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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사도세자가 죽은 이유는 영조의 금주령 때문!?

길 가다 개미조차 밟지 못 했을 만큼 마음 여렸던 영조, 그러나 아들 죽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죽음의 배후에는 '금주령'이 있었다고 하는데, 금주령이 무엇인지 또 이로 인한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부자관계는 어떠하였는지 살펴보자.


사도세자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는 조선왕조 500년을 대표하는 성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오명을 남겼다. 서울 창경궁에서 열린 조선시대 궁중연회 재현행사에 참석한 영조대왕.




길에 기어 다니는 개미 한 마리조차 밟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여렸던 영조. 영조는 마음이 여린 반면 체면을 아주 중요시했다. 영조인지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곤 했다. 이 같은 여린 마음과 체면 중시를 빼놓고 영조의 치세 50여 년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예컨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사건을 생각해보자.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일 수 있었는지, 그것도 무더운 여름날 8일이나 굶겨서 죽일 수 있었는지 도무지 놀라울 뿐이다. 이런 놀라운 스캔들 이면에는 영조의 여린 마음과 체면 중시가 있었다.


▣흉년으로 인해 술이 금지되다.




한중록


|사도세자의 빈인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쓴 회고록인 <한중록>.


조선건국 이후 금주령은 거의 모든 국왕에 의해 추진됐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으로 확인해보면 조선의 창업군주인 태조 이성계의 경우 2년(1393) 12월, 3년(1394) 1월, 4년(1395) 2월, 5년(1396) 4월, 7년(1398) 5월 등 거의 매년 금주령을 공포했다. 대부분의 이유는 가뭄 또는 홍수로 인한 곡물 품귀 때문이었다. 태조 이후의 정종·태종·세종 등도 유사한 이유에서 금주령을 공포하곤 했다.


하지만 영조 이전의 금주령은 가뭄이나 홍수 같은 특정 상황이 해소되면 곧바로 해제되곤 하는 한시적 정책이었다. 영조도 재위 중반까지는 한시적 금주령을 공포하곤 했다. 이런 상황이 영조 31년(1755) 가을에 큰 흉년이 들면서 확 바뀌게 됐다. 그 해 9월 8일 영조는 내년 즉 영조 32년(1756) 정월부터 모든 제사에서 예주(醴酒)를 쓸 것이며 모든 술은 금지하고 위반자는 엄벌한다는 금주령을 공포했다.


영조가 금주령을 엄격하게 추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종묘 제사 때문이었다. 종묘 제사에서는 술을 쓰면서 일반 백성들에게는 술을 못 쓰게 하는 것은 원칙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영조는 즉위 후 30년 동안 금주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영조가 누워 있다가 문득 생각해낸 것이 바로 예주였다.


▣금주령을 어기면 사형에 처하도록 되다.




뒤주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


예주는 감주(甘酒), 즉 단술이었다. 당시의 예주는 이름이 술이지 사실상 식혜와 유사한 음료로 색깔도 맑지 않고 냄새와 맛도 좋지 않아 맹물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영조가 현주는 예주의 조상이고 예주는 시주의 조상이라 언급한 의미가 그것이었다. 영조는 이 같은 예주를 이용해 시주를 완벽하게 금지하는 정책 즉 금주정책을 시행하고자 했다.


영조 31년(1755) 9월에 이처럼 엄격한 금주령이 공포된 이후 처벌조항도 더욱 정비됐다. 우선 영조 32년(1756) 1월부터 금주령이 발효됨과 동시에 한양 술집의 주등(酒燈)을 금지하는 것으로 했다. 또한 금주령 위반자는 엄형(嚴刑) 후에 섬으로 유배하는 것으로 했다.


아울러 술을 마신 자는 잔읍의 노비로 소속시키고, 선비는 청금(靑衿)에서 삭제한 후 3차례 형신(刑訊)해 도배(島配)하고, 중서(中庶)는 수군에 충정하게 했다. 이 처벌규정이 1년 후에는 더욱 엄격해져서 금주령을 어긴 양반관료는 10년 금고(禁錮)되고, 유생은 10년간 과거응시가 금지되며, 서민과 천민은 본토에서 10년간 종이 되게 했다. 금주령의 엄격한 처벌규정은 영조 38년(1762) 9월 4일에 위반자를 사형시키는 것으로 절정에 올랐다.


▣주량도 적고 술의 폐단도 잘 알았던 사도세자




사도세자 편지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안부하여(安否何如)'는 '어떻게 지내십니까' 정도의 의미다.


