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낙타를 볼 수 있는 공간은 오직 동물원 뿐이다. 지난 메르스 사태 이후 낙타는 더욱 만나기 어려운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낙타가 단지 인류를 위협하는 병원균의 원인으로 기억되는 것이 맞는 것일까? 큰 눈망울, 고난한 세월을 이겨낸 훈장과 같은 등 위의 혹.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인간의 동반자가 되어 준 낙타의 진면목을 만나보도록 하자.
오직 새파란 하늘만 안계를 지배했다. 그것은 진실로 너무도 이색적이고 경탄스러운 광경이었다. 미술학도들이 배우는, 직선들로 이루어진 원포인트 퍼스펙티브가 살아있는 광경으로서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광활한 허(虛)를 묵언 속에 노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참선의 경지를 맛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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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월 말리 팀북투에로의 여행 이후로, 나는 낙타라는 동물에 관한 정보와 책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새로운 또 하나의 사막으로 여정을 시작하려고 할 즈음에는 나의 사진작업에 필요한 정보와는 별도로, 그 동물에 관해서 엄청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었다. 낙타의 진화에 관해서는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그 동물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원조동물은 4000만 년 내지 5000만 년 전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했다. 지금도 알래스카에 베링 랜드 브릿지(Bering Land Bridge)라는 지명이 있지만 베링해협은 육로로 연결돼 있어 알래스카와 북동아시아 대륙은 소통돼 있었다.(가장 좁은 구간은 지금도 82㎞ 정도다.)
지금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 살고 있는 단봉낙타는 이동 경로로 볼 때에도 당연히 아시아대륙의 낙타보다 후대에 정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낙타등의 육봉이 쌍봉이 아니고 단봉으로 진화된 것을 드로메다리(Dromedary: 그리스·라틴어원으로 ‘뛴다’의 뜻이 있다)라고 하는데, 이 드르메다리의 해부학적 구조는 수분을 상실하지 않고 오래 담지할 수 있어 덥고 마른 지역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상세한 전문지식은 여기 논의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단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박트리안 낙타(Bactrian camels)라고 부르는 좀 키가 낮은 쌍봉낙타는 중앙아시아에서만 살고 있는데, 이 박트리안 낙타야말로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아프리카· 중동지역의 단봉낙타보다 훨씬 더 원조격의 낙타라는 것이다. ‘박트리안’이라는 이름 자체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박트리아(Bactria: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랴강 사이에 위치)라는 나라 이름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진짜 야생의 낙타, 멸절의 위기에 놓여 있으며, 유전학적으로도 가축화된 박트리안 낙타와는 계통이 다른 야생낙타가, 고비사막과 타크라마칸 사막의 편벽한 지역에 살고 있는데, 이 야생낙타가 바로 쌍봉낙타라는 사실은 쌍봉낙타야 말로 단봉낙타보다 유전적으로 더 조형의 낙타에 가깝다는 추론을 확고하게 만든다.
루어투어시앙쯔의 낙타 그림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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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동방인들의 일반적인 낙타 관념은 쌍봉낙타의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내가 어릴 때 엄마가 20세기 중국문학의 한 대표적인 소설작품을 우리말로 옮겨 출판했는데, 그 소설은 한 순박한 인력거꾼이 군벌의 병영에 끌려갔다가 억울하게 인력거를 찬탈당하고 낙타 세 마리를 끌고 돌아와 인력거를 다시 장만하려는데, 모든 것이 다 뜻대로 되지 않아 결코 좌절하고 마는 리얼리즘의 섬세한 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소설가는 노벨문학상 후보로까지 올랐다가 홍위병에게 비참한 최후를 당하는 기인(旗人) 라오서(老舍, 1899~1966)이고, 그 작품은 <루어투어시앙쯔(駱駝祥子)>이다. 그때 나는 다섯 살이었는데 그림을 잘 그린다고 칭찬받아 그 책의 표지를 그렸다. 그때는 나도 잘 몰랐는데 어김없이 쌍봉의 낙타를 그려놓았다. 내가 그린 것이 박트리안 카멜이었던 것이다. 서울 동숭동의 낙산(駱山)의 모양새도 쌍봉의 이미지와 관련 있다.
