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10월 24일 JTBC가 최순실씨의 테블릿 PC를 공개하자 그동안 의혹으로만 제기되던 최씨의 국정농단 실체가 드러났다. 테블릿 PC 보도는 대통령 탄핵의 시발점이 됐다.
일본의 대표 지식인 중 한 명이자 유명 작가인 우치다 다쓰루 교수는 그의 책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서 반지성주의의 대표적 형태인 ‘음모론’의 작동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음모론은 의외로 정보가 부족한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보가 넘치는 탓에, 그리고 그것들을 잘못 취사선택해 신념체계를 구성하는 데서 음모론이 탄생한다”
그의 책에서는 또 반지성주의의 특징도 언급하고 있다. 반지성주의는 기본적으로 학력과 상관이 없다고 지적한다. 지식의 많고 적음과도 관계없다. 고학력자, 아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서도 종종 반지성주의가 포착된다는 것이다. 우치다 교수는 “반지성주의를 움직이는 힘은 단순한 게으름이나 무지가 아니라 대개 ‘외곬의 지적 정열’”이라고도 했다. 자신의 생각과 신념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진 이들이 대개 반지성주의의 대표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말이 곧 정답이며 절대적 진리라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타인의 판단이나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데이터조차도 별 의미가 없다.
대중사회심리학자인 이경석 박사(마음연구소 소장)는 “지난 1년간 우리 사회에서 제기된 가장 대표적인 반지성주의적 음모론은 바로 ‘최순실 테블릿 PC(이하 테블릿 PC) 조작설’”이라고 말한다. 테블릿 PC는 최씨의 개인비리가 국정농단 사건으로 확대되는 단초가 됐다. 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방아쇠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작설을 믿는 이들은 이런 테블릿 PC가 실제로는 최순실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을 반대하는 좌파 세력이 만들어낸 조작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도 한다. 이들은 조작의 주체로 언론(JTBC)과 검찰을 지목한다.
이경석 박사는 “테블릿 PC ‘음모론’을 확대 재생산해 퍼뜨리는 이들의 구성은 일부 국회의원부터 언론, 시민단체 그리고 일반 시민 등으로 나이나 직업·학력 수준과 상관없으며 특정 집단에 한정돼 있지도 않다”며 “우치다 교수도 지적했듯이 이들이 확산시키는 ‘음모론’은 검증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정보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한 뒤 이를 신념화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24일 [JTBC]가 최씨의 테블릿 PC를 공개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각종 문서와 사진자료 등은 박 대통령과 최씨 관계의 실체를 보여줬다. 뉴스를 보던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정국은 요동쳤다. 의혹으로만 돌던 최씨의 국정농단의 단면이 세상에 처음으로 드러난 것이다. 2014년 12월 공개돼 정국에 큰 파장을 몰고온 소위 ‘십상시 문건’ 의 작성자 박관천 전 경정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권력서열 1순위는 최순실, 두 번째는 정윤회 그리고 세 번째가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말해 세간의 이목을 끈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박 전 경정이 한 이 말의 구체적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청와대 공직 기강비서관실에서 근무하던 박 전 경정이 대통령의 측근 그룹들 사이에서 도는 첩보 수준의 이야기를 툭 던진 정도로 받아들였다. 검찰 역시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테블릿 PC가 공개되자 비로소 박 전 경정의 이 말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사람들은 깨닫게 됐다.
‘테블릿 PC 조작설’은 반지성주의 산물
테블릿 PC는 박 대통령 취임식 행사 내용, 통일 대박을 제시하며 대북 구상을 밝힌 독일 드레스덴 선언을 포함한 각종 연설문, 국무회의에 앞서 미리 정리된 대통령 모두 발언, 언론에도 공개되지 않은 대통령의 휴가 때 사진, 청와대 비서진 교체 관련 내용 등 권력의 가장 깊숙한 내부에 접근 가능한 이가 아니면 입수할 수 없는 각종 자료들을 담고 있다. 공식 참모도 아닌 최씨가 장막 뒤에서 대통령의 그림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테블릿 PC가 담고 있는 진실은 이번 국정농단 사건 전체에 비춰봤을 때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와 관련해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테블릿 PC가 갖고 있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테블릿 PC에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테블릿 PC가 양지로 나옴으로써 관련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마중물 역할을 했다.”
