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타이거즈를 넘어 대한민국 야구의 자랑인 양현종, 그는 숱한 위기를 넘기고 2015년 전반기 가장 낮은 방어율을 보이며 에이스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작년에 이루지 못했던 MLB진출을 넘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좌완 에이스 양현종, 그의 투구의 비밀을 알아보자.
▤'왼손 에이스' 양현종의 등장
2006년은 류현진(28·LA 다저스)의 해였다. 인천 동산고를 졸업하고 한화에 입단한 류현진은 단숨에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30경기에 선발등판해 18승 6패, 방어율 2.23과 204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선동열만이 가능할 것 같았던 ‘트리플 크라운(3관왕)’을 고졸 신인이 데뷔 첫해에 달성했다.
이듬해에는 또 한 명의 대형 왼손 신인투수가 나타났다. 안산공고를 졸업한 김광현(27·SK)은 정규시즌에서는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지만(3승7패) 한국시리즈 3차전에 선발등판해 2패로 몰려 있던 팀을 구해내는 완벽한 피칭을 했다. 김광현은 이듬해 16승 4패를 거두며 리그 최고 투수 반열에 올랐다.
2009년 한국프로야구는 또 한 명의 왼손 에이스를 얻게 됐다. 김광현의 동기였지만 시동이 늦게 걸렸다. 12승 5패의 성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KIA가 통산 10번째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양현종(27·KIA)이다.
양현종의 이름을 더욱 크게 알린 것은 그해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였다. 일본 재팬시리즈 우승팀인 요미우리와 치른 한일 클럽챔피언십경기에서 양현종은 5.2이닝 동안 3안타 1볼넷 1실점으로 ‘무시무시한’ 피칭을 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명문구단 요미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피칭이었다.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감독은 “양현종의 피칭을 보니 앞으로 한국 대표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라며 칭찬했다.
그러나 양현종은 기대만큼의 성장을 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류현진·김광현과 함께 ‘왼손 트로이카’로 불렸지만 둘의 그늘에 항상 가렸다. 2009년에 얻은 자신감이 2010시즌 16승으로 나타났지만 방어율이 4.25로 높았다.
2011시즌에는 7승에 그쳤고 2012년에는 선발보다 중간으로 뛰면서 1승 2패에 그쳤다. 2010시즌이 끝난 뒤 열린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참가했고, 이후 어깨가 썩 좋지 않았다. 컷패스트볼 그립을 배우다가 밸런스가 무너졌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양현종은 “단지 어깨가 좋지 않았을 뿐”이라고 이를 부인했다.
▤2015 최고 투수가 되다
양현종은 부상에서 돌아온 뒤 2014시즌 16승 8패로 리그 다승 2위에 올랐다. 오랫동안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렸지만 ‘이적료’라고 할 수 있는 포스팅(비공개입찰) 금액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구단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는 어깨의 짐이 되는 듯했지만 오히려 강한 채찍이 됐다.
공은 빨랐지만 구종(球種)이 다양하지 못했고, 승리는 많았지만 늘 방어율이 문제였던 투수는 2015시즌 중반까지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투수로 변신했다.
양현종은 7월 13일 현재 106.1이닝을 던지는 동안 방어율이 1.78밖에 되지 않는다. 타선의 부진 때문에 승수는 8개에 머물렀지만 이닝 소화 능력을 비롯해 상대 타자를 억제하는 능력이 리그 최고다.
양현종을 강하게 만든 것은 지난 겨울 겪었던 아픔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메이저리그는 한국리그 다승 2위 투수에게 박한 평가를 내렸다. 포스팅 시스템을 통한 입찰 금액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200만 달러(약 22억원)에서 꽤 모자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현종은 일단 포스팅 금액을 받아들인 뒤 연봉 협상을 하게 해달라고 구단에 요청했지만 KIA는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현종은 협상 테이블에서 쓸쓸히 물러났지만 좌절하는 대신 절치부심했다.
메이저리그가 양현종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기록은 이닝 소화능력과 볼넷 수였다. 양현종은 2007년 데뷔 이후 한 번도 200이닝을 채우지 못했다.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한 시즌은 2014시즌으로 171.1이닝을 던졌고, 2010년 169.1이닝을 던진 게 전부였다. 메이저리그의 162경기를 선발투수로서 소화하기에는 많이 모자란 숫자였다. 류현진이 2차례의 200이닝 시즌과 3차례의 180이닝 이상 시즌을 치른 것과는 차이가 났다. 이닝 소화 부담이 큰 불펜투수로 기용하기에는 볼넷 숫자가 발목을 잡았다.
