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면 역시 독서의 계절. 올 한글날 연휴에는 서울에서 문학의 정취를 느끼며 여행을 하는 것은 어떨까? 삭막한 도시인줄만 알았던 서울에 숨겨진 문학의 향기. 서정주, 이상, 이태준 등 대문호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보자.
|보안여관 ‘최소의 집’ 전시를 둘러보고 있는 방문객. 허물을 벗은 것 같은 보안여관 건물과 전시된 최신 건축 모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 여름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저만치 온다. 가을이 오면 뒤따라오는 말이 있다. 독서의 계절. 가을이 오면 왠지 가방 속에 책 한 권쯤은 넣어 다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다. 그렇게 책 한 권 들고 가벼운 마음으로 문학이 있는 장소를 찾아 떠나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서정주, ‘13인의 아해가 무섭다’고 외치는 시인 이상, 서정적인 문체를 자랑하는 이태준 등 우리에게 익숙한 문인의 작업 공간이 후배 작가와 문학 지망생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는 장소로 거듭난다. 1930년대 젊은 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됐던 ‘통의동 보안여관’과 ‘통인동 이상의 집’, 그리고 ‘성북동 수연산방’이다. 8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문학 거장들의 공간이 후손들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1933년 서정주(맨 왼쪽)와 시인 신석정의 만남. 서정주는 신석정(서정주의 오른쪽) 등 동료 문인들과 어울려 대화하길 좋아했다.
▤신진 예술가들의 양지 ‘보안여관’
|올해 7월 23일부터 8월 17일까지 열린 보안여관 ‘최소의 집’ 전시. 건축가들이 최소주의의 삶을 건축물에 녹여냈다.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과 낡은 철문. ‘보안여관’이라고 적힌 간판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낡은 여관 건물 앞에 몇 십 년의 세월을 머금은 듯한 안내 푯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미성년자는 입장해서는 안 됩니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바닥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고, 방과 방 사이의 벽들도 뚫려 있다. 철거를 앞둔 건물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이곳을 찾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신진 예술인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통의동 보안여관이기 때문이다.
시인 서정주는 그의 <미당 서정주 전집> 3권 ‘천지유정’에서 1936년 통의동 보안여관에 머무르며 김달진, 김동리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고 써놓았다. 그가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일정기간 동안 문학적 활동을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실제로 70~80년대까지도 신춘문예 원고를 접수하는 작가의 주소가 여관인 경우가 더러 있었다고 한다. 지방에서 상경하거나 혹은 이미 서울에 있더라도 떠돌이 생활을 하며 다른 문인들과 여관에서 장기 숙박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관이라는 곳이 불특정 다수의 일시적 거주공간이기는 하지만 문학도들의 창작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관의 ‘문학적 아틀리에’ 역할은 누군가가 부여한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1936년 당시의 서정주는 무명의, 내일을 알 수 없는 청년 문학도였다. 보안여관은 서정주 같은 무명의 문학도들이 모여 담론을 나누고 작가로서의 생각을 다져나가던 곳이다. 보안여관을 이끌어가고 있는 문화그룹 메타로그의 최성우 대표는 “불투명한 미래의 문학도들의 ‘창작소’ 역할을 한 보안여관이 오늘날의 서정주들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일부러 덜 알려진 신진 작가들을 선택해 그들의 작품을 보여줄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보안여관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시간의 박제화’다. 최 대표는 “대부분의 문학관이나 기념관은 작품이나 유품들을 전시하며 어떤 특정 시기를 기념하거나 그곳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며 “그 당시의 시간만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까지 흘러온 시간도 중요하고 우리가 새로 만들어갈 시간도 중요하다. 모든 것이 같이 쌓여가야 되는 부분인데, 대부분 기념관은 현재를 쌓지 않고 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특히 문학 전시관 같은 경우, 작가의 생산물인 텍스트를 이미지화하는 데 더욱 어려움이 따른다. 책상에서나 침대에서 숙독하는 매체인 텍스트를 전시장으로 옮겨, 방문객들에게 ‘여기 서서 읽어보세요’라고 요구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문학 기념관은 작가가 사용했던 물건이나 그 시대의 사진이 텍스트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최 대표는 “서정주, 김달진이 머물렀을 때 만들어낸 <시인부락>이라는 잡지, 잡지의 표지사진 등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문객들에게 서정주와 김달진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전시나 기념관이라는 고정된 형태보다,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행위’로 보여줄 수 있다”며 그것이 바로 1936년 당시 서정주의 상황과 비슷한 젊은 작가들의 퍼포먼스임을 강조했다.
8월 13일, 통의동 보안여관의 ‘최소의 집’ 전시에서 만난 대학원생 권유진(23) 씨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낡은 건물에서 보다니. 이색적이다”라며 “건물을 헐지 않고 이대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오래된 건물을 부수고, 번듯하고 높은 새 빌딩을 세우는 요즘 시대와는 달리 옛 공간에서 방문객과 작가들이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방문객들은 어느 예술분야 하나만 편식하지 않고 건축, 미술, 무용, 문학 등 프로젝트를 만나볼 수 있다. 전문가 한 명이 일방적으로 정보를 주입시키는 강의가 아닌 관람객이 만지고, 듣고, 말하는 등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젝트다.
