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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임종석 비서관이 '임길동'에서 '거물들의 남자'가 되기까지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연일 인사와 관련해서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는 가운데, 80년대 운동권을 대표하는 임종석 전 재선의원이 비서실장으로 임명한 것은 그 중에서도 최고의 인사로 손꼽히고 있다. 그 만큼 파격적인 인사였던 것. 문재인 대통령이 삼고초려 끝에 수락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확인해보자.

 

 

 

DJ·한명숙·박원순 등이 중용했던 젊은 책사

 

임종석(51) 전 재선의원이 문재인 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86 운동권의 대표주자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제도권에 들어온 임 실장은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 시절에는 사무총장으로 낙점되기도 했다. 또 2014년 6월부터 2015년 12월까지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무부시장을 지냈다. 그리고 제19대 대선 다음날인 5월 10일 문재인 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거물들의 남자’라는 별명이 과하지 않다.

 

2012년 3월 9일 국회 정론관이 숙연해졌다. 전면에 나서 총선을 지휘하던 제1야당의 사무총장이 갑자기 고별인사를 하러 왔다. 얼굴은 초췌했고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패잔병 모습 그대로였다.
“민주통합당 사무총장으로서, 서울 성동구 총선 후보로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겠습니다. 세상 일이라는 게 마음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그는 곧바로 승용차를 타고 홀연히 사라졌다.

86 정치인의 대표주자인 임종석(51) 전 의원(이하 경칭 생략)은 그해 1월 민주통합당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얼마 뒤 무죄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상태였다. 여기저기서 “부적절한 기용”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왔다.(임종석은 같은 해 3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멍에를 벗었다)

급기야 이해찬·문재인 상임고문 등 친노가 주축이 된 ‘혁신과 통합’ 상임고문단이 3월 8일 긴급회동을 가졌다. 이들은 한명숙 당대표에게 비리 연루자들의 총선 불출마를 촉구했다. 임종석을 겨냥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임종석은 다시 신발끈을 조였다. 2014년 지방선거 때 박원순 시장을 도왔다. 2011년 보궐선거 때 무소속으로 당선됐던 박 시장이 이듬해 민주당에 입당할 때 가교 역할을 했던 것이 인연이 됐다고 한다. 선거 승리 후 박 시장은 임종석을 정무부시장으로 중용(重用)했다. 젊지만 탁월한 정무 감각과 빼어난 친화력을 높이 샀다. 임종석은 2015년 12월까지 박 시장과 함께했다.

임종석은 2016년 20대 총선 출마를 결심했다. 19대 때의 수모를 씻고 싶었다. 도전 지역구는 서울 은평을, 상대는 이곳에서만 5선 고지에 오른 이재오 전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그러나 임종석은 또 한 번 고배를 들었다. 본선에 오르기도 전, 당내 경선에서 강병원 예비후보(현 민주당 의원)에게 덜미를 잡혔다. 16, 17대 때 연달아 여의도에 입성했지만 18~20대 세 차례 연속 분루를 삼킨 것이다. 임종석의 정치인생도 그대로 막을 내리는 듯했다.

갈등하던 임종석에게 손을 내민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5년 전에 자신을 찍어냈던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였다. 지난해 10월 당시 문 전 대표는 임종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주변이 온통 친문 일색”이라는 비판에 시달리던 문 전 대표에게 임종석만한 구원투수가 없었다. 호남 출신이자 비문(비문재인)인 임종석은 정무감각과 소통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용광로’ 선거대책위원회를 꾸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임종석은 고사했다. 하지만 문 전 대표의 진심까지 끝내 뿌리치긴 어려웠다. 당 안팎에서는 “문 전 대표가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임종석을 품었다”는 말이 나왔다. 임종석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 대선 본선에서 문재인 캠프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그리고 2017년 5월 청와대에 함께 입성했다.

 

수배전단이 실종됐던 ‘임길동’

 

▎임종석 전대협 의장이 1989년 광주광역시 조선대 민주로에서 이철규 열사 사인 규명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임종석은 대학가 운동권에서는 ‘스타’였다. 전남 장흥이 고향인 임종석은 한양대 진학 후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한양대 총학생회장이던 1989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3기 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로 인해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게 된다. 전대협은 친북 통일운동 및 각종 반정부 활동을 주도해 이적단체로 분류됐다.

임종석은 지명수배 후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번번이 추적을 따돌렸다. 수배기간 임종석은 기자회견만 10여 차례나 가졌다. 각종 행사장에도 20여 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임길동’이라는 별명은 이때 얻었다.


