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벤처'가 무슨 말일까? 바로 사무실 없이 창업을 하는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비싼 약값에 비난 여론이 거세지면서 바이오테크 분야에서 인프라와 인력 투자를 최소화한 창업 방식기 각광 받고 있다. 인프라를 구축한 뒤에야 창업을 시작했던 기존 형태와는 괘를 달리하는 새로운 창업 방식에 다른 분야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잉그리드 스완슨 풀츠의 바이오테크 기업에는 표준 설비가 거의 없다. 실험실이나 사무실 또는 직원도 없다. 풀츠는 워싱턴대학(시애틀)에서 미생물학자로 일하는 동안 PVP 바이오로직스를 출범시켰다. 보조금과 기부금 50만 달러를 밑천 삼아 계약직 사원을 채용하거나 회사의 자문위원회에 동참을 요청한다.


풀츠의 회사는 셀리악병(celiac disease, 소장에서 일어나는 알레르기 질환)의 잠재적인 치료제를 조사 중이다. 파격적인 사업방식으로 보이지만 맨땅에서 시작하는 초기 창업의 비용 부담을 더는 한 방편이다. 이 같은 ‘가상 벤처’ 모델을 채택하는 창업자가 늘어나고 있다.


업계의 표준 관행을 탈피한 이 같은 변화는 벤처 사업가와 투자자들에게 특히 매력적이다. 바이오테크 업계에 여론의 따가운 눈총이 집중되고 미국 대선 후보 주자들은 약값을 깎아 내리겠다고 위협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개발원가 절감분을 약값에 넣을 의무도 없고 신약개발 비용이 반드시 약값에 반영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가상 바이오테크 업체들은 그럴 의사만 있다면 판매가를 낮춰 신약을 출시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노싱크 바이오메디컬 혁신연구소의 바이오테크 애널리스트인 버나드 무노스는 “현 시스템에서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신약 가격인하를 향한 한걸음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모델의 주된 이점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잉그리드 스완슨 풀츠는 쿠마맥스라는 효소 모델을 보유한다. 셀리악병 환자의 글루텐 분해를 도울 수 있는 효소다(왼쪽). PVP 바이오로직스 관계자들은 워싱턴대학 생명과학빌딩의 회의실에서 가끔씩 모여 진행 상황을 논의한다.


▒ 바이오테크 업체가 '가상 벤처' 시스템이 유망한 이유


방식은 이렇다. 대다수 가상 바이오테크 업체는 다른 회사에서 구입하거나 대학에서 개발된 잠재적 치료제의 소유권을 갖고 있다. 바이오테크 업체가 일단 신약 후보를 입수하면 한두 사람이 가상 컨설턴트 팀을 구성해 다른 기업에 연구 용역을 맡길 수 있다. 외주 업체는 초기 테스트를 실시하고 임상실험 준비 완료 단계까지 신약을 개발한다.


리처드 스테드 박사는 지난 13년간 시애틀 인근에 있는 자신의 회사 바이오파마 컨설팅 서비스를 통해 40~50개 가상 바이오테크 기업의 출범을 도왔다. 그는 1988년 의사로서는 최초로 암젠에 입사했고 훗날 임뮤넥스에서 근무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상기업 모델을 선호한다고 공언한다. “가상 팀이 모든 기업과 직능에 적합하지는 않다. 하지만 자본 효율성이 더 높을 수 있고 평균적으로 더 수준 높은 인력과 경험을 확보할 수 있다. 매우 유망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스테드 박사는 현재 풀츠 CEO가 이끄는 PVP 바이오로직스의 자문을 맡고 있다. 풀츠 CEO가 지금껏 고용한 인력은 동물실험 기획을 돕는 동물학자 1명, 제조 전문 컨설턴트 1명, 그리고 임상 실험을 설계하는 스테드 박사가 전부다. 그녀는 매주 자택에서 그들에게 전화를 한다. 직접 만날 때는 라이프 사이언스 빌딩의 평범한 회의실로 모인다.


바이오테크 초창기에는 신약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기 오래 전부터 기업들이 수백만 달러를 들여 연구실과 사무실이 딸린 호화로운 본사 건물을 세웠다. 바이오테크 업체 경영자들은 첫날부터 기업이 완전 통합돼 개발할 신약의 연구·개발·상업화·마케팅의 모든 측면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 기업 중 다수는 FDA의 승인을 받은 치료제도 내놓지 못했다. 신약 출시에 성공한 기업들은 종종 기존 제약회사에 인수되고 본사 건물은 여지 없이 처분됐다. 얼마 가지 않아 이 모델이 비효율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워싱턴 바이오테크·바이오메디컬협회’의 크리스 리베라 회장은 “요즘엔 그런 식으로 창업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첫날부터 맨땅에서 인프라를 구축하는 방식은 구시대 유물일 성싶다.”


▒ 가상 모델이 뿌리내리기 적합한 시애틀


지난 10년 사이 실험공간과 상근 직원의 사치를 걷어내고 연구 초기 단계에선 가상으로 사업을 진행하는 바이오테크 업체가 늘어났다. 요즘엔 대다수 투자자도 그런 방식을 선호한다. 패트릭 헤런은 시애틀의 투자그룹 ‘프레지어 헬스케어 파트너스’에서 생명과학 분야를 관할한다. 자신이 자금을 지원하는 업체 중 30~50%가 가상 기업으로 출발한다고 한다. 그의 추산으로는 15년 전에는 가상 기업이 10%에 불과했다.