보안여관이 방문객들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 그곳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봐주는 것이다. 최 대표는 “큰 카메라를 가져와서 쓰러져가는 건물만 찍거나 셀카봉으로 인증샷만 찍어가는 등 내용물을 보지 않고 껍데기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젊은 작가들이 선보이는 창작물보다, 보안여관의 배경만 슬쩍 훑어보고 가는 것에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공간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공간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보안여관 옆 터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새 건물과 현재의 보안여관을 다리로 연결해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에 등장하는 살롱이 현실에서 재현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보안‘여관’처럼 게스트 하우스도 운영한다고 하니, 보안여관에서 또 다른 서정주가 나타나기를 기대해볼 만하다.
▤문학을 논하는 곳, 이상의 집
|1.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의 ‘이상의 집’. 전통한옥과 현대건축의 멋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 2. 시인 이상과 소설가 박태원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사진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제1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열세 명의 아이들이 골목으로 달린다고 말한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의 공간은 종로구 통인동에 있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요절한 이상이 스물셋까지 살던, 어쩌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통인동 이상의 집’은 백부에게 입양된 이상이 실제로 머물렀던 곳 중에 유일하게 물리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살았던 ‘터’에 새로 지어진 가옥이다. 그가 살았던 공간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상이 떠나고 난 뒤 300여 평의 터가 조각나 팔리는 바람에 지금 ‘이상의 집’으로 불리는 공간은 20평이 채 되지 않는다.
끝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고뇌와 부정으로 괴로워했던 이상은 스물두 살부터 나타난 폐결핵 증상으로 고통받다 스물일곱에 눈을 감았다. 그의 기구한 운명처럼, 이 터도 그랬다. 서촌에서 낡은 건물들이 무너지고 높은 건물들이 조금씩 들어서면서 그가 실제로 밟았던 땅의 흔적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이상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단체들은 함께 이곳을 매입해 이상의 기념관으로 운영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러나 ‘서촌’이라는 위치적 상징성 때문에 한옥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는 데에 어려움이 따랐다.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터를 매입한 후, 재단법인 아름지기와 함께 운영을 고민한 끝에 그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로 남겨놓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상이 살았던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1940년대 지어진 도시형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마침내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친 통인동 154-10번지가 2012년부터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안의 내용을 채우는 일. 재단법인 아름지기 이은정 간사는 “이 좁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했다”며 “이상이 문학뿐 아니라 건축, 미술,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이상들이 마음껏 놀고, 이상의 예술세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재단법인 아름지기는 한국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연구해 생활 속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 단체다. 아름지기가 ‘이상의 집’ 운영을 맡은 이유도 이와 맥을 같이한다. 근대문화 역시 우리가 이어가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는 생각에서다. 아름지기가 이상의 집을 운영하며 굳게 지키고 있는 모토는 사람들이 모여 생산적인 활동을 하도록 돕고, 또 그것들이 훗날 또 다른 창조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한 인물을 기리는 기념관보다는 이곳을 구심점으로 미래 세대를 위한 창작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2012년 이상의 집에 ‘제비다방’이라는 간판이 걸렸다. 1933년 이상이 창신동에 차렸다는 ‘제비’라는 이름의 다방과 똑같은 간판이다. 창신동의 제비다방에서 이상은 그의 동료였던 김기림, 이태준 등과 함께 청춘을 보냈다. 이 간사는 ‘제비다방’은 이상과 그의 친구들이 담론을 나눴던 것처럼, 이곳이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는 공간이 됐으면 하는 취지로 붙였던 프로그램 이름”이라며 “지금은 제비다방이라는 간판을 떼고, 이상의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의 집이 무료로 운영되는 이유도 좀 더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기 위함이다. 영리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 작업을 하러 오는 디자이너나 시나리오를 쓰러 오는 영화감독, 이상의 문학을 연구하는 대학생 등 다양한 계층이 이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때론 공짜 음료를 마시며 이상 문학에 대해 깊은 토론을 나누기도 한다. 이상에 관한 모든 자료를 이곳에서 찾을 수 있어 그와 그의 문학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열려 있기만 한 공간만은 아니다. 아름지기가 비정기적으로 기획하는 문학 강연은 이상과 같은 문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상의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상의 집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도 제 각각이다. 실내 디자인을 전공한 취업준비생 오주연(26) 씨는 “문학도이자 건축학도이기도 했던 이상에게서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인테리어에 녹이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들렀다”며 “옥상으로 통하는 굳게 닫힌 철문은 그 당시의 이상의 심리를 말해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저곳을 사진에 담던 이근영(17) 양은 “수행평가를 하러 친구들과 함께 왔다”며 “교과서에서 소설 <날개>를 읽은 게 전부인데, 이상의 문학 사상관이 이렇게 깊고 심오한 줄 처음 알았다”고 감상평을 남겼다.
