년대 일본에서 형성된 자산 가격의 거품이 붕괴되면서 그 후유증으로 장기불황이 초래됐다는 것이다.


주가


1985년 일본의 연평균 니케이 주가지수는 1만3170이었으나 이후 계속 상승해 4년 뒤인 1989년에는 3만9510로 세배로 상승했다. 6대 도시 연평균 토지가격지수도 1985년을 100으로 했을 때 5년 뒤인 1990년에는 300으로 정확하게 세배로 상승했다. 부동산 거품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일본 도쿄에 있는 왕궁의 토지 가치가 미국 캘리포니아 전체의 토지 가치보다 크다는 황당한 추정이 등장하기도 했다.


정부 정책 소극적이었다는 비판도


그러나 1990년 이후 주가지수와 토지가격지수는 계속 하락해 1995년에는 거의 절반이 됐다. 1995년 이후에도 자산 가격의 하락은 지속됐다. 이와 같이 자산가치가 갑자기 하락하면 가계는 부(wealth)가 감소했기 때문에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한편 일본의 대출은 대부분 담보대출이기 때문에 담보로 제공되는 부동산의 가치가 하락하면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금융기관들은 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신용 경색이 발생하고 투자 감소와 불황이 초래됐다는 것이 금융 가설의 핵심이다.


실물 가설은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의 하야시 후미오(林文夫) 교수와 200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에드워드 프레스코트 교수의 주장이다. 이들은 1990년대 일본 금융기관의 부실화가 있었지만 기업이 투자금을 차입하는 데 애로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즉 거품의 붕괴에 따른 신용 경색과 그에 따른 투자 부진이 일본식 장기불황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일본의 자본생산성이 1990년대에 현저히 낮았기 때문에 투자가 부진해 장기불황에 빠지게 됐다는 것이다.


실물 가설에서 주목하는 것은 1990년대 빠르게 감소한 노동량이다. 1990년 이후 일본에서는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됐다. 그리고 1988년부터 1993년까지는 토요 휴무를 점진적으로 도입·완료했고 공휴일 또한 증가했다. 전체적인 노동량이 감소한 것이다. 노동시간이 감소하면 노동과 함께 생산 활동에 투입되는 자본의 생산성이 하락하게 되는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실제로 1990년대 일본의 자본생산성은 그 이전보다 현저하게 낮다.


자본생산성이 낮으면 투자와 자본 축적이 더뎌지게 된다. 자본(기계설비) 축적이 더디면 자본을 사용해 생산 활동을 하는 노동생산성이 하락한다. 노동생산성의 하락은 고용량을 감소시키고 이는 자본생산성을 다시 감소시킨다. 따라서 다시 투자와 자본 축적이 위축된다. 악순환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 장기불황의 원인이 금융부문보다는 고령화와 노동시간의 감소에 따른 자본과 노동의 생산성 하락 때문이라는 것이 실물 가설의 핵심이다.


일본 정부의 정책 대응 또한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과감한 재정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필요했으나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를 염려해 소극적인 재정정책을 실시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염려한 것은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재정 부담이었다. 그러나 소극적인 재정정책에 매달린 나머지 불황은 지속되고 재정적자와 국가부채만 쌓이게 됐다.


그렇다고 일본의 금융정책이 적극적인 것도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이자율은 0%에 근접했기 때문에 팽창적인 금융 정책으로 이자율을 더 하락시킬 여지가 작다고 본 것이다.


2. 2007년 전 세계 엄습했던 글로벌 위기: 금융사들의 차입자 상환 능력 평가 소홀이 발단


금융사


2008년 9월 14일 미국 뉴욕 월가의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자 직원들이 개인 소지품을 넣은 박스를 들고 본사를 빠져나가고 있다.


2007년 단일 국가로는 가장 큰 시장인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었고 여파는 2009년까지 지속됐다. 2007~2009년 세계 금융위기를 야기한 원인으로는 미국 금융시장에서 일어난 다음의 세 가지 변화를 꼽을 수 있다.