지난 9월 튜링 파마슈티컬이 처방약값을 갑자기 인상하자 여론의 비난이 쏟아졌다. 미국 민주당 대선 주자 여러 명이 급등하는 약값과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자 바이오테크 업종 주가가 일시적으로 하락했다. 그와 같은 압력이 계속될 경우 적은 예산으로 출범하는 가상 바이오테크 기업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헤런 팀장은 말한다. “시장에서 현 추세가 계속될 경우 가상기업과 외부 자원 이용이 증가할 듯하다.” 무노스 애널리스트도 같은 생각이다. “반발이 심해 가격을 인하할 경우 가상모델로 운영되는 기업이 다른 업체들보다 그 충격을 훨씬 더 잘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가상 모델을 택한 기업의 성공 스토리가 많이 들려온다. 자프겐의 예를 들어보자. 창업자들은 가상 모델을 이용해 자본 약 6800만 달러로 비만 치료제를 임상실험 중간단계까지 진행시켰다. 무노스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대형 제약회사 지출액의 대략 5분의 1 규모다. 지프겐은 지난해 6월 기업공개(IPO)를 통해 9600만 달러의 자본을 조달했다. 올렉시온 파마슈티컬스는 올해 희귀병 치료제를 생산하는 시나제바 바이오파마라는 가상 업체를 84억 달러에 인수했다.


미국 시애틀은 이 같은 모델이 뿌리 내리기에 좋은 입지를 갖고 있다. 워싱턴주는 올해 120개 생명과학 업체가 출범한 벤처 창업 중심지다. 2009년 이후 신설 벤처 수가 총 400개를 돌파했다. “광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고 리베라 회장은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시애틀은 실험실 부족과 인력난이 심각하다. 이 같은 요인들이 맞물려 가상 모델이 해법이라는 믿음을 많은 창업자와 CEO에게 심어준다. 리베라 회장은 “가상 모델로 전환하는 기업이 늘어난다”며 “오프라인 제약사를 설립하거나 실험실 임대료가 비싸 요즘엔 대다수 신생 벤처가 그런 형태와 방식으로 출발한다”고 설명했다.


풀츠 CEO는 신약 승인 전부터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에 거금을 투자하는 데 더 소극적인 투자자들에게 자신의 모델이 안성맞춤이라고 말한다. “많은 바이오테크 그룹이 전보다 더 위험을 기피하는 추세에 부응하는 한 방편이다.”


▎풀츠 CEO의 쿠마맥스 실험을 돕는 한 연구원이 워싱턴대학 실험실에서 박테리아를 배양할 페트리 접시를 준비한다(왼쪽). 쿠마맥스는 셀리악병 환자의 내장에 염증을 유발하는 글루텐 조각들(오른쪽 사진의 녹색)을 분해하도록 설계된 효소다.


풀츠 CEO는 쿠마맥스라는 효소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다. 장소는 다른 창업 초기 연구원, 대학원생들과 함께 사용하는 혼잡한 대학 사무 겸 실험 공간이다. 쿠마맥스는 글루텐 조각들을 분해하는 기능을 한다. 건강한 사람은 글루텐을 자연스럽게 소화하지만 셀리악병이 있는 사람의 내장에선 염증을 일으킨다고 알려졌다. 그녀는 쿠마맥스가 이미 임상실험에 있는 효소들보다 글로텐 조각들을 “수십 수백 배 더 잘” 분해한다고 말한다.


풀츠 CEO의 PVP 바이오로직스는 아직 벤처자본을 조달하지 못했지만 1년 이내에 대학에서 독립할 때쯤 쿠마맥스는 실험에 돌입할 수 있다.


▒ 가상벤처로 수십억 달러를 절약


전통 기업이라면 그렇게 진전된 단계까지 효소를 조작하려면 수백만 달러의 벤처 자본을 조달해야 했을지 모른다. 풀츠의 회사는 워싱턴주의 생명과학 디스커버리펀드(Life Sciences Discovery Fund)로부터 25만 달러의 보조금과 민간으로부터 그에 상승하는 기부금을 받는다. 지금껏 그 돈은 컨설턴트들에게 지불했다. 그녀는 워싱턴대학 단백질디자인연구소에서 급여를 받는다. 가상 벤처창업 방법을 이용하면 전통적인 창업방식에 비해 비용을 20~30% 절감할 수 있다고 헤런 팀장은 추산한다.


풀츠 CEO는 2017년 쿠마맥스의 임상실험에 착수하기를 희망한다. 나머지 임상 전 연구를 완수하고 효소 실험의 첫 두 단계를 이행하려면 2000만~3000만 달러의 벤처자본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추산한다. 컨설턴트들에 따르면 3단계와 마지막 단계 비용이 2억2500만 달러까지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분명 큰돈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기업들이 아직 실험실에서 만들어지지도 않은 분자의 구상만으로 수백만 달러를 조달하는 모습을 보며 “자금을 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고 말한다.


가상 기업에 투자할 때는 투자자 입장에선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헤런 팀장은 말한다. 투자자들은 수많은 전속 과학자로 북적대는 기업 본사 건물에 쉽게 현혹될 수 있다. “처음에는 조직을 움직이는 잡담과 업무와 관련된 대화를 못하는 게 걱정된다. 그러나 가상 형식으로 운영되는 이들 팀의 생산성을 보면 바람직하다는 일종의 확신이 들게 된다.”


바이오테크 분야 외에도 가상 벤처 방식의 창업이 가능한 분야들은 요새 사무실도 없이 창업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무실을 공유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신사업이 등장할 정도다. 앞으로 바이오테크 분야의 '가상 벤처'의 성장이 어느정도 더 지속될 지는 지켜봐야 겠지만, 이 형태의 창업 방식은 앞으로 더 폭발적으로 유행할 것이라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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