국정농단 사건 전개 과정을 되짚어보면 “관련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노 의원의 언급은 정확한 지적이라는 평가다. 테블릿 PC가 공개된 바로 다음날 언론과 정치권의 각종 의혹 제기에도 꿈쩍하지 않던 박 전 대통령이 ‘대국민사과담화’를 발표했다. 또 정호선 전 비서관도 최씨에게 기밀 문서들을 수시로 e메일로 전송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테블릿 PC는 현장을 뛰며 당시 사건을 추적 보도했던 기자들 입장에서도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는 평가다. 한국일보 사회부에서 1년째 국정농단 사건을 취재하고 있는 한 기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미르·K스포츠 재단 의혹이 처음 흘러나왔던 2016년 7월만 해도 고위 관료 한두 명이 기업을 동원해 측근 몇몇과 이권에 개입한 사건 정도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재단의 막후에 최순실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최씨가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최태민씨의 딸이자 한때 대통령 최측근 인사였던 정윤회씨의 부인이라는 점에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맞다. 하지만 최씨와 대통령과의 관계를 정확히 밝혀내는 것은 취재 영역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씨가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는 장막 뒤의 비선 실세였고 대통령의 사생활 영역을 넘어 수시로 국정 운영에까지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얘기 아니었나. 설사 몇몇 정치권 인사의 전언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의혹 제기나 추측보도의 한계를 뛰어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이를 보도하기 위해서는 뒷받침할 물증·근거가 필요하지 않겠나. 이런 것이 없다면 권력의 역공에 언론사도 버티기가 쉽지 않다. 2014년 <세계일보>의 ‘십상시 문건’ 보도에서 다들 경험하지 않았나. 이런 점에서 볼 때 테블릿 PC의 등장은 현장 기자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추적할 수 있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신씨 “테블릿 PC는 내 것” 주장했지만…
▎ 10월 23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 출석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테블릿 PC와 관련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윤 지검장은 “테블릿 PC의 증거 능력이 의심된다”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지적에 “최순실 재판에서 적법하게 증거로 채택됐다”고 반박했다.
최근에는 “이 테블릿 PC를 최씨가 아닌 내가 사용했다”고 자처한 이도 나타났다. 2012년 박 전 대통령 대선 캠프에서 SNS 담당으로 일한 신혜원씨의 주장이다. 신씨의 이 주장은 일부 방송과 신문, 시사매체 등을 통해 ‘양심선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신씨에게 테블릿 PC를 건넨 것으로 알려진 김휘종 전 청와대 행정관은 “신 씨가 사용하던 테블릿 PC는 [JTBC]가 보도한 것과는 다르다”고 부인했다. 김한수 전 행정관도 검찰 조사 과정에서 “신 씨가 주장하는 테블릿 PC는 내가 최순실씨에게 건네준 것과 다르다. 대선 캠프에서 쓰던 것 중 하나로 보인다”고 진술했다. 또 신씨는 2012년 10월부터 12월까지 테블릿 PC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는데 [JTBC]가 확보한 테블릿 PC에 담긴 내용물은 그 이후에 저장된 것들이 수두룩하다. 신씨는 이런 부분을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테블릿 PC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감정 절차에 들어간 상태다. 최씨 측이 테블릿 PC의 증거능력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자 재판부가 감정을 의뢰한 것이다. 감정 결과 “조작은 없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면 그때는 ‘음모론’이 사라질까.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지켜보겠다”면서도 “검찰의 포렌식 결과와 다르게 나올 가능성은 없다”고 자신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테블릿 PC를 조작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설혹 국과수가 ‘테블릿 PC’에 어떤 조작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더라도 승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들은 살아있는 권력의 눈치를 보는 국가 기관이 검증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해 발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조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며 테블릿 PC 음모론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은 48년 전 일이다. 테블릿 PC 조작설은 언제까지 계속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