야생의 낙타는 지금 1400마리 정도가 현존한다고 하고, 또 200만 정도의 가축화된 박트리안 낙타가 있다고 하는데, 단봉의 드로메다리는 그에 비해 3000만 마리나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단봉낙타가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데 아프리카·중동·아시아대륙의 서쪽, 그리고 오스트랄리아에 분포돼 있다(전체 낙타 개체수의 94%를 차지한다).
중동의 어떤 사람들은 내게 자기 나라에도 쌍봉낙타가 있다고 우기곤 하는데, 그들의 말은 다 거짓말일 뿐이다. 쌍봉의 박트리안 낙타는 그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날 나는 요르단 페트라에서 한 칠칠치 못한 기념품 상인과 다툰 적이 있다. 그 가게주인은 쌍봉의 낙타인형을 요르단의 수제품이라고 우기면서 팔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 싸구려 중국제품이었다. 내가 그것은 중국에서 만든 것이라고 말하자, 그 가게주인이 발끈 성을 내면서 자기 비즈니스를 망치려 한다고, 경찰을 부르겠다고 막 협박하는 것이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반응을 쳐다보면서 나는 웃으며 말했다. “불러! 빨리 불러! 경찰이 온다고 중국제가 요르단제로 둔갑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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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서 낙타의 실존적 의미는 내가 나의 예술 속에서 추구하는 평화라는 테마와 관련이 있다. 낙타는 포유류 소목(偶蹄目, 牛目) 낙타과의 순결한 초식동물로서 자신을 방비하거나 타 포식동물을 공격할 수 있는 아무런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캣과의 동물들처럼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남하고 싸울 생각이 전혀 없다. 평화만을 원해 전쟁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망가는 것 밖에 없었는데, 도망을 가도 또 다른 포식자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면 말짱 헛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포식자들이 살 수 없는 곳, 환경의 조건이 최악이래서 포식자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이 평화로운 동물은 자신의 몸을 그러한 최악의 환경에 적응시키는 방향으로 진화시켰다. 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생겨난 낙타의 원조 중 한 부류는 남으로 이동했는데 이들은 고원지대로 올라가면서 라마(Lama)와 알파카(Alpaca)가 됐다. 북미대륙의 원조는 1만~1만2000년 전의 빙하기 최종시기에 멸절됐다. 그리고 베링육교를 건너 서로서로 이동한 부류가 낙타가 됐다. 사막에는 그들처럼 거대한 포유류가 살 길이 없다. 그들은 마침내 최상의 생존방식을 선택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평화의 승리자가 됐다. 사막에는 그들을 괴롭히는 사자 같은 포식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인간이 등장했다. 인간이라는 포유류는 지능이 발달하면서 이 지구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했다. 그러나 뜨겁고 건조한 사막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인간은 자기와는 달리 그 환경에 몸을 적응시킨 이 평화의 동물을 길들임으로써 그들의 삶의 영역을 사막의 정적에까지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작전은 성공을 거뒀다. 인간은 무리를 지어 가축화된 낙타가 필요로 하는 물과 초목지대를 찾으며 유랑했고, 이 낙타는 우리 인간에게 영양과 교통과 거처를 제공했다. 아마도 낙타가 그들의 동반자로서 우리 인간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기를 지금도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버려진 사막에서 평화를 찾는 그 놀라운 지혜를! 지금은 사막의 커뮤니티가 종교, 권력, 정치, 자원 이권 등등의 문명의 요소로 인하여 오염된 측면이 있지만, 낙타와 인간이 사막에서 공생하는 최초의 순결한 삶의 방식은 평화 그 자체였을 것이다.
