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음의 감기’로 불리는 우울증이 만 20~24세 청년층의 정상적인 삶을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령대 우울증 환자가 최근 4년간 약 24% 늘었다. ‘N포 세대의 비극’이라 할 만하다.” -‘우울증 앓는 20대… 4년새 환자 24% 늘어’(<서울신문>, 2017년 3월 6일)
우울증은 주로 ‘여성의 질병’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여성(특히 중년여성)에게 많이 나타났지만, 최근에는 남성 환자도 급증하고 있다. 과거에는 자신의 정신상태에 이상징후를 느낄 때 병원을 찾아가지 않는 환자들이 많았기에 ‘숨은 환자’가 많았다면, 이제는 ‘소아우울증’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날 정도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울증 환자의 진단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병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던 과거와 달리, ‘우울증은 확실히 질병이다’라는 인식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증상과 사회적 파급력이 너무도 크다. 감기를 100% 치료하는 약이 없듯이, 우울증 약도 증상을 개선하는 데 일시적으로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완전한 치료제가 없다. 우울증 약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환자가 많아지는 것도 큰 문제다. ‘우울증엔 상담보다 약이 최고다’라는 인식이 늘어갈수록 의존은 중독으로 이어지고 ‘내 자신이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주체적인 믿음은 사라져갈 것이다. ‘이 약 없으면 난 안 돼’, ‘이 약 없으면 잠을 못 자’라고 고백하는 환자가 많을수록, 그 사회는 각박하고 살기 힘든 곳이 아닐까.
▒‘나도 우울증 아닐까?’ 자기진단은 위험
최근 우울증을 앓는 20대가 급증하고 있다는 소식은 더욱 안타까운 현실이다. 가장 생기발랄하고 활발하게 활동할 시기에, 우울증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어둡고 쓸쓸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뼈아픈 상실인가. 우울증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다른 신체적인 질병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몸은 기억한다>의 저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이렇게 말한다. “집착, 충동, 공황 발작, 자기 파괴적인 행동 등 정신의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분류되는 행동들은 자기방어 전략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 그러한 증상을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장애로 여긴다면 치료의 목표가 적절한 투약 계획을 찾는 것으로 국한되고, 결국 환자는 평생 동안 약에 의존해야 한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신장 질환을 앓고 투석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다.”
치료 목표를 오직 ‘적절한 약’을 찾는 데 국한시킨다면, 환자가 진정으로 고통받는 심리적 이유, 환경적 영향, 인간관계의 문제점 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된다.
우울증을 다룰 때 또 하나의 위험은 ‘과잉된 자기진단’이다. 누구나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우울증 아닐까’, 이런 의심을 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요즘은 ‘셀프 진단’의 시대이기도 하다. 텔레비전에서 ‘ADHD를 앓고 있는 어린이’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ADHD 아닌가’ 의심하고, 인터넷에서 ‘번아웃 증후군의 심각성’에 대한 기사를 보면, ‘나도 번아웃 아닐까, 이렇게 힘들고 지쳐 있는데’라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마음은 언제든지 아플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아직 진짜로 다가오지 않은 고통’에 대한 과잉된 자기방어이며, 이런 방어 기제가 늘 우리의 신체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 없다. 웬만한 고통은 스스로 견뎌내는 것, 슬픈 감정을 숨기지 말고 서둘러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적극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고통을 자기파괴의 무기로 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삶의 진실을 배우는 것, 이런 마음자세야말로 그 어떤 첨단신약보다 우리 마음을 건강하게 해주는 정신의 해독제다.
|
“매일 운전한다면 좀 먼 곳에 주차시켜서 일상에서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늘려라.
매일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목적지보다 한두 정거장 먼저 내려서 걸어가라.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대신에 계단을 이용하라.
저녁식사 후 주위를 산책하라.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일을 자청하라.
주말에는 동물원이나 재래시장 등을 가라.
충분한 잠이 우울증의 약이 될 수도 있고, 마사지나 명상 등의 이완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하고 싶은 대로 자신을 내버려둘 필요도 있다.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자신에게 너그러워진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돌보아라. 이는 일상의 스트레스와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자신을 위한 안락한 시간을 마련해 두고 이를 습관화하라. 더 많이 울고, 웃고, 용서하라. 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고 느끼거나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가족이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라. 세상은 쉽사리 끝장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라 로젠탈, <약 없이 우울증과 싸우는 50가지 방법>, 2007
▒ 불편함도 불행으로 느껴
우울증에 대한 과열된 자기진단에는 행복에 대한 강박증이 숨어 있다. 현대인은 너무 심하게 ‘나는 지금 행복한가, 아닌가? 정말 행복한가? 그런 척하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심하게 자기 진단을 내리곤 한다. 행복강박증은 건강염려증만큼이나 피곤한 마음고문이다. 자신의 상태를 ‘행복/불행’, ‘성공/실패’, ‘승리/패배’라는 식의 이분법으로 자주 진단하는 것은 정신을 황폐화시킬 뿐 결코 총명한 정신건강관리법이 아니다.
