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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고려와 몽골제국은 원래 ‘한 핏줄’이었다?

세계를 정복하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창시한 칭기즈칸... 세계 정복자 칭기즈칸의 뿌리가 한민족에 있다고 한다.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과 고려사이에 있었던 숨은 역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칭기즈칸과 몽골인들은 13세기 세계를 정복했다. 몽골인들의 말발굽이 닿는 곳은 모두 그들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지난 호(號)들에서 우리는 발해 제2왕가 시조 대야발, 금나라 시조인 금행, 칭기즈칸(成吉思汗)의 10대 선조 알란 고와 등이 모두 한 가문의 선조와 후예인 점을 봤다. 또 칭기즈칸이 부족들을 통일하고, 이를 몽골(몰골·말갈, 말 키우는 나라)이라고 한 것도 봤다. 그 뒤에 서방 원정을 가서 3대에 걸친 세계 정복의 길을 시작한 것도 봤다.


1162년에 태어난 위대한 칸 ‘진국왕(震國王)’ 칭기즈칸은 <몽골비사>에 따르면 재위 22년인 1227년 8월 하늘로 돌아갔다. 이 해는 개봉(開封)을 중심으로 중원의 절반을 통치하던 금나라 애종 4년인 때다. 또 금나라 왕가의 고향이던 고려에서는 고종 재위 14년이 되던 해였다.


그로부터 12년 전 칭기즈칸과 그의 선조의 고향 고려는 처음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다른 나라와 많이 달랐다. 고려와 몽골은 칭기즈칸의 세계 정복전의 길위에서 형제국이 된 유일한 두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 계기는 몽골과 고려 사이에 자리 잡은, 거란 왕조의 남은 씨앗 금산(金山) 태자 일당의 도발이었다. 만주에 대요수국(大遼收國)의 왕()이라 칭한 그들은 1215년 몽골에 쫓겨 고려의 강동성(평안남도)으로 쳐들어왔다. 거란 잔당은 이내 충북 제천까지 쳐들어와 고려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들을 추격하던 몽골은 고려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안마당에 불이 붙은 고려는 당연히 협조했다. 그 결과 <고려사>에서 보듯이 양국 군대는 금산태자 일당 수십만 명을 격퇴시켰다. 몽골 원수 합진(哈眞)과 고려 장군 김취려를 비롯해 양국은 골세(만년)에 이르는 영원한 형제국이 되기로 맹세한다. 칭기즈칸의 역사상 형제국을 논의한 경우는 이것이 유일한 예다.

 

 

몽골인들은 체구는 크지 않았지만 용맹과 담력이 남달랐다.


형제국이 된 지 8년 후 몽골 사신 착고여(着古歟)가 살해됐다. 우리 국사책에서는 몽골이 이 사건을 단순히 고려 침략의 명분으로 활용했다고 기술한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명초 송렴의 <원사(元史)> ‘외이열전(外夷列傳)’과 조선시대 한치윤이 엮은 <해동역사(海東繹史)> ‘14에 따르면 고려는 형제국이 되자고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몽골 장군 찰라를 살해했다. 이어 몇 년 뒤에는 착고여를 압록강에서 암살했다.

 

그 후 고려는 이런 행위를 책망하러 온 몽골 칙사에게 활을 겨눠 쫓아내는 등 다섯 차례 도발 행위를 했다. 그 결과 동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유럽의 상당 부분을 정복한 세계 최강국 몽골은 고려 정벌에 나선다.

 

공녀를 통한 ‘겹사돈’ 관계


▎13세기 세계를 정복했을 당시 몽골 기병의 재현 모습.

몽골과 고려는 결국 전쟁에 휘말렸다. 이 전쟁은 양국 모두 고구려-발해를 계승한 나라란 점에서 ‘고려 반도의 본토고려와 세계 정복자 몽골 고려 형제간의 다툼’이라고 표현해도 큰 무리가 아니다. 비록 전쟁의 원인은 다르지만, 지난 세기 남북한 간 일어난 싸움에 비유할 수 있다.

1231년 12월 몽골군이 고려로 쳐들어와 수도 개성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고려의 제23대 왕 고종(1192~1259, 재위 1213~1259년)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고, 이후 공식적으로 29년 동안 항쟁한다. 그 기간 두 나라는 지루한 전쟁과 짧기만 한 강화(講和)를 되풀이했다.

전쟁 도중 두 나라의 관계는 특이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약소국의 설움이라며 개탄하는 ‘고려공녀’도 사실은 몽골 황가(皇家)가 먼저 내준 ‘몽골공녀’가 근간이다.


오직 하나뿐인 세계 정복자

 

<바부르나마> 삽화 속의 후마윤

 

<몽골비사>는 그가 태어났을 무렵에 열국이 갈라지고, 부족들이 끊임없는 약탈과 복수전쟁에 휘말리고 있었다고 한다. 개인과 집단 간에 폭력이 법 대신 난무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시대의 어두움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었다.

 

미국의 잭 웨더퍼드는 자신의 저서에서 칭기즈칸을 현대 세계를 창출한 이로 부른다. “칭기즈칸의 제국은 그 자신 주변에 있는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혼합해 하나의 새로운 세계 질서(a new world order)로 만들어냈다. () 1227년 그가 죽을 때쯤 그는 이 문명들을 외교와 교역의 길로 연결시켜 내었는데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끊기지 않고 남아 있다. () 그는 국제법을 만들어 내었고, 모든 백성 위에 군림하는 영원한 푸른 하늘의 궁극적인 최상의 법을 인정했다. () 몽골인들은 정복자로서뿐 아니라 문명의 전례 없는 문화적 전달자로서 전 지구를 휩쓸었다고 한다.

 

고구려-발해 왕가의 피와 DNA를 가진 세계 정복자 칭기즈칸, 영락황제의 명나라 왕조, 백두산 선녀의 아들 포고리 옹순(고구려 영웅)6대손 청태조 누르하치 등 이들은 놀랍게도 모두 한민족의 피를 타고난 사람들이다.

 

중국 대륙은 물론, 거의 전 세계에서 나란히 존재했던 몽골제국과 한반도에 존재한 고려는 세계 제국 몽골 고려와 본토고려 두 나라의 관계다. 지나 대륙에 존재했던 명과 청나라는 서조선과 본토조선라는 이야기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코리아는 중국의 부분이었다(Korea actually used to be part of China)”는 역사적 진실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중국이야말로 코리아의 일부인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졌다. 역사의 미래가 그대들 눈앞에 펼쳐지기를 기원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