먼저 부동산담보대출 시장에서 일어난 금융 혁신을 들 수 있다. 컴퓨터의 발달로 주택담보대출 시장에서 수요자의 신용위험을 평가하는 보다 향상된 기법이 개발됐다. 나아가 주택담보대출과 같은 소규모의 대출을 함께 모아 표준화된 증권으로 만들어 거래하는 증권화의 기법 또한 발달하게 됐다. 이를 통해 은행들은 신용등급이 낮은 소비자에게도 주택담보대출을 제공할 수 있게 됐는데 이를 ‘서브프라임 모기지’라고 한다.


다음으로 첫 단계에서 소비자에게 대출을 시행하는 금융기관들이 차입자가 대출을 상환할 능력이 있는지, 곧 신용위험을 평가하는 데 소홀했다. 금융기관들은 일단 부동산담보 대출이 성사되고 나면 이를 모아 부동산담보대출부 증권의 형태로 증권화해 투자자들에게 다시 매각했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일단 부동산담보대출부 증권을 매각하고 나면 차입자가 대출을 상환하지 않아도 처음 대출해준 금융기관은 책임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금융기관들에는 투자자의 위험과 이익을 챙겨야 할 유인이 없었다. 신용등급을 가리지 않고 보다 많은 부동산담보대출을 하면 할수록 중개료 수입이 컸기 때문에 전형적인 도덕적 해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무디스, 피치와 같은 신용평가사들은 지급 불능을 판단해 국가뿐만 아니라 금융기관과 금융상품의 신용등급을 정한다. 그런데 당시 신용평가사들은 한편으로는 매우 복잡한 금융상품들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를 금융기관에 자문하고 많은 수수료를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문한 금융상품의 신용등급을 정했다.


이는 신용평가사들이 금융상품의 등급을 정확하게 정할 수 없도록 하는 이해상충과 도덕적 해이의 문제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용등급이 지나치게 높게 정해지고 투자자들은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가운데 매우 위험한 금융상품을 매입하게 됐다.


서브프라임 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주택 수요가 증가하고 미국의 주택소유비율이 사상 최대에 다다랐으며 주택시장에 거품이 형성됐다. 그리고 서브프라임 시장에서의 위험 관리가 허술해지면서 주택가격 대비 주택담보대출의 크기 곧 대출/가격비율(Loan to Value, LTV)이 점점 증가해 거의 100%에 이르렀다. 결국 주택가격은 2006년을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주택가격 거품이 붕괴하자 주택담보대출의 연체가 폭증하고 수백만 건의 주택이 차압됐다.


이에 따라 부동산담보대출부 증권 가격 또한 폭락한 것은 물론이다. 주식가격도 50% 이상 폭락했다. 금융기관의 순자산이 감소하면서 대출 회수와 자산 매각, 가계와 기업에 대한 신용공여제한이 잇따르고 금융시장에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가 크게 증가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금융시장인 미국 금융시장의 위기는 유럽 및 세계로 확산됐으며, 확산의 정도는 당시 금융시장의 세계화가 얼마나 많이 진행됐는지를 보여줬다. 유럽의 경우 2007년 10월 프랑스의 투자은행인 비앤드피 파리바스가 큰 소실이 발생한 단기 금융상품의 상환을 정지했다.


이에 따라 유럽 투자은행에 대한 예금인출 사태가 발생했다. 유럽중앙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유동성 공급에도 불구하고 예금인출 사태를 멈출 수 없었고 은행들은 현금을 쌓아두기에 급급했다. 예금보다 환매조건부채권 시장에서 단기차입에 의존하던 영국의 최대 은행 노던 록이 2007년 9월 파산했다. 이어 수많은 금융기관이 파산하였으며 유럽의 위기와 불황은 미국보다 훨씬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가 부른 세계 금융시장의 ‘대참사’


미국 주요 금융회사들의 순자산 또한 급속히 감소하고 파산과 매각이 잇따랐다. 2008년 3월에 서브프라임 관련 증권에 많은 투자를 한 미국 5위의 투자은행인 베어 스턴스가 1년 전 가격의 5%에 JP 모건에 매각됐다.


2008년 7월에는 부동산담보대출 시장에서 5조 달러 이상의 보험계약을 가지고 있던 패니메, 프레디 맥이 서브프라임 증권으로부터의 큰 손실 때문에 연방정부와 연방준비제도의 지원을 받았고, 8월부터는 국영화되기에 이르렀다.