진실로 “만난다”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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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상을 보러 갔다 오는 길에 고 선생님과 그의 조수 바이갈마, 그리고 몽골인 운전수와 함께 교외에 있는 한국음식점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나는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나무 없는 언덕들, 완만하게 넘실거리는 그 언덕들의 기복이 자아내는 색다른 광경들을 아직 나의 의식 속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 선생님은 나 혼자 사막을 가는 솔로 트립에 관한 심각한 걱정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고 선생님께 내가 정확하게 왜 몽골을 가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다음날 고비사막으로 9일간의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말하자 충격에 휩싸이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앉아서 매운탕에 들어있는 낙지를 후루룩 소리 내며 마시고 있는데, 씹히는 질감은 얼었다가 녹은 놈이 분명했다. 그런데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은 내가 사막으로 혼자 가는 것을 말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운전사와 조수, 두 몽골사람들도 내 플랜에 반대를 표했다. 날씨가 나쁘다, 물이 나쁘다, 사람들이 사기성이 농후하다 등등을 말하면서.
고 선생님은 혼자서 결단을 내린 듯했다. 요번에는 자기와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달라는 것이다. 다음에 팀을 데리고 와서 사막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한국 사람들은 더 이상 이 나라에서 호감을 받지 못해. 몇몇 나쁜 놈들이 물을 흐려놓았지. 몽골사람들은 더이상 한국인들을 좋아하지 않아. 미루가 가고자 하는 곳들을 혼자 갈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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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들은 몽골리아에는 도둑놈들과 사기꾼들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을 내게 준다. 고 선생님이 아버지의 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는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고개만 끄덕이다 보니 웬일인지 나는 목이 조이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독과 불안과 불만이 섞인 강렬한 감정이 나를 엄습했다. 그것은 내가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실로 “만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느라고 애를 써야만 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반문했다. “그들이 과연 내가 왜 사막에 가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이 과연 내가 왜 내 계획을 실천에 옮겨야만 하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나의 감정적 반응은 과도한 것일 수도 있다. 남남이려니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게 내가 우기고 있는 순간에도 나 자신 왜 그토록 어려운 여행을 감내해야만 하는지, 정확히 그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날 오후 늦게 나는 나 자신의 가이드, 티제이를 만났다. 티제이는 도시형 엘리트 여인이었는데 외국인들을 위해 여행을 조직하는 데 능수능란한 면모를 보였다. 그녀는 내가 기대했던 바로 그러한 인간의 전형이었다. 스마트했고 단호했으나, 또한 순정적으로 따뜻했고 주도면밀했다. 티제이와 나는 큰 야외시장으로 갔다. 고 선생님은 이곳에는 소매치기가 우글거리니 절대 가지 말라고 했던 곳이다. 나는 티제이와 함께 몽골의 전통의상을 사려고 했다. 나는 우선 무릎 밑까지 오는 펠트로 라이닝을 댄 가죽장화를 하나 샀다.
이 장화는 강력한 고무바닥으로 돼 있었는데, 정말 나중에 알았지만 끝없이 날카로운 돌이 펼쳐진 고비사막의 지면에서는 이 장화가 없었으면 기동성이 전혀 없을 뻔 했다. 전통 의상에 관해서는 결국 나는 티제이의 겨울 데일(deel)을 빌려 입기로 했다. 데일은 몽골의 전통의상인데 모포 느낌의 둘러싸는 가운 같은 것이다. 티제이는 이 데일의 허리를 어떻게 실크천으로 감아 매는지를 가르쳐줬고, 내 머리를 양 옆으로 땋아 늘어뜨렸다. 그리고 티제이는 나를 한 몽골식당으로 데려갔는데, 그 식당에서는 양의 머리 하나 전체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먹을 것이 정말 많았지만 나는 양고기를 냄새 때문에 그렇게 즐기지 않는 편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허약한 동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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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심상치 않은 저녁을 먹은 후에, 나는 내가 사막에서 만날 유목민들에게 전할 나의 메시지를 몽골말로 번역해달라고 티제이에게 요구했다. 나는 내 여행의 목적을 설명하는 메시지들을 나열했다. 그랬더니 티제이는 그 위에다가 자기 나름대로 그 사람들을 감동시킬 언어들을 첨가했다. 이 사진작가 여인은 자연환경의 아름다움을 깊게 사랑하는 사람이며, 몽골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는 휴머니스트임을 천명해놓았다. 그녀는 사막의 유목민들이야말로 선량하고 진실한 사람들이라고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확신을 주었다. 티제이의 확신은 고 선생의 경고들을 다 잊어버리게 만들었고, 나는 나의 견고한 신념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허약한 동물인가!