영조가 동왕(同王) 31년(1755) 9월 8일에 엄격한 금주령을 공포하던 당시 사도세자는 21세였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주량이 적었다고 한다. 또한 사도세자 스스로도 술의 폐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사도세자의 <계주만필(戒酒漫筆)>에는 “관혼상제는 선왕의 법이니 공경히 현주를 쓰면 신령이 통한다네. 내가 들으니 우임금은 성인인데 한번 순주(醇酒)를 마시고 의적을 멀리했다네. 의적이 떠난 지 3천 년, 그 사이에 화란이 없을 때가 없었네”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내용은 기본적으로 영조의 금주정책과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이 사도세자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듯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이 발효된 지만 4개월째인 영조 32년(1752) 5월 2일 오후 4시쯤, 왕은 숭문당에서 조정중신들을 접견했다. 숭문당은 영조가 거처하는 환경전과 사도세자가 공부하는 낙선당의 중간쯤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영조는 이곳에서 신료들을 접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영조는 숭문당에서의 접견이 끝나자 갑자기 낙선당으로 행차했다. 사도세자의 근황이 궁금해서 간 것인데 <승정원일기>에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낙선당에 갔던 영조가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유배하라고 명령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신치하는 ‘보고할 때 두서가 없었다’는 것과 해정은 ‘금주하는 때 대궐 안에서 술을 빚었는데 물을 때 거짓말하며 사실대로 답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낙선당에 간 영조가 사도세자와 관련해서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신치하와 해정이 명쾌하게 답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 삼경(三更)에 사도세자가 낙선당에서 조정중신들과 춘방관들을 만났고 뒤이어 그곳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사도세자와 조정중신들 간에 오고 간 대화가 <승정원일기>에는 삭제돼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병신년(1776, 영조 52)의 하교로 말미암아 세초했다’고 기록돼 있을 뿐이다.


병신년의 하교란 당시 세손이던 정조가 ‘<승정원일기>의 내용 중에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한 사건과 관련 있는 내용들을 삭제할 것’을 요청하자 영조가 허락한 하교였다. 따라서 이날 사도세자와 조정중신들 사이에 오간 대화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체면을 중시한 아버지와 반항심을 술로 푼 아들




융릉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함께 묻힌 융릉. 서울 휘경동에 있던 능을 정조가 '천하제일의 길지'라며 경기 화성으로 이장했다.


영조가 갑자기 낙선당에 들이닥쳐 사도세자를 불렀을 때 세자는 얼굴도 씻지 않고 옷차림도 단정치 않았다. 영조는 혹시 사도세자가 밤새 술을 마시고 지금껏 자다 온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자신은 백성들을 상대로 엄격한 금주령을 시행하는 중인데 세자가 밤새 술을 마시다니…. 격노한 영조는 세자가 술을 마셨는지 또 누가 술을 들였는지 책망하듯 물었다. 그때 사도세자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밧소주방 큰 나인 희정이가 주어 마셨다고 대답했다. 영조는 가슴을 두드리시며 ‘네가 이 금주하는 때 술을 먹어 광패(狂悖)하게 구느냐?’라고 엄히 책망하고는 술을 들인 책임을 물어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유배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한밤중에 낙선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사도세자의 방에 있던 촛대가 넘어져 일어난 화재였지만 영조는 세자가 홧김에 방화한 것이라 의심했다. 사도세자를 부른 영조는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어이 지르나?’ 하며 전후 사정을 묻지도 않고 호되게 꾸짖었다. 사도세자 역시 변명하지 않고 자신이 방화했다고 대꾸했다.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불신과 불통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명색이 부자간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믿지도 않았고 소통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영조는 자신이 엄격한 금주령을 내린 지 4개월 만에 다른 사람도 아닌 사도세자가 술을 마셨다고 생각하자 크게 상심했다. 사도세자를 직접 벌할 수 없어 대신 환관 신치하와 궁녀 해정을 처벌했지만 스스로 면목이 없던 영조는 ‘지난날의 일은 나의 허물이다. 지난날의 일은 나의 허물이다. 오늘날 나랏일은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할 지경이니 심장이 떨어지는 듯하다’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하교를 내렸다. 이런 하교에는 마음 여리고 체면을 중시하는 영조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난다. 영조는 사도세자와의 소통에 앞서 자신의 체면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의 사건으로 사도세자는 크게 변했다. 이후 사도세자는 술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정말로 과음하기 시작했다. 과음은 술주정과 폭력 그리고 살인으로 이어졌다. 이러면서 사도세자는 아예 영조와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 그래서 솟아나는 반항심을 그렇게 풀었지만 그 결과는 불신과 불통의 심화였다.


▣비극으로 막을 내린 부자관계


7월 6일 영조는 중전만 데리고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하겠다고 선언했다. 국왕의 이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신료들과 논의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영조는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영조는 ‘한밤중에 생각이 났다. 나는 다만 중전과 함께 경희궁으로 이어해 예전에 중전과 함께 대비를 모셨던 것처럼 몇 달 머물다 돌아오겠다’고 했다. 중전과 함께 오붓하게 지내기 위해 경희궁으로 이어한다는 명분이었다.


영조가 경희궁으로 옮겨간 후 왕과 세자 사이의 불신과 불통은 더 깊어졌다. 창덕궁에서 함께 살 때는 영조가 세자를 불시방문하기도 하는 등 접촉이 있었고 대화도 있었다. 그러나 경희궁으로 옮긴 이후 그나마 그런 것도 사라졌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전혀 믿지 않았고, 그렇다고 믿음을 회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다가 마침내는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까지 입 밖으로 내뱉게 됐던 것이다. 그 결과가 영조 38년(1762) 윤(閏) 5월의 뒤주사건이었다. 그리고 5년 후인 영조 43년(1767) 1월 왕은 사연 많던 금주령을 폐지했다.


돌아보면 영조의 엄격한 금주령은 근본적으로 여린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런 금주령이 사도세자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뒤주사건으로까지 치달은 이유는 불신과 불통 때문이었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이라도 신뢰와 소통이 없다면 비극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역사적 교훈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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