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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문재인 대통령은 왜 DJ의 남자 '이낙연'을 선택했을까?

서울대 법대 출신인 그는 동아일보 논설위원, 4선 국회의원, 민주당 대변인, 국회 농림수산식품 위원회 위원장, 민주당 원내대표, 전남도지사 등 화려한 정치경력을 자랑한다. 국회의원 4번과 전남지사까지 5번의 선거에서 단 한 번도 고배를 마신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 인사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5월 12일 오전 전남도청 왕인실(王仁室)에서 이 국무총리후보자의 전남지사 퇴임식이 열렸다. 이 후보자는 국무총리직 수행을 위해 전남을 떠나는 자리에서 잠시 목이 메었다.


그는 퇴임사에서 “제가 어디에 있든, 전남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돕겠습니다”를 읽다, ‘전남’ 앞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 한동안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이 모습에 참석자 일부는 낮게 소리 내어 흐느꼈다.

왜 울음이 나왔을까. 전남도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고향을 떠나야 하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이 후보자는 2014년 7월 낙후된 고향 전남을 “청년이 돌아오는 땅으로 만들겠다”며 4년 임기의 전남지사직을 시작했다.

퇴임식을 마치고 페이스북에 “‘어머니’ 얘기만 하려 해도 눈물이 나오는 것처럼, ‘전남’ 생각만 해도 목이 멥니다”라고 적은 것은 이 후보자의 당시 심정을 전해준다.

그에게 전남은 곧 어머니였다. 낳아주고, 길러준 그리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가야 할 길을 알려준 나침반이었다. 나라의 부름을 받았지만 전남지사직을 떠난다는 건, 어찌 보면 홀로 계신 어머니와 이별해야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지름길을 모르겠거든 큰길로 가라”

 

이 후보자는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성장했다. 위로 두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다. 가난했지만 어머니가 농사일과 채소 장사를 하며 이 후보자를 뒷바라지한 덕분에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이 후보자는 영광 삼덕초-광주북중-광주제일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9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21년간 재직했다.

그는 정치부 기자 시절 동교동계를 담당하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다. 김 전 대통령이 1987년 6·29 선언으로 사면복권되자 밀착취재를 담당했다. ‘최대한 가까이 붙으라’는 회사의 지시에 24시간 함께했다. 심지어 김 전 대통령이 차에 오르기도 전에 이 후보자가 먼저 타 있곤 했다.

김 전 대통령은 DJ-YS 후보단일화 실패 배경, 대선 패배 예상 등 차 안에서 모든 얘기를 해줬다. 그만큼 이 후보자를 신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후보자의 팩트 중심 보도와 분석력을 높이 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1989년부터 총선 출마를 권유했다. 이 후보자는 계속 고사하다 2000년 16대 총선에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출마해 당선됐고 이후 세 차례 더 배지를 달았다.

대변인으로서 명성은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사에서 잘 나타난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을 앞두고 취임사 준비위원회에서 만든 취임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취임식을 이틀 앞두고 당선인 대변인이었던 이 후보자에게 취임사를 손보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후보자가 쓴 취임사를 극찬하며 토씨 하나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후보자의 문장력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02년 민주당 선대위 대변인 시절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는 당내 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소속 의원들을 향한 논평은 지금도 인용되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파고든 메시지란 평가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 당선인 시절 대변인을 맡았지만 친문(친문재인)은 아니다. 2002년 대선 직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분당할 때 이 후보자는 민주당에 남았다. 이후 친노(친노무현) 인사들과 여러 번 정치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일 잘하는 국회의원, 일 잘하는 도백(道伯)

 

이낙연 전남지사가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들녘에서 벼를 수확하고 있다. / 사진제공·전남도

 

이 후보자는 지일(知日)파 정치인이다. 동아일보 기자 시절 도쿄특파원을 지냈고 국회 한일의원연맹 수석부회장이었다. 이 후보자가 총리로 지명되자 일본 언론이 “지일파 인사가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면서 환영했다. 위안부 문제로 꼬여 있는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기대감의 표시였다.

그는 정치권 안팎에서 자신과 주변의 관리에 철저하다는 평을 듣는다.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 직후 어깨 탈골 수술에 따른 아들 병역 면제가 불거지자 ‘아들을 군대 보내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공개한 게 대표적인 예다. 아들 결혼식 청첩장과 정치후원금 안내장 등 지역주민들에게 부담이 될 만한 행위도 자제했다. 아들 결혼식을 뒤늦게 접한 가까운 친구들이 “아무리 그래도 우리한테까지 이럴 수 있느냐”며 서운함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 후보자가 전남지사에 취임하자 공직사회 반응은 교차했다. 일 욕심 많은 사람이 도백을 맡으니 전남이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완벽을 추구하는 업무 스타일로 공직사회가 경직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왔다.

