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카메라는 솔직하다. 디지털 사진처럼 이리저리 조작할 수 없다. 세월이 지나면 컴퓨터 사진폴더보다 서랍 속 사진첩에 더 정감이 가는 이유다. 이런 ‘아날로그 감성’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필름사진 촬영은 물론, 현상과 인화까지 배우려는 사람들이 강의실과 사진관을 찾는다.
▎ 좀 더 깊이 있는 사진을 하기 위해 암실작업을 배우고 있는 이재명 씨가 인화를 위해 홍대앞 상상마당 암실에서 흑백필름을 꺼내고 있다. 이씨는 “암실 작업을 하고 있으면 건강한 슬로푸드를 먹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한동안 낡은 유물로만 여겨지던 ‘아날로그 사진’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아날로그 사진은 2000년 초반 등장한 디지털 사진의 편의성과 저비용에 밀려났다. 1999년 미국의 필름 생산량은 8억 통에 달했지만 2011년에는 2000만 통으로 줄었다. 결국 사진업계의 공룡 코닥은 2012년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하지만 최근 20~30대 젊은층이 필름사진에 관심을 보이면서 필름카메라도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세상을 천천히 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대상에 대해 좀 더 신중해졌다고 할까요?”
▎ 홍대앞 책거리로 출사를 나온 아날로그 사진 수업 수강생들이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고 있다.
홍대앞 책거리에서 만난 허진(26·여)씨의 말이다. 그는 요즘 아날로그 사진 수업을 듣고 있다. 허씨는 KT&G가 운영하는 홍대앞 ‘상상마당’에서 사진을 배운다. 이곳에서는 6주 과정의 흑백사진 수업이 열린다.
허씨를 포함해 이날 출사수업에 참여한 6명의 수강생은 모두 20대 초반이다. 수강생들은 필름이 갖고 있는 색감, 클래식한 카메라의 디자인과 추억을 끄집어내주는 특유의 감성에 마음이 끌렸다고 입을 모은다. 수업을 맡은 이정현 강사는 “올해부터 디지털 사진 수업을 없애고 아날로그 사진 수업만 하고 있다”며 “수강 인원이 줄어들까 걱정했지만 아날로그 사진에 관심 있는 젊은층의 참여가 끊이질 않는다”고 말했다.
코닥의 베스트셀러 필름 판매도 5년 만에 부활
아날로그 사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필름 시장도 되살아난다. 필름카메라 판매량이 디지털카메라보다 많았던 마지막 해인 2001년과 비교해보면 2017년 현재 필름 가격은 100%가량 올랐다. 그러나 사진필름 판매량은 10% 정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후지필름은 올 들어 7월까지 일회용 필름카메라 ‘퀵스냅’의 판매량이 지난해 동기 대비 200% 이상 늘었다고 밝혔다.
▎ 카메라에 필름을 장착하는 것도 아날로그 사진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겐 몇 번을 시도해봐야 하는 새로운 경험이다.
‘아날로그 사진 부흥 조짐’을 타고 사진용품업체도 변화를 꾀한다. 코닥은 베스트셀러 ‘엑타크롬 필름’을 올해 4분기부터 다시 생산한다고 밝혔다. 5년 만의 복귀다. 독일의 카메라 제조사인 롤라이도 지난 7월 신제품 필름을 출시했다. 사진·영상장비 판매업체 세기P&C 관계자는 “최근 많은 젊은이가 장롱 속에 있던 카메라를 들고 나와 아직도 사용할 수 있느냐고 문의한다”며 “11월 중순부터 흑백 1회용 카메라를 판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촬영에 만족하지 않고 필름 현상까지 배우려는 사람도 증가한다. 필름 현상이 이뤄지는 암실작업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과정도 복잡해 작가나 마니아의 전유물로 여겨져왔다. 홍대앞 상상마당에서 암실작업을 가르치는 한 강사는 “과거에는 필름카메라에 익숙한 40~50대 분들이 주요 고객이었지만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려졌다”며 “지금 하고 있는 흑백필름 현상 수업을 다음 분기부터 두 개 반으로 늘려 운영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 필름 전문점을 찾은 한 고객이 1회용 카메라를 집어 들고 있다.(왼) / 필름 가격이 매년 꾸준히 오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층을 중심으로 소비가 늘고 있다.
아예 사진관 전체를 ‘아날로그 감성’으로 채워 넣은 곳도 늘었다. 원목 등을 활용해 고풍스러운 느낌을 연출한 데다 한 번 촬영에 30분이 걸리는 ‘습판사진’이 되레 인기를 끈다. 습판사진은 1850년대 등장해 인물사진을 처음으로 유행시켰던 기술이다. 철판에 감광 유제(乳劑)를 바른 다음 유제가 마르기 전에 판을 카메라에 꽂아 촬영하고 바로 현상하는 방식이다.
“손대지 않은 아날로그 사진엔 추억 그대로”
▎ 등대사진관 이창주 실장이 습판사진 촬영을 위해 대형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서울 용산구에 자리 잡은 ‘등대사진관’은 습판기술을 재현한 곳으로 유명하다. 등대사진관 이창주 실장은 습판사진의 매력에 대해 “한 장을 찍고 인화하는 시간이 30분 정도 소요되지만 그래서 이 사진이 사람들에게 더 소중한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철판에 남은 사진은 100년 이상 보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때마침 사진관을 찾은 나정원(32)씨는 “포토샵으로 잔뜩 수정된 인물사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촌스러운 느낌”이라며 “손대지 않은 아날로그 사진은 시간이 지나도 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 습판 사진 촬영에 앞서 이규열 실장이 철판에 감광유제를 바르고 있다.(왼) / 촬영을 마친 뒤 인화된 습판사진을 이 실장이 들어 보이고 있다.
디지털 공간에서도 아날로그 사진기법을 활용한 어플리케이션 ‘구닥’의 인기가 높다. ‘구닥다리 카메라’라는 뜻의 구닥은 1회용 필름카메라를 모티브로 했다. 찍은 사진을 보려면 3일을 기다려야 하지만 필름의 독특한 색감이 묻어나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홍콩·싱가포르 등 9개국에서 앱스토어 다운로드 1위를 기록했다. 구닥의 조경민 마케터는 “과거 사진관에서 필름을 인화하면 딱 3일이 걸렸다”며 “그런 따뜻한 감성을 상기시키고 싶었던 게 주효했다”고 밝혔다.
월간중앙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