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00년 사이에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발전이 월등하게 이뤄진 건 사실이다. 포브스 50주년 기념호 기사에는 아시아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포브스 선정 세계 2000대 글로벌 기업 중 38%는 아시아 기업이다. 포브스 100주년 기념호에서 높아진 아시아 기업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포브스 100주년 기사는 포브스 미국 본지와 함께 진행했다. 100년의 역사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가장 마지막 시대에는 아시아 유명기업에 대한 기사가 제법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앞의 두 시대에는 포브스나 미국 기업 입장에서 아·태 지역과 관련된 소식은 별다른 관심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는 1967년 발행된 포브스 50주년 기념호를 꺼내들었다. (포브스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야 해외판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도표 참조) 350쪽으로 구성된 50주년 기념호는 지금 봐도 꽤 두꺼웠다. 안에는 도표로 만들어진 데이터와 산업별 분석 자료로 가득 차 있었다. 내용을 보니 죄다 미국 이름에 미국 얼굴들이었다. 편집진은 포브스답게 역동성을 주제로 내세웠고, ‘창조적 파괴’에 대해 역설했다. 그러나 미 전역을 휩쓸고 지나갈 창조적 파괴의 흐름이 해외에서 시작될 거라는 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뒤적이다 보니 소니의 비디오레코더 광고가 나왔다. 미국에서 가장 먼저 유명해진 아시아 브랜드가 이후 처절한 경쟁 속에서 빛을 잃을 운명이란 걸 알고 보니 ‘역동성과 창조적 파괴’라는 주제와 더욱 걸맞아 보였다. 그나마 광고 지면이라도 사서 50주년 호에 이름을 올린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니 이름이 한 번이라도 언급된 기사가 한 개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술 미리보기’ 코너에서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초음속 교통수단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70년대 중에는 상용화될 것으로 보인다. 홀로그래피 기술이 그 뒤를 이을 것이다. 그럼 3D 영화와 TV, 영상통화 서비스도 가능해진다. 사업가는 도쿄 공장 매니저와 3D 영상통화로 회의를 하고, 초음속 운송수단에 올라타 미국에서 하네다 공항까지 2시간이면 도착하게 된다’.
2017년으로 돌아와 예상이 맞았는지 살펴보자. 스카이프 영상통화가 있긴 하다. 3D 영상기술도 화려하게 돌아오긴 했다.
먼 옛날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과 실제 이루어진 현실을 비교하다 보면, 놀랍게 비켜간 상상력에 정겨움이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예상이 틀렸다고 냉혹하게 굴 필요는 없다. 읽다 보니 이 기사에서도 관심 범위는 미국으로 한정된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아시아로의 아웃소싱이 언급되기는 했다.
계속 잡지를 넘기다 보니(이제는 파산한) 항공사의 해외취항 광고가 몇 개 보였다. 벌리츠(Berlitz) 언어 교육으로 일본어를 배우라는 광고, 북해 탐사에 나선(역시 파산한) 석유업체 광고도 있었다. 광고를 다 넘기니 해외 사설란에 실린 칼럼이 나왔다. 잉글랜드 은행과 마셜계획, G-20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10대 클럽(Club of 10)’ 등을 언급하고 있었다.
이게 포브스 50주년 호에 실린 해외 기사 전부다.
인정하자. 1967년만 해도 포브스와 독자가 아시아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다음의 통계를 보면 그 이유를 이해해줄 수도 있다. 50년 전과 지금, 아시아와 미국의 경제 규모를 비교한 자료다.
기업 순위는 어땠을까? 당시는 포브스를 포함해 어떤 잡지도 글로벌 기업 순위를 산정하지 않았다. 새롭게 부상 중이던 일본 기업이나 홍콩 금융기관이 간간이 기사에서 언급됐을 뿐이다. (태평양 지역을 최초로 본격 취재한 1970년만 해도 ‘떠오르는’ 일본을 향한 미국의 투자금액은 연간 10억 달러에 불과했다. 참고로 미국의 연간 중남미 투자액은 같은 해 130억 달러였다.)
1967년이 너무 ‘다른 세기’처럼 느껴진다고? 포브스가 최초 발행된 1917년에 아·태 지역이 어땠는지 알면 그런 말을 못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청나라가 멸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일본은 이보다 앞서 있었지만 향후 나라를 수십 년 뒤로 퇴행시킬 군사 제국주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태국과 필리핀은 농사로 근근이 먹고 사는 수준이었다. 호주와 뉴질랜드가 얼마 전 독립했을 뿐, 나머지 국가는 대부분 식민지에 머물러 있었다.
20세기 초 경제에 대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밖에 얻을 수 없지만 당시 미국의 1인당 GDP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전체의 10배에 달하는 건 분명히 알 수 있다. 일본이 1920년대 경기불황을 군국주의에 의존하지 않고 극복했다면, 중국 국민당이 전후 국가재건을 제대로 완수했다면, 영국이 인도제국을 그렇게 엉성하게 끌고 가지 않았다면, 아시아 기업의 이름과 얼굴이 포브스 50주년 기념호를 가득 채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달랐다. 아시아 경제 시계는 아주 천천히 움직였고 1967년이 지나서야 박자가 조금씩 빨라졌다. 50년이 흐른 지금, 세계 GDP의 36%를 차지하는 아시아는 100주년 기념호에 훨씬 다양한 기업의 이름을 올리며 세계를 무대로 활약 중이다. 이제 포브스 선정 세계 2000대 글로벌 기업 중 38%는 아시아 기업이다. 이 중 다수가 다음 세대로 권력 승계를 준비 중이다.
포브스 경영진의 마음속에서 아시아가 차지한 위상도 많이 달라졌다. 1999년까지만 해도 해외 출판 미디어에서 아시아가 포브스에게 주는 광고비는 전체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칸타 미디어(Kantar Media)에 따르면 그 비중은 현재 20%대 후반까지 높아졌다. (100주년 기념호가 비중을 더욱 높여줄 걸로 기대한다) 지금까지 추세를 보면 평화와 번영을 얻은 아시아가 앞으로 포브스 기념호에서 얼마나 높은 위상을 차지할지는 별다른 상상력 없이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찬밥 신세를 벗어난 아시아는 이제 가장 먼저,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지역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