2008년 9월 15일에는 서브프라임 시장에서의 막대한 손실로 자산규모 6000억 달러, 2만5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업계 4위의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했다. 당시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파산이었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세계 금융시장을 혼돈과 불확실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경제위기는 2008년 9월에 미국 하원이 월가에 대한 구제금융법안을 부결시킴으로써 정점을 이뤘다. 1주일 뒤 긴급 경제안정법이 통과됐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주가폭락이 일어났고, 미국 재무성 채권 수익률과 Baa 등급 회사채 수익률의 차이인 신용 스프레드가 5.5%포인트까지 상승했다.


그리고 금융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이자율은 급상승하고 소비와 투자가 급격히 감소했다. 실업률은 10% 가까이로 증가하고 경제성장률과 인플레이션은 각각 -5%, -1.3%까지 하락했다. 이 같은 불황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위기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대공황과 같은 파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적절한 정책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2007~2009년의 정책은 팽창적인 금융정책, 적극적인 유동성 공급, 금융정책의 국제공조, 팽창적인 재정정책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는 위기가 일어나자마자 2007년 8월 우리의 콜금리에 해당하는 연방기금금리를 빠르게 인하했으며, 2008년 12월 이후에는 목표금리를 장기간 0.00~0.25%로 유지했다. 나아가 신용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연방기금금리를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상황에서도 통화량을 계속 증가시키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를 시행했다.


나아가 연방준비제도는 1조 달러 이상의 회사채를 매입함으로써 신용 스프레드를 낮추고 가계와 기업의 금융비용을 낮춰줬다. 중앙은행이 회사채를 매입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당시의 경제위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미국 정부는 법을 통해 재무성이 7000억 달러 한도 내에서 문제가 있는 금융기관으로부터 서브프라임 부동산담보 대출 관련 자산을 매입하고 은행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예금인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잠정적으로 예금보험한도를 10만 달러에서 25만 달러로 늘렸다.


유럽에서도 2008년 가을부터 확산되는 금융기관의 파산을 막기 위해 구제금융을 실시했다. 구제금융은 10조 달러를 상회했고 20여 개 나라가 참여했다. 이와 같은 국제공조는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재정정책으로는 2008년 부시 정부에 의한 780억 달러 규모의 일시적인 세금 환불과 오바마 정부의 2880억 달러 규모의 조세 삭감, 4990억 달러 규모의 정부지출이 있었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의 정책은 2010년에야 집행됐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결국 2007~2009년의 세계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에는 금융정책이 주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안일’이 초래한 97년 외환위기 악몽: 재벌의 지나친 차입과 팽창이 부른 화(禍)



외환위기 여파로 달러·금 모으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1998년 1월, 시민들이 집에 뒀던 금붙이 등을 현금으로 바꾸고 있다.

1997년 금융위기 전후 우리의 경제 상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나라는 1994년과 1995년 8% 이상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룬 다음 1996년 들어서는 경기가 둔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실질 GDP는 5.8%의 성장률을 보였고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은 각각 5%, 3% 이하로, 재정은 흑자를 유지하는 등 경제의 기초여건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1990년대에 들어 우리 정부는 금융기관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등 금융 자유화 조치를 취했고, 금융 세계화를 위해 금융시장을 개방함으로써 해외로부터 막대한 자금의 차입과 유입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재벌의 지나친 차입과 팽창이었다. 당시 재벌들은 대마불사(大馬不死, too big to fail)라는 인식 아래 지나친 팽창을 목표로 했고, 30%가 넘는 저축률에도 불구하고 해외차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3년과 1996년 사이 우리나라 30대 재벌의 자산수익률은 3%로 미국 대기업의 20%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금융위기 전해인 1996년에는 0.2%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을 소유할 수 없었던 재벌들은 규제가 거의 없었던 종합금융회사를 소유하고, 이를 통해 이자율이 싼 단기자금을 외국으로부터 다량 차입했다.

심지어 이자율이 싼 단기자금을 일본과 미국에서 차입해 이자율이 비싼 장기자금으로 다시 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 대여하는 비정상적인 해외영업까지 하게 됐다. 이와 같은 외채구조는 단기외채의 만기가 도래했을 때 장기 투자로부터 원금을 회수해 상환해야 하는,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1994년 말부터 1997년 말까지 단기외채의 평균비중은 46%였으며 1997년 전반기에는 단기외채의 비중이 50%를 초과했다.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정부의 정책이었다. 먼저 정부는 단기외채에 대해서는 거의 무제한의 차입을 허용하면서 자본유입을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장기외채에 대해서는 제한을 가했다. 다음으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90년대 들어 금융 자유화를 통해 자본의 국가 간 이동이 자유롭게 됐다.