‘임길동’이 신출귀몰한 행적을 이어가자 온갖 소문이 따라붙었다. “여장(女裝)을 하고 다닐 것”이라는 게 대표적이었다. 경찰에 검거된 후 임종석은 “안경을 쓰고 다녔지만 여장을 한 적은 없다”고 했다. 임종석의 키는 176㎝ 정도다. 여장을 하고 다녔다면 되레 사람들 눈에 더 잘 띄었으리라는 말이 나왔다.


10개월 동안의 도피 끝에 같은 해 12월 체포된 임종석은 3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피’ 수혈론’에 힘입어 정계에 입문했다. 임종석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서울 성동구에 출마해 이세기 한나라당 4선 의원을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 당시 임종석의 나이는 만 34세, 16대 국회의원 중 최연소였다.

17대 총선에서 재선 고지에 오른 임종석은 승승장구했다. 젊은 나이에도 요직을 두루 거쳤다. 열린우리당 대변인, 통합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 민주통합당 사무총장 등을 맡았다.

문재인 대선캠프에서 중책을 맡았던 한 인사는 “당에서 20년간 근무했지만 임종석 비서실장과 친분이 두텁지는 않았다. 이번 대선에서 처음으로 함께 일해봤다”며 “운동권 출신이라 목소리가 크고 자기주장이 강할 것 같았지만 함께해보니 합리적이면서도 따뜻한 사람이더라”고 전했다. 자유한국당의 한 당직자도 “전대협에 주사파 출신이라 선입견을 가졌던 게 사실”이라며 “젊은 나이에 잘나갔지만 겸손하고 무게가 있더라”며 높은 점수를 줬다.

 

탁월한 조정능력 & 개성공단지원법 제정

 

▎2012년 2월 민주통합당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명숙 대표, 임종석 사무총장, 문성근 최고위원이 총선 전략을 상의하고 있다.




꽉 막힌 남북관계, 특히 폐쇄된 지 1년이 지난 개성공단의 해법을 찾는 데도 ‘임종석 역할론’이 제기된다. 임종석은 국회의원 시절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만 6년을 활동하며 전문가로 성장했다. 청와대 안보실장 등과 호흡을 맞춰 남북관계, 국제관계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지난해 2월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하자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을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입주기업에 사전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입주기업이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개성공단은 남북관계 파국을 막는 안보의 마지막 안전판이었으나 적폐세력들이 분단상황을 악용해 안보를 위협해왔다”며 개성공단의 조속한 재개를 약속했다. 아울러 문 대통령은 개성공단을 지금의 100만 평(약 3300만㎡)에서 2000만 평(약 6600만㎡)으로 확장하겠다고 공약했다.

임종석은 17대 의원이던 2007년 3월 고 김근태 의원 등 여야 의원 50명의 서명을 받아 ‘개성공업지구의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개성공업지구지원법은 공단 입주 기업이 중소기업 구조고도화자금 등 각종 자금을 국내 중소기업에 준하는 수준으로 융자받을 수 있도록 하고, 남북 협력기금의 직접대출도 가능하게 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사실상의 정권인수위원장, 과제는 산더미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없이 새 정부가 출범했다.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문재인 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맡게 된 임종석 역시 기쁨보다 걱정이 앞선다. 청와대 비서실의 리더인 임종석이 정권 성패의 시금석(試金石)이라는 말도 나온다.


우선 비서실장은 각 부처 인사와 업무보고 등을 챙겨야 한다. 청와대 구성원 인사에서부터 내각 구성 등까지 전방위 인사업무에 깊게 관여할 수밖에 없다. 조국 민정수석과 함께 인사 검증작업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국면에서 졸속으로 진행됐던 공직사회 인사도 정상화해야 한다. 대통령권한대행인 황교안 전 국무총리 체제에서 부분적으로 인사가 이뤄지긴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 청와대 비서실이 갖고 있던 권위적 모습에서 탈피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50대 초반에 불과한 임종석에게 중책을 맡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임종석 발탁에는 청와대를 이전 정권 때보다 젊고 역동적이며 탈(脫)권위적 공간으로 만들어달라는 문 대통령의 간절한 바람이 담겼다. 국민도 젊은 비서실장이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내각 위에 군림하는 비서실은 더 이상 용납하기 어렵다.

임종석은 5월 10일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뒤 청와대 춘추관에서 가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대통령을 성실하게 모시되 예스맨이 되지는 않도록 하겠다”며 “국회에서 항상 소통하고 조정하고 타협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국회, 특히 여당과는 더 잘 소통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