방어기제는 인간의 고통을 줄이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지만, 과도한 방어기제는 오히려 정신적 치유를 가로막는 방해물이 될 때가 많다. 예컨대 소리에 예민한 사람들은 아주 작은 일상적 소음에도 ‘저 소음은 분명히 나를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가 있을 거야’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해석을 한다.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해도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구나’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해석을 하곤 한다. 방어기제는 건강한 정신상태에서는 적절하게 자극의 강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지만, 피로하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는 ‘저 모든 것이 나를 공격하고 있다’는 식으로 주변상황 전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현대인은 행복을 느끼는 데는 둔감해지고, 불행을 느끼는 데는 과민해지고 있다. 바로 이 높아져버린 방어기제가 ‘예전에는 견딜 수 있었던 사소한 불편’마저 ‘이제는 견딜 수 없는 불행’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배우자의 외도로 부부간에 신뢰가 무너져 부부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과거에 외도를 했던 남편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정에 충실하며 잘 지내려 노력하지만, 부인은 그때 일을 잊지 못하고 계속 남편을 의심한다. 남편이 잘해 줘도 ‘그 여자한테도 이렇게 잘해줬어?’라며 빈정거리고, 잘 못해주면 ‘내가 싫증났나 보네. 또 그 여자한테 가지 그래?’ 하는 식으로 남편이 어떤 행동을 해도 못마땅해 하니, 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이제는 이혼을 하는 게 서로에게 낫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 되었다. 남편은 부인이 과거 자신의 치부를 계속해서 들추는 건 자신에게 복수하고 못살게 굴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부인 입장을 보자. 너무나 엄청난 충격을 받아 그 기억이 해마가 아닌 편도체에 저장되면, 사소한 자극(속옷, 립스틱, 드라마에서 연애하는 장면 등)에도 남편이 외도를 했을 당시 경험했던 충격과 똑같은 강도의 분노와 배신감을 다시 생생히 경험하게 된다. 이는 부인이 남편을 힘들게 하기 위해서, 복수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배신이 자신의 존재에 엄청난 위협을 주는 경험이었기 때문에 위협을 감지하는 뉴로셉션이 지나치게 작동하고 이에 따라 편도체가 무차별적으로 위험 신호를 보낸 탓에 일어나는 반응이다. 편도체가 작동하면 모든 것을 흑과 백, 적과 아군으로 분리해서 보려는 성향이 강해지므로 남편의 외도를 상기시키는 자극이 있을 때, 그 순간 남편은 나의 적이 되고 나를 보호하는 방법은 남편을 공격하거나 도망가는 것밖에 없게 된다.” -권혜경, <감정조절>, 2016
정신분석가 권혜경 박사는 <감정조절>에서 ‘우리의 두뇌에 위험신호를 보내는 편도체’를 좀 더 자극에 이성적으로 반응하도록 훈련함으로써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이건 좋지 않은 상황이야’, ‘이건 심각한 상황이군’이라는 위험신호를 보내는 편도체가 너무 작은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도록 우리의 방어기제를 좀 더 높이는 감각훈련이야말로 일상 속에서 우리도 실천할 수 있는 우울증 예방법이다.
▒“내게 왜 이런 일이”란 질문은 오히려 ‘흉기’
|
그는 상담 중에 ‘쏟아진 옷장’이라는 비유를 즐겨 사용한다. “왜 어떤 사람들은 심한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심신이 건강한데, 어떤 사람들은 무너져버리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쏟아진 옷장의 비유를 쓴다. 쏟아져버려 엉망진창이 된 옷장에 아무렇게나 옷을 던져 넣는 것이 아니라, 옷을 완전히 다 꺼내서 하나하나 새로 정리하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책인 것처럼, 우리 마음도 그렇다는 것이다. 우울증이 생겼다며 약부터 챙겨먹고 삶의 진짜 문제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내 문제를 날카롭게 직시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렇게나 구겨진 옷들이 언젠가는 또 쏟아질 수 있듯이 마음 또한 언젠가 더 처참하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물론 옷장을 정리하기보다 마음을 정리하기가 훨씬 어려운 일이다. 옷들을 모두 꺼내 하나하나 손빨래를 하고 햇볕에 탈탈 털어 말리듯이, 우리의 상처도 하나하나 꺼내 굳이 곱씹어야 하고, 굳이 되새겨야 하고, 굳이 한 번 더 실컷 울어서라도 해방을 시켜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리가 끝나고 나면 스스로에게 정말 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를 견디고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위기 가운데 성장했기 때문이다.”