따라서 환율의 변동을 허용해야만 외환시장이 균형을 회복해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대미(對美)환율을 900원 이하로 유지함으로써 외환시장의 불균형이 초래되고 원화는 국제투기자금의 투기적 공격의 대상이 됐다.

외국 자금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원화가 고평가돼 있는 가운데 우리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몇 가지의 충격이 주어졌다.

첫째, 1994년과 1995년 완만한 적자를 지속하던 경상수지가 1996년에는 GDP의 5% 수준에 육박하는 230억 달러의 적자를 나타냈다.

둘째, 1997년 들어서는 불황으로 재계순위 14위였던 한보그룹과 기아자동차가 파산하고 30대 재벌 가운데 파산하는 그룹이 뒤따랐다. 기업 부도가 확산되면서 금융기관의 부실도 누적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여러 대기업의 부도로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비중이 크게 증가함으로써 우리의 대외신인도가 크게 하락했다.

셋째, 주식가격은 정점보다 50% 이상 하락했다. 넷째, 1997년 7월 2일 태국 바트화의 폭락으로 동남아 국가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부동산 투기에 따른 거품의 붕괴 때문에 발생한 금융기관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도 환율을 고정시킨 태국의 바트화에 대해 외국 투기 자본의 투기적 공격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태국과 밀접한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 등의 환율도 대폭적으로 절하되는 등 외환위기가 확산됐다. 그 이후 투기적 공격은 대만과 홍콩으로까지 확산됐다.

부정적인 충격에 따른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주식가격은 폭락하는 가운데 동남아에서 외환위기가 확산됨에 따라 한편으로는 금융시장에서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의 문제가 증가하고 자금의 순환이 급속히 위축됐다.

다른 한편으로 과도한 단기 차입 때문에 단기부채의 대출기간 연장(rollover)은 거부됐다. 해외로부터의 자금 유입 또한 중지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국내 은행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한국은행이 환율을 900원 이하로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국제 투기자본이 모를 리 없었다. 원화에 대한 투기적 공격이 일어난 것이다.

투기적 공격에 따라 외환보유고가 고갈되면서 1997년 12월 외환(통화)위기가 본격적으로 금융위기로 확대됐다. 투기적 공격에 따라 1997년 말에 환율은 거의 두 배로 상승했다. 따라서 은행을 포함한 금융기관 대외부채의 가치가 원화로 두 배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대출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금융기관들의 순자산이 급속히 감소했다. 대출·소비·투자가 동시에 크게 감소했다.

1998년 우리나라의 GDP는 5.7% 감소했고 실업률은 7.5%로 상승했다. 환율의 급격한 상승에 따라 수입 원유와 원자재의 가격 또한 빠르게 상승했다. 따라서 인플레이션 또한 5%에서 10% 가까이로 상승했으며 기대 인플레이션 또한 상승했다. 기대 인플레이션과 환율의 상승은 이자율을 20% 이상으로 상승시켰다. 이와 같은 모든 현상은 실물 부문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1997년 말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IMF의 구제금융 공급 직후 IMF의 경제개혁프로그램에 따라 위기의 수습 및 극복 대책이 추진됐다. 1998년 이후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자금이 유입되고 외채의 만기가 연장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국제수지가 큰 폭의 흑자를 나타냄으로써 외환시장이 안정을 되찾았고,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위기가 수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는 우리 경제에 큰 상처를 남겼다. 현재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많은 것은 외환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새로운 위기가 기다리고 있는 걸까


IMF 위기로 지칭되는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20년이 지났다. 당시에 태어난 세대가 벌써 성인이 됐으니 일월(日月)은 무심하기만 하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경제의 위기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20년 주기설까지 운위(云謂)되고 있다.

