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안방을 훈훈하게 했던 두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체험, 삶의 현장'과 'TV는 사랑을 싣고'이다. 비록 지금은 이런 교양과 예능을 섞은 예능이 많지만 이때 당시만 해도 획기적인 시도였다. 이런 시도를 했던 김상근 전 KBS PD가 유머 에세이를 냈다. 책을 보니 그의 유머는 아직 죽지 않은 것 같다.
▧1세대 스타PD 김상근 전 KBS PD
1990년대 중반에 최근 [1박2일] [꽃보다 청춘] [삼시세끼]등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나영석 PD 못지 않은 스타 PD가 있었다. [체험, 삶의 현장] [TV는 사랑을 싣고]를 제작한 김상근 전 KBS PD다. 예능과 교양을 결합한 ‘인포테인먼트’의 효시로 불리는 두 프로그램은 당시 시청률이 40%에 육박할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10%만 나와도 선방’이라는 요즘엔 상상하기 힘든 시청률이다.
“당시엔 방송 용어로 ‘쇼양(쇼+교양)’이라고 했었죠. 저는 ‘쇼양부장’으로 불렸고요. 그때부터 재미와 메시지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워낙 인기가 높았던 때라 시청률이 30% 밑으로 내려가면 큰일 나는 줄 알던 시절이었죠. 요즘은 시청률이 잘 나오면 PD가 인센티브를 받기도 하던데 그 때 뭐라도 좀 챙겨 뒀어야 했나 아쉽네요(웃음).”
PD 생활을 끝내고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김 전 PD가 최근 [나도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고 싶다]를 출간했다. 그의 오랜 관심사인 ‘유머’에 관한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에서 유머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했다면 이번 책은 ‘실전편’이다.
“사실 유머란 게 웃고 즐기는 것만은 아니거든요. 삶을 살찌우고,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윤활유 같은 겁니다. 미국에선 유머의 기능과 유형, 역사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가 잘 이뤄지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죠. 유머에 관한 이론에 여러 사례를 엮는 식으로 꾸며봤어요.”
[나도 유머러스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표현대로 유머 에세이다. 일상에서 발굴한 소소한 농과 유머에 관한 과학적 분석을 적절히 버무렸다. 오랜 PD 생활 속에서 건져낸 방송가 뒷얘기도 풍성하다. 이계진 전 아나운서, 가수 조영남, 이시형 박사 등과의 인연, 출연자들과의 긴장관계 등을 재미나게 풀었다. 아나운서들의 생방송 실수담과 역대 대통령의 유머 능력을 분석한 부분도 눈길이 간다.
김창렬 아나운서와 한명숙 아나운서가 더블로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땐 여자 아나운서가 “지금까지 진행에 한명숙”이라고 하면 남자 아나운서가 받아 “김창렬이었습니다”라고 하는 걸로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 아나운서가 무심코 “지금까지 진행에 한명숙이었습니다”라고 문장을 맺어버렸다. 당황한 남자 아나운서. 찰나의 긴(?) 순간을 보낸 남자 아나운서는 용단을 내렸다. “김창렬이도 했습니다”
이제는 자신보다 더 유명해진 아들(개그맨 김준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개그계에서 김준현은 ‘연기 잘하는 개그맨’으로 꼽힌다. 아무리 재미 없는 내용도 잘 살려내는 능청스러움과 눈길을 사로잡는 무대 장악력이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확실히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재능인 듯 보였다.
▨‘내가 더 유명했는데…’ 김준현의 아버지로 사는 요즘
“모임에 나가면 누군가 소개를 해줄 때가 있죠. [체험, 삶의 현장] [TV는 사람을 싣고] 등을 제작한 스타 PD…. 별 반응이 없다가, 개그맨 김준현의 아버지라고 하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죠. 어느새 ‘김 PD의 아들 김준현’이 아니라 ‘김준현의 아버지 김상근씨’가 돼 버렸죠. 얼마 전엔 ‘김준현을 많이 닮았다’는 농담까지 들었어요. 책을 내면서 준현이가 축하글을 썼는데 거기서 약속을 했어요. ‘아버지 좋아하시는 ‘삼겹살&소주’ 자리를 많이 만들고, 어린 시절 데리고 다녔던 낚시터에도 모시고 가겠다’고요. 그런데 안 지켜요. 김준현은 약속을 지켜라!”
그는 요즘 PD의 생활상을 다룬 드라마 [프로듀사]를 재미있게 시청하고 있다고 했다.
“음악방송 PD(공효진)가 출연 가수(아이유)에게 겉옷을 입으라고 하자, 입는 척 한 뒤 방송을 시작하면 다시 벗는 장면이 나오던데 옛 생각이 나더군요. HOT가 [체험, 삶의 현장]에 나왔을 때였죠. 심의 규정이 워낙 엄격했던 시절이라 귀걸이를 빼라고 했더니 몰래 다시 끼더라고요. 결국 모자이크를 했죠. 방송권력과 문화권력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같은 건데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죠. 이런 얘기들을 재미나게 엮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김 전 PD의 첫 학문 주제가 유머였다면 다음은 ‘말하기’다.
“오랜 사회생활을 통해 느낀 점 중 하나는 사람들이 말을 잘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나 말도 결국 기술이니 연습이 필요하죠. 스피치뿐만 아니라 조직 내 소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능력까지 폭넓게 다뤄보고 싶어요.”
이래 저래 살기 힘든 세상이다. 한껏 움츠린 경제는 회복을 잊은 듯 바닥을 기고, 살림살이는 여전히 팍팍하다. 이 와중에 난데 없이 메르스까지 끼어들었다. 김 전 PD는 이럴 때일수록 웃음과 여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유머는 ‘심각하지 않게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난관을 극복할 대단한 힘이 담겨 있는 건 아니지만 문제 해결의 주체인 사람이 대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죠. 재미 회로를 가동해야 삶의 활력을 얻고, 그 활력이 있어야 위기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