우울감을 가속화하는 사고방식을 하나하나 되새겨보자.
첫째, ‘삶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왜 나는 여기까지밖에 안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우리의 자존감을 깎아내린다. 그 기준을 꼭 낮출 필요는 없지만, 그 기준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한번 돌아보자. 내가 의식주의 기준, 수입의 기준, 소비의 기준을 ‘어느 정도’에, 심지어는 ‘누구의 수준’에 맞추고 있는지를. ‘이 정도는 되어야지 행복할 수 있지’라는 최소한의 기준이 나를 오히려 억압하고 짓누르는 것은 아닌지를.
|
둘째,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식의 질문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물론 처음에는 당연히, 본능적으로 그런 의문이 불처럼 일어난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힐 때, 갑자기 병마가 덮쳤을 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왜 하필 나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 질문은 스스로를 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괴롭히는 흉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내게 일어난 심각한 사건으로 괴로워하는 순간, 굉장히 무뚝뚝한 내 친구가, 평소에는 조언이나 충고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는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에 엄청난 위로를 받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그 말이 태어나 처음 듣는 말처럼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친구에 대한 나의 신뢰감 때문에 그 평범한 말이 더욱 소중하게 각인된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그 최악의 상황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 내게 일어난 사건과 그 관계자를 원망할 시간에, 내가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차라리 즐길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셋째, ‘어딘가 분명 좋은 방법이 있을 텐데, 나만 모르는 것은 아닌가’하는 자책감 어린 질문을 멈춰야 한다. 이제부터 알아가면 된다. 그리고 어딘가 분명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 문제에 대한 최고의 해결방안은 오직 나만이 생각해낼 수 있다. 치유는 수동적인 ‘처치’가 아니라 적극적인 ‘투쟁’이다. 누군가 약을 주면 그것을 고맙게 받아먹고 금방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다. 내가 내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불굴의 전사처럼 맞서 싸워야만 한다. 나는 힘들 때마다 “상처 입은 사람만이 남을 치유할 수 있다”는 문장을 되뇌곤 한다. 나는 아무런 상처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고 싶다.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처절하게 배운 지혜를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쓸 줄 아는 사람이다. 나아가 굳이 ‘그 사람을 낫게 하겠다’는 적극적인 제스처 없이도, 그저 그 사람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왠지 다 잘 해결될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아닐까. 나는 심리학을 문학과도 연결시켜보고, 미술과도 연결시켜보고, 여행과도 연결시키면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마음’에 대한 모든 것을 ‘심리학자’나 ‘정신과의사’에게만 맡겨버리기에는, 이 마음이란 문제가 너무 광대하고 복잡하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편안해질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스스로의 치유자가 될 수 있는 힘을 기를 때, 비로소 문제는 해결의 기미를 보일 것이다.
|
‘당신이 살아 돌아와서 기뻐요! 당신이 살아남은 덕분에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편과 동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으니까요.’ 비로소 광부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죽은 친구들을 기억하며 헛되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말이다.” -게오르그 피퍼, <쏟아진 옷장을 정리하며>,2012
모든 질병이 치료보다는 예방이 효과적이듯이, 우울증 또한 예방이 더욱 절실하다. 일상 속에서 때때로 느끼는 ‘우울감’이 심각한 ‘우울증’으로 발전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 삶을 내가 움직여간다’는 아주 기본적인 자기 신뢰감을 되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삶의 주권을 되찾는 것이다. 미래는 보험회사에 떠맡기고 교육은 학교와 학원에 떠맡기고 국가는 정치인과 기업인에게 맡기고 발언권은 미디어에게 맡기는 동안, 우리는 진정한 삶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삶의 운전대를 거대한 시스템에 맡겨버림으로써, 시스템이 부재하는 곳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나약함. 그 나약함에서 우울한 감정이 시작되곤 한다. ‘나라는 존재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는 필요 없는 존재다’라는 좌절감에서 우울증은 발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되찾아야 할 감정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 삶을 내가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 나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 나를 둘러싼 세상을 내 힘으로 조금이라도 더 살 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 우리가 스스로의 삶의 주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적극성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첫 번째 우울증 약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