위기가 무슨 주기를 가지고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신빙성이 전혀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청와대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위기설은 근거가 없으며 문재인 정부 정책의 발목을 잡기 위한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거론하게 됐으니 말이다. 음모적 차원에서 위기 가능성을 거론할 수는 있으나, 빌미가 전혀 없는 가운데 그런 음모적 위기설을 제기하는 인사가 존재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최근 한국 경제의 상황을 보면 위기를 향해 가고 있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2018년 한 해 세계 경제는 호황이라는데 우리 경제는 침체를 향해 빠르게 추락했다. 갖가지 고용지표가 악화하고 모든 국내 연구기관과 IMF를 포함한 국제기구가 2019년 우리의 경제성장 전망치를 한 해 전보다 내려 잡았다.

새해의 경제 전망이 밝지만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은 소비 심리는 추락하고, 투자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도체와 몇몇 업종에 집중된 수출도 전도(前途)가 어둡기 때문이다.

앞서 자세히 설명한 세 가지 경제위기를 상고(相考)해 위기의 원인을 찾는다면 해외로부터는 보호무역과 무역전쟁, 환율변동, 원자재 가격 폭등 등이 있다. 대내적으로는 이자율의 상승과 가계부채, 고령화와 노동시간 단축, 정부의 섣부른 경제정책, 경제구조의 노후화와 경직화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서 대외 여건은 항상 중요하다.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 따른 보호무역주의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크게 확대하고 있다. 환율과 원자재 가격도 그에 따라 크게 요동치고 있다. 유가만 하더라도 배럴당 100달러까지 갈 것이라는 전망이 엊그제 같은데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그러나 미·중 사이의 무역전쟁이 세계 경제를 위기로 밀어 넣을 정도로 격화되리라고 예상되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는 위기를 잘 알면서 스스로 초래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막연한 낙관론은 위험천만한 발상

대내적인 요인에 따른 위기는 가능성이 크지는 않지만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본다. 그 가운데 가계부채의 문제는 심각하긴 하지만 다른 전문가들과 같은 정도로 심각하게 우려하지는 않는다. 이자율 상승과 함께 가계부채의 부담이 증가할 것은 분명하지만 정부나 일부 학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가계가 무분별하게 비합리적으로 부채를 관리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신중한 정부 정책을 당부하고 싶다. 특히 부동산 정책은 지금과 같이 무조건적으로 가격만을 목표로 하는 정책을 지양해야 한다. 가계부채의 대부분이 부동산에 투입돼 있는데, 부동산 가격이 폭락한다면 가계부채와 맞물려 의외로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대내 요인 가운데 가장 우려되는 것은 고령화와 노동시간 단축이다. 일본의 장기불황이 이 요인들 때문이라는 하야시·프레스코트의 가설은 설득력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위기가 온다면 일본과 같은 장기불황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앞으로 상황이 더욱 어두운 것은 자기들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정책행위 때문이다. 소득주도성장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무리한 정규직화, 법인세 인상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는 이미 포기한 원전 축소·포기와 같은 에너지 정책 등은 무지하다고 해야 할지,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이론적 근거가 없는 정책을 비용과 편익을 따져보지도 않고 무작위로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의도한 효과는 작거나 없고 오히려 부작용만 큰 정책을 실험적으로 실시하는 나쁜 버릇이 문 대통령과 이 정부의 정책 담당자들에게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6개월 뒤에는 나아진다는 낙관론을 주기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 뻔한 결과를 호도하는 것은 정책의 불신을 낳고 정책 실패와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이 나라의 경제적 미래가 장기적으로 더욱 어둡게 보이는 것은 경제구조의 노후화와 경직화 때문이다. 반도체와 전자를 제외한 철강·조선·해운·화학 등 우리의 주력산업이 노후화된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노후화된 산업의 구조조정을 통해 새롭게 활력이 넘치도록, 새로 태어나게 하는 시스템이 이 나라에는 없다. 그와 같은 절망적인 현실의 저변에는 정부의 지나친 규제와 노동조합이라는 이익집단이 있다. 구조조정은 필요가 발생했을 때 시장을 통해 즉시적으로 실행하는 것이 비용을 절약하는 첩경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자본 형성이 규제 때문에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조정에는 늘 천문학적인 국민 세금이 투입된다. 거기에 더해 집단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노동조합은 우리 경제의 ‘혈전’이다.

노동운동은 철저하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 노동자의 10%도 안 되는 그들이 경제의 뇌경색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이 나라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것이다.



조장옥 전 한국경제학회장·서강대 명예교수 choj@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