투수의 볼넷 수를 가장 잘 드러내는 기록은 방어율처럼 9이닝을 기준으로 계산하는 9이닝당 볼넷(BB/9)이다. 양현종의 통산 BB/9는 4.63으로 좋다고 보기 어렵다. 적어도 2.5언저리를 기록해야 ‘볼넷 억지력이 있는 투수’라고 평가 받는다. 류현진이 국내에서 기록한 통산 BB/9는 2.72였다. 특히 메이저리그 진출 직전 시즌이었던 2012시즌의 BB/9는 2.27까지 떨어뜨렸다.
양현종은 두 기록 모두 2015시즌 들어 급격하게 떨어뜨리고 있는 중이다. 양현종은 올 시즌 마운드에서 가능한 오래 버티고 있다. 17경기에 등판해 106.1이닝을 던졌다. 경기당 평균 6.1이닝을 소화하고 있다. 지난 시즌 평균 6이닝을 채우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걸음의 성과다. 볼넷 수 역시 단축시키는 데 성공했다. 양현종의 올시즌 BB/9은 3.89로 통산 성적 4.63에 비해 크게 줄었다.
가장 극적으로 변한 기록은 피안타율 0.222다. 통산 피안타율 0.258에 비해 3푼 이상 떨어뜨렸다. 여전히 ‘타고투저’가 리그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과다. 허용하는 안타와 볼넷이 줄어든 덕분에 ‘이닝당 출루 허용(WHIP)’ 역시 자신의 시즌 최저인 1.20까지 떨어 뜨렸다. 방어율은 리그 유일의 1점대(1.78)다.
1999년 이후 정규이닝을 채우고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투수는 류현진(1.82, 2010년 192.2이닝)이 유일하다. 만약 양현종이 200이닝을 넘기고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다면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기록이 된다.
프로야구 통 산 200이닝 이상 던지고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것은 모두 6번 있었다. 1982년 박철순(1.84), 1986년 선동열(0.99), 최동원(1.55), 최일언(1.58), 김건우(1.80), 1991년 선동열(1.55)이 전부다. 이중 왼손투수는 전무하다. 류현진도 해보지 못한 기록이다.
▤모자라면 아끼면 된다, 역발상 실험
양현종의 ‘변화’ 혹은 ‘변신’은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데서 시작됐다. 나름대로 내놓을 만한 성적을 거뒀다고 생각했지만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리는 데 실패했다. 양현종 스스로 과거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양현종은 “지난 2년과 올해의 차이는 느낀 것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 시즌에는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강했다. 포스팅을 준비하며 야구 외적인 스트레스가 많았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실패하고 난 뒤 생각해보니 내가 많이 변해 있었다.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포스팅 실패가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찬찬히 문제점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다. 양현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서두르다 일을 그르친다는 점이었다. 마라톤에 익숙하지 않았다.
양현종은 2013시즌 전반기에만 9승을 달성하며 토종 왼손 20승 투수 탄생에 대한 기대를 모으게 했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거의 공을 던지지 못했다. 옆구리 근육을 다쳤고 복귀에 시간이 걸렸다. 돌아온 뒤 양현종은 제 페이스를 잃었다. 전반기 9승 1패, 방어율 2.30의 투수는 후반기 0승 2패, 방어율 5.96의 투수가 됐다.
지난 시즌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현종은 전반기 동안 10승 5패, 방어율 3.56으로 거침없이 내달렸다. 외국인 투수들과 다승 선두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후반기가 되면서 또다시 무너졌다. 지난 시즌 양현종은 후반기에 6승 3패, 방어율 5.62를 기록했다. 국내 투수 중 다승 1위에 올랐고, 덕분에 제1회 최동원상을 받았지만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못 했다.
원점에서의 검토는 훈련 방식의 변화로 이어졌다. 스프링 캠프 훈련에 과감한 변화를 줬다. 모험에 가까운 실험이었다. 앞서 3년 동안 KIA를 이끌었던 선동열 감독은 ‘캠프 3천 구(球)’를 강조하는 지도자였다. 스프링캠프에서 투구 3천 개를 해야 시즌 중 좋은 투구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투수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그만큼 충분히 던져야 안정된 제구와 시즌을 치를 수 있는 체력이 쌓인다는 얘기였다.
선동열 감독이 물러나고 김기태 감독이 취임했다. 양현종은 훈련 방식을 바꿨다. 양현종은 스프링캠프에서 몸을 확실히 만드는 데 주력하고 공 던지는 시기를 이전보다 훨씬 늦췄다. 감각 유지를 위한 불펜피칭을 했지만 캠프 연습경기에 한 번도 등판하지 않았다. 실전 투구 시기를 최대한 뒤로 늦췄고 시범경기에 나선 뒤 곧바로 개막을 맞았다. 지난 2년 연속, 초반에 최고 페이스를 달리다 여름 이후 미끄러진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스스로의 처방전이었다.
