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좋은 도시 아를(Arles)은 고흐의 도시다. 고흐는 아를에서 1년 남짓 머물면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과 ‘밤의 카페’ 등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가난했고 외로웠던 고흐가 유토피아를 꿈꾸며 정착했던 도시 아를에서, 고흐는 다시 고갱에게 버림받고 분열했다.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도시로 유명한 아를(Arles)에서 그의 작품 감상은 물론 와인까지 즐겨보길 바란다.
▧ 고흐 작품 200여 점의 무대
한 해를 마감하던 1888년 12월 30일, 프랑스 아를의 지역신문인 ‘르 포럼 레퓌블리깽’은 그해 12월 22일 발생한 엽기적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스스로 귀를 자른 고흐는 아를에 있는 생 테스프리 시립병원을 거쳐 이듬해인 1889년, 생 레미의 ‘생 폴 드 모슬레’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1년 뒤인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들판으로 걸어나가 자신의 가슴에 대고 총을 쐈다. 바로 죽지 않았지만 총상은 치명적이었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고흐는 이틀간 심하게 앓고 난 뒤, 동생 테오가 보는 앞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고흐가 입원했던 아를의 정신병원은 현재 문화센터로 개조돼 ‘반 고흐의 공간’으로 불리고 있다.
아를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곳이다. 네덜란드 화가인 고흐는 프랑스 남부의 이 마을에 1년 남짓 머물면서 이 지역에 활짝 핀 해바라기와 라벤더를 포함해 ‘아를의 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 ‘아를 병원의 정원’ 등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평생토록 그림 900여 점과 습작 1100점을 남긴 고흐는 자살 직전 10년에 작품의 대부분을 완성했다. 이 중 5분의 1에 해당하는 200여 점이 아를에서 그려졌다.
아를은 남부 프랑스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형성된 이 마을의 인구는 약 5만 명. 남프랑스 특유의 한적함과 여유를 풍겨낸다. 이 마을에 남아있는 로마의 흔적은 지금도 뚜렷하다. 한복판에 자리한 원형극장은 BC 1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1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원형경기장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로마의 원형경기장 중에서는 콜로세움 다음으로 규모가 큰 것이라고 한다. 이 원형경기장과 원형극장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골목길이 형성돼 있고, 그 틈새로 주택, 카페, 호텔, 상점이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다.
남부 프랑스 특유의 여유와 정감은 우편엽서에서도 나타났다. 그림엽서 자체를 파는 다른 지방과 달리, 수십 년 전 연인들이 주고받았던 실제의 ‘연애 엽서’를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 것이었다. 내용은 대부분 배우자나 연인에게 그리움을 전하며 안부를 묻는 것. 펜에 잉크를 묻혀 손으로 쓴 고풍스러운 필체에서 시공을 초월한 사랑이 느껴졌다. 가격은 장당 1~3유로(1100~3300원). 상점 주인은 폐지를 상품화하는 기발한 상술을, 관광객은 수십 년 전 사랑을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 로마 시대부터 유명한 와인 생산지 ‘생시니앙’
아를에서 몽펠리에를 지나 까흐까손으로 가다 보면,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 싶은 아기자기한 마을이 나온다. 랑거독 루시옹이라 부르는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도 가장 유명한 와인 산지인 ‘생시니앙(Saint Chinian)’ 마을이다.
고대 로마 시절부터 와인을 생산한 곳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웅변가인 시세로(BC 106~BC 43)가 생시니앙 와인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800년대 후반 지나친 과잉생산으로, 잠시 싸구려 취급을 받는 ‘모멸’을 겪었던 이 지역 와인은 1951년 프랑스 와인의 두 번째 최고등급인 VDQS를 받고 1982년 AOC(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 원산지 통제표시등급)로 선정되면서 수천 년 전의 영예를 회복했다.
이 지역은 피레네 산맥이 뻗어 내려온 산골 마을이다. 와인 관계자들 외에는 마을을 찾는 외국인이 별로 없어서,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느낄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좋아하고, 프랑스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희망했고 또한 분열했던 고흐'를 만나러 남부에 위치한 태양의 도시 아를(Arles)로 가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