시 <유리창>을 쓴 김기림 시인은 훗날 자신의 시집에서 이상을 ‘우리들이 가졌던 황홀한 천재’라고 평가한다. 해석이 불가능하거나 난해한 문학을 발표한 이상이 끊임없이 자아에 대해 생각했을 공간이자 시 <오감도>에서 13인의 아이들이 달리던 골목에 위치한 ‘이상의 집’. 한국 문단을 이끌어갈 또 다른 천재가 지금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1. 아담하지만 화려한 모습의 수연산방. 한옥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도심 속 수연산방이 제격이다. / 2. 수연산방의 명당자리. 이태준은 이 자리에서 수많은 명작소설을 써내려갔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은 문학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시 <진달래 꽃>을 쓴 만해 한용운은 1933년 이곳에 둥지를 틀었고, 김광섭 시인은 1969년 <성북동 비둘기>를 발표했다. 섬세한 감정 묘사와 서정적인 문체로 대한민국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의 타이틀을 갖고 있는 소설가, 상허 이태준 역시 1933년부터 13년 동안 이곳에 거주하면서 유명 작품을 집필했다. 1937년 <조광(朝光)>에 발표된 소설 <복덕방>도 성북동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태준은 성북동에 위치한 그의 보금자리에 ‘여러 사람이 모여 산속에서 책 읽고 공부한다’는 뜻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의 당호를 붙였다. 이름에 걸맞게 1930년 당대의 문단 및 예술계 작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눴다. 이태준을 포함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박태원,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 등이 회원으로 있던 문학단체, 구인회(九人會)가 순수문학에 대한 열띤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현재 수연산방의 2개의 별채 중 하나에 ‘구인회(九人會)’라는 이름의 북카페가 운영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다. 또한 이태준이 편집자로 있던 문예지<문장(文章)>의 인사들이 모이기도 했다. 그와 가까이 지낸 동료 문인들의 아지트가 바로 수연산방이었던 셈이다.
1946년 이태준이 월북한 후, 남은 가족들이 주거의 목적으로만 사용하던 수연산방이 찻집으로 재탄생한 것은 1999년의 일이다. 이태준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그의 흔적을 두 눈으로 보길 원했고, 이태준의 외종손녀 조상명 씨가 방문객들에게 차 한 잔 씩 대접했던 것이 전통 찻집을 열게 된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수연산방을 배경으로 찍은 이태준의 가족사진. 그의 가족들이 살던 수연산방은 후손이 찻집으로 개조했다.
수연산방은 얼핏 보면 아담한 한옥의 모습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부가 화려하다. 대청을 두고 工자 모양으로 양측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고, 안방 앞에는 누마루, 뒤에는 부엌과 화장실을 둬 공간의 기능을 집약시켰다. 묘하게 일본의 양식과 섞여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건축양식으로 이태준의 예술적 감각이 문학뿐 아니라, 집 안에도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고택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조상명 씨는 “수연산방은 전통양식이 아닌, 창의적 양식으로 지어진 한옥”이라며 “이곳의 색다른 멋이 유럽이나 일본 등 한옥에 관심이 많은 분을 끌어들이는 요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요인은 한옥뿐만이 아니다. 산업화의 산물인 높은 빌딩이 아닌, 옛 한옥을 보존하고 있는 성북동은 고요함을 품고 있는 동네다.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도심 속에서 ‘느림’의 여유를 찾고 싶은 사람들은 수연산방의 고즈넉한 매력에 빠진다. 직장인 김윤미(53) 씨는 “수연산방에 오면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라며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잠깐 잊고 싶을 때 이곳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 온갖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말했다.
인생의 대부분의 작품을 집필한 수연산방에 정말로 이태준의 혼이 남아 있는 것일까? 스스로를 이태준 소설의 열렬한 지지자라고 소개한 강준범(29) 씨는 군 제대 후 선임의 소개로 수연산방을 알게 됐다고 한다. 강씨는 “책 읽고 싶은 날에는 여자친구와 함께 꼭 이곳에 온다”며 “‘이 자리에 앉아서 이태준 선생이 이런 문장을 썼구나’라는 걸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다”고 말했다.
조상명 씨는 “이 공간이 주는 서정적 느낌은 감성적 문체와 미의식에서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던 이태준의 예술적 감각과 일치한다”며 “감성이 풍만해지고 싶은 분들은 누구나 수연산방의 문지방을 넘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방문객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조씨는 “현대문학·예술 공간으로써 수연산방이 방문객들에게 시각뿐만 아니라 오감을 만족시켜주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밝혔다.
이태준이 소설을 집필했던 한옥, 글을 쓰다 한 박자 쉬어가던 마당,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나무는 그의 문학생활을 상상케 하는 주요 포인트다. 곳곳에 무심코 묻어 있는 80년의 세월을 따뜻한 차와 함께, 그의 소설과 함께 느껴보는 것도 서늘한 가을을 따뜻하게 보내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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