후반기에 모자라는 체력을 앞에서 아끼겠다는 계획이었다. 마라톤을 할 때 초반 오버 페이스가 후반 기록을 늦추듯, 앞에서 체력을 아끼면 후반기에 힘을 유지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물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성장은 알을 깨면서 비로소 이뤄진다.
양현종의 실험은 일단 성공적으로 보인다. 양현종은 “이전에는 4월부터 100% 컨디션으로 출발해 꾸준히 유지하려고 했다면 올해는 6월에도 컨디션이 올라오는 과정에 있다. 캠프에서 공을 많이 던지지 않아 어깨가 많이 보충돼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양현종이 류현진을 넘어 ‘선동열·최동원급(級)’의 시즌을 남길 가능성을 높인 것은 양현종 본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주변의 도움이 있었다. 투수는 등 뒤에 7명의 야수를 두고 플레이하는 자리다. 마운드는 그라운드 가장 높게 솟아 있지만 그 마운드 옆과 뒤로 타구를 처리해주는 야수들이 존재한다. 투수가 항상 삼진만으로 아웃카운트를 잡을 수는 없다.
KIA의 수비는 지금까지 양현종을 거의 도와주지 못했다. ‘수비 무관 자책’으로 풀이되는 FIP라는 기록은 수비의 도움을 제외한 투수 혼자만의 능력을 방어율과 비슷한 숫자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FIP보다 방어율이 지나치게 높을 경우 ‘수비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양현종의 2014시즌 FIP는 4.19였지만 실제 방어율은 4.25로 이보다 더 높았다. 반면 올 시즌 양현종의 FIP는 4.14로 큰 변화가 없지만 방어율은 1.78로 뚝 떨어졌다. KIA의 수비가 변한 덕분이다.
KIA는 수년간 지독한 수비로 고전했다. 팀의 수비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기록으로 수비 효율지수(DER·인플레이 타구의 아웃 처리 비율)가 있는데 이 기록에서 매년 바닥권이었다. 선동열 감독이 부임했던 2012년 광주구장이 인조잔디에서 천연잔디로 바뀌면서 경험이 부족한 내야진이 정신적 충격을 받을 정도로 수비기록이 추락했다.
2년 뒤에는 아예 새 구장으로 옮기는 바람에 홈 어드밴티지가 사라졌고, 올 시즌을 앞두고는 주축 내야수 김선빈과 안치홍이 모두 군에 입대했다. 안정감 있는 수비는커녕 투수들이 마운드에 진땀을 흘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투수는 혼자가 아니다
KIA 투수들은 수년간 자신의 능력보다 방어율에서 손해를 봐야 했다. 2013시즌 김진우는 수비 무관 자책(FIP)이 3.62였지만 방어율은 4.99로 좋지 않았다. 투심패스트볼 장착 뒤 뜬공/땅볼 비율이 0.46으로 땅볼 비율이 늘고도 내야 수비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KIA의 DER은 63.8%까지 떨어졌다. 역대 최악이었던 한화(62.9%)가 없었다면 프로야구 사상 가장 낮은 기록을 세울 뻔했다.
그런데 올 시즌 KIA의 수비는 마치 TV 프로그램 <렛미인>을 보는 것처럼 완전히 변신했다. 지난 시즌 역대 최악의 기록에 가까웠던 KIA의 DER은 67.3%로 급등했다. NC(67.93%), 삼성(67.88%)에 이은 리그 3위다. 투수들은 진땀을 흘리는 대신 등 뒤의 야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여기에 볼티모어에서 돌아온 윤석민의 존재도 양현종에게 큰 힘이 된다. 단지 자신의 뒤를 지켜주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팀에서 함께 뛰는 것만으로도 힘이다.
양현종에게 올 시즌 최고의 경기는 5월 23일 삼성전이었다. 삼성 왼손 차우찬과 명품 투수전을 펼친 끝에 8이닝 7안타 9탈삼진 무실점 뒤 9회 윤석민의 세이브로 1대 0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경기다.
양현종은 “보는 분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최고의 경기였다. (윤석민) 형이 경기 끝나고 세리머니할 때 더그아웃에서 나오던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고 서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나는 완봉승보다 그 경기가 훨씬 더 좋았다”고 돌이켰다.
양현종은 벽에 부딪혔고, 아팠고, 그만큼 성숙했다. 과감하게 변화를 택했고 자신의 과거뿐만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까지 얻었다. 양현종이 던지는 공끝에 성숙함·노력·희망이 묻었다. 그게 200이닝, 1점대 방어율을 바라보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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