2012년 4월 16일 오후, 바이갈마는 나를 울란바토르 공항에 떨어뜨려 놓았다. 특수한 날씨 조건 때문에 입은 나의 밝은 빨강 하이킹 재킷은 내가 탄 작은 비행기 속에서 나를 유별나게 이질적인 외국인처럼 만들었다. 주머니 속에는 고 선생이 나에게 준 설사약이 들어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웃으면서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나는 타인과 정담을 나눌 분위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황급히 ‘코리아’라고만 말하고 에어플레인 매거진에 머리를 파묻었다. 매거진에 실린 사진들이 고비사막의 정취를 담고 있어서 내가 원주민들과 소통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그 매거진을 가지고 가기로 했다.
내가 비행기로부터 내렸을 때, 매우 거대한 몸집의 중년 몽골남자가 4륜구동 렉서스 중형차를 가지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하다’고 말한 것은, 그가 정말 내가 인터넷에서 보곤 했던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몽골 출신의 스모꾼 역사(力士)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차에 많은 생수병과 세 병의 징기스 보드카를 운전수의 추천대로 유목민에게 줄 선물로서 비축해 놓았다. 그리고 또 다른 선물로서 캔디, 치약, 쌀, 간장, 식물성 식용유를 차에 싣고 우리는 달란자드가드를 떠났다. 달란자드가드는 고비사막 지역의 지역수도라 말할 수 있는데 인구가 2만 명도 채 되지 않는다.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벌써 운전수와 소통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내가 ‘잉글리시’ 하고 물을 때마다 그는 머리를 휘저었다. 나는 계속해서 그와 소통해보려고 노력해봤지만 결국 소통의 방편이 없었다. 대화를 시도할 때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낄낄거리며 웃고 그 장면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운전사의 셀룰러폰밖에 없었다. 그 셀폰을 통해 티제이에게 전화를 걸고 통역을 요구했다. 그것도 전화가 터질 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수신이 안될 때가 태반이었다.
티제이는 그녀가 소개한 그 운전사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전화상으로 전 여정을 그와 같이 해야 할 텐데 그 운전사가 괜찮겠냐고 계속 물었다. 나는 명확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별다른 옵션이 없었다. 조금 지나다 보니, 그는 대체적으로 성격이 좋은 사람 같았다. 내가 불쑥 카메라를 꺼내 창 밖의 무엇인가를 찍으려고 하면, 속도를 늦추든가 스톱을 해주든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만 해도 나로서는 큰 위안이었다. 보통의 경우 달리는 차에 불쑥 서라고 하면 신경질을 팍팍 내는 것이 운전수의 생리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야 할 상황은 불현듯 닥친다. 사진은 타이밍의 예술이다. 그러나 차는 연속적으로 달리기를 좋아한다. 달리는 차에 매번 스톱하라고 외치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다.
사하라 사막으로부터 맨해튼으로 되돌아온 나는 멜랑콜리아에 계속 빠져들어 갔다. 정서적 불안이나 짜증이 날 괴롭혔다. 번잡한 도시의 광경은 결국은 지루할 뿐이다. 아름다운 옛 건물이나 흉측한 회색의 마천루나 모두 위압적일 뿐이다. 인간은 결국 자연을 떠나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도 센트럴파크와 같이 만들어진 자연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연,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빈 자연이다. 도시가 왜 존재해야만 하는지, 왜 인간이 도시에서 살아야만 하는지, 왜 그러한 삶의 방식을 문명이라고 예찬해야만 하는지, 나는 계속 물었다. 사랑하던 남자와 헤어진 뒤탈 때문일까? 내가 일종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것일까? 그게 무엇이든 좋다! 고비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가자마자, 도시 삶의 번쇄한 잡념, 그리고 근심들이 일시에 해체돼버렸다.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