현장 중시는 전남지사 재임 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전남을 속속 누빈 경험을 바탕으로 준비된 도지사의 면모를 과시했다. 브랜드 시책으로 제시한 ‘가고 싶은 섬’과 ‘숲 속의 전남’은 전남의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 관광자원화 하면서 실제 거주하는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00원 택시’는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 100원 택시는 오지에 사는 전남 주민들이 택시를 부르면 그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100원을 받고 택시를 운행한 뒤 차액을 자치단체에서 지불하는 제도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운행돼 농어촌 교통복지의 모범사례가 됐다.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포함되기도 했다.

일자리 창출 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 고용노동부로부터 지난해 ‘일자리종합대상’을 수상했다. 다른 시도보다 산업적으로 뒤처져 있지만 일자리 창출을 도정 최우선 순위에 두고 매진한 결과였다. 문 대통령의 취임 첫날 일자리위원회 설치 지시도 같은 맥락이다.

 

“이 주사는 그만, 통 큰 리더십 발휘해달라”

2015년 당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석한 이낙연 전남지사. 왼쪽부터 이 지사, 윤장현 광주시장, 이시종 충북지사(얼굴 옆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박지원 의원, 우윤근 원내대표.

 

이 후보자는 꼼꼼하고 세심한 업무 스타일 때문에 전남도 공무원들 사이에서 ‘이 주사’로 불린다. ‘6급 공무원 같다’는 의미다. 국무총리로 임명되면 장관들이 시달릴 것이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후보자가 전남지사로 취임하던 3년 전에도 공직사회 일각에서 같은 전망이 나왔다.

그는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전남지사 시절 그는 기자 출신답게 보도자료 문구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썼다. 자신의 발언이 조금이라도 본의와 다르게 표현되면 팩트에 충실하게 써달라고 요구했다. F1 대회의 지속 여부와 관련한 전남도의 원칙에 대한 일부 언론 보도에 자신의 코멘트가 ‘재정 최소화’로 나가자 ‘재정부담 최소화’라고 바로잡아 달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도정이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보도자료도 직접 챙겼다.

깐깐한 업무 스타일로 공직자들을 움츠리게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전남도 공무원들이 지사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을 꺼린다는 말이 들렸다. 칭찬보다는 지적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이 후보자의 좌우명인 ‘근청원견(近聽遠見·가까이 듣고 멀리 본다)’을 빗대 ‘지나치게 가까이 듣고 가깝게 본다’는 볼멘소리까지 있었다. 이런 까닭에 국무총리 후보 지명 소식이 전해지자 전남도청 안팎에서는 ‘통 큰 리더십’이 요구됐다.

 

▒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는 ‘명재상’ 기대

 

이낙연 새정치민주연합 전남지사 후보가 2014년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당선이 유력시되자 부인 김숙희 씨와 함께 기뻐하고 있다.


 서민을 향한 행보는 어린 시절 체득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7남매의 장남으로 성장한 그는 가난한 가정 형편에도 다른 형제들과 달리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광주와 서울에서 유학했다. 부모가 집안 살림을 사실상 유학비에 집중했기에 가능했다. 이 후보자는 동생들과 집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다. 동생을 비롯한 가족을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도 커졌다. 대학 재학 중 목표했던 고시 합격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군에 입대하고, 제대 후에는 고시 공부를 이어가는 대신 곧장 직장을 잡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이 후보자가 전남지사를 퇴임하면서 “언제나 국민과 역사를 생각하는 총리, 특히 서민의 사랑을 받는 총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나라다운 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신명을 바쳐 일하겠다”고 강조한 건 자신이 경험한 서민의 아픔을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전남지사 시절 남다른 서민 정책을 고려하면 ‘넉넉한 총리 후보’라고 평가한다. 이 후보자가 본인은 물론 가족과 주변을 엄격하게 관리해온 점을 들어 큰 흠결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후보자의 중·고교 동창인 허정 광주 에덴병원장은 “50년 넘게 지켜본 이 후보자는 곧은 성품과 따뜻함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며 “대통령을 잘 보필해 국가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명재상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전했다.

전남도청의 한 공무원은 “4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도백까지 역임해 정치와 행정 영역에 대한 경륜을 갖춰 국정을 이끌어 가는 데 최적임자로 생각된다”며 “도정 추진에 있어서는 엄격하면서도 과단성 있는 모습과 함께 인간적인 모습을 모두 갖춰 총리를 맡아서도 훌륭한 성과를 이뤄낼 것”이라고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