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바다와 언덕과 숲으로 둘러싸인 이 쾌적한 도시에서 주축을 이루는 거리는 카를 요한의 거리(Karl Johans Gate)이다. 이 거리는 왕궁에서 동쪽으로 쭉 뻗은 왕도(王道)인데, 길 양쪽에는 구 오슬로대, 국립극장, 노르웨이 국회의사당 등 노르웨이의 교육·문화·정치를 상징하는 건물들이 세워져 있고, 길옆에는 시민들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거리에 있는 국회의사당 건너편 건물 꼭대기에는 노르웨이·덴마크·핀란드·스웨덴 북유럽 4개국 깃발이 나란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저 건물이 무엇이냐?”고 물어서 모르면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그랜드 호텔이다.
▎피페르비카 지역의 항구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정한 노벨평화상위원회는 매년 10월 중순에 수상자를 발표하고 노벨의 서거일인 12월 10일에는 노벨평화상 시상식을 오슬로 시청에서 거행하는데 이 기간 동안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머무는 곳은 바로 이 호텔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이 호텔의 발코니에 나와 카를 요한의 거리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답례한다. 또 평화상 수상 축하 연회가 열리는 곳도 바로 이 호텔이다.
▎오슬로의 중심 카를 요한의 거리. 오른쪽 탑이 있는 건물이 그랜드 호텔이다.
카를 요한의 거리 남쪽 항구 쪽에는 크고 우람하면서도 간결하게 디자인된 붉은 벽돌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기념비적인 형태의 두 개의 높은 탑은 이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바다를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이 건물은 다름 아닌 오슬로 시청사이다. 이 건물은 1931년에 착공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50년에야 문을 열었다. 시청사가 세워진 항구 지역의 명칭은 피페르비카(Pipervika). ‘피페르’는 ‘피리 부는 사람’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강한 바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말과 관련된 말이 비킹(viking)인데,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바이킹’이다.
▎바이킹 박물관에 보존된 우스베르의 바이킹 분묘에서 발굴된 배.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광대한 지역과 교역한 항해자 바이킹
▎피페르비카 지역의 항구와 오슬로 시청사.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국가라면 바이킹이 먼저 연상된다. 바이킹은 8세기 말에서 11세기 중엽에 걸쳐 서양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오슬로에 왔으면 바이킹 박물관을 한번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 박물관은 오슬로 항구 남서쪽 조용한 뷔그되위(Bygdøy) 지역에 있는데 박물관의 외관은 수수한 교회 같다.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바이킹 배 박물관’. 즉 대표적인 전시물이 노르웨이에서 출토된 바이킹 배 3척이기 때문이다. 이 배들은 튀네(Tune) 지역, 곡스타(Gokstad) 지역, 우스베르(Oseberg) 지역 등 바다에 가까운 경작지에 있던 바이킹 분묘에서 각각 1867년, 1880년, 1904년에 발굴되었다. 바이킹은 장례풍습에 따라 신분이 높은 자를 매장할 때는, 죽은 자가 마지막 가는 길에 필요한 물건을 시신과 함께 배에 실었다. 그리고는 배를 돛대 끝까지 진흙으로 모두 덮고 완만한 곡선의 커다란 능을 만들었다. 약 100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사람들은 이것이 바이킹 분묘인지 모르고 지형이 원래 그런 줄로만 믿었다.
이곳에 전시된 3척의 배는 모두 유연한 곡면의 길쭉한 배로 앞뒤가 같은 모양이다. 즉 후진하려면 뱃머리를 돌릴 필요 없이 노 젓는 방향만 바꾸면 되는 바이킹 배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시청사 안에 전시된 2009년 오바마 대통령 노벨평화상 시상식 장면 사진.
박물관 뜰에는 2 노르웨이 부부 고고학자의 두상이 눈길을 끈다. 안네 스티네(Anne Stine)와 헬게 잉스타(Helge Ingstad)라는 이름 아래에는 노르웨이어로 ‘이들은 바이킹의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바이킹의 아메리카’는 무슨 뜻일까?
오랫동안 바이킹이 대서양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져 왔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1960년에 이 부부가 캐나다의 동쪽 뉴펀들랜드 섬 북단에서 11세기의 바이킹 촌락 유적지와 유물을 발굴해냄으로써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약 500년 전에 바이킹이 이미 신대륙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을 밝혀냈던 것이다.
▎‘평화를 방문하라’는 포스터가 보이는 노벨평화센터 입구.
바이킹이라면 한때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던 무자비한 약탈자들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은 유럽의 광대한 지역과 교역한 항해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남쪽으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을 거쳐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의 이탈리아까지, 동쪽으로는 강을 따라 러시아·우크라이나를 거쳐 비잔틴 제국까지, 서쪽으로는 영국 섬을 넘어 아이슬란드에도 거점을 확보했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신화의 바다 대서양을 건너 그린란드를 넘어 북미대륙 동쪽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던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만의 고도로 특화된 독특한 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킹 배들은 가볍고 유연하면서도 강하고, 조종하기 쉬우며, 속도가 빠르고, 얕은 물에도 항해가 가능하며 해안 어디에나 쉽게 댈 수 있었다.
오슬로에서 거행되는 노벨 평화상 시상식
▎노르웨이 노벨평화상위원회 건물 앞에 세워진 노벨의 흉상.
이러한 바이킹의 전통은 어떻게 보면 지금도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 같다. 예로 현재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의 많은 다국적 기업은 최소의 자본과 최고의 효율을 앞세운 조직력과 고도로 특화된 기술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아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구상에서 남들이 부러워할 선진 국가를 건설한 바이킹의 후손들은 앞선 사회복지제도, 뛰어난 기술력, 신용, 안전성, 환경, 인도주의 등으로 국제사회에서 매우 좋은 이미지를 주고 있다. 게다가 노벨상은 이처럼 좋은 국가이미지를 한층 더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노벨상은 처음에 화학, 물리,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상 등 5개 분야에 걸쳐 1901년부터 제1, 2차 세계대전 기간을 빼고는 매년 시상하는데 1969년에는 경제학상이 추가되었다. 매년 10월이 되면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시상식은 매년 12월 10일 오후 4시30분 알프레드 노벨이 세상을 떠난 날과 시각을 기념하여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거행된다. 그런데 평화상만큼은 노벨의 유언에 따라 스톡홀름이 아닌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수여한다. 시상식은 오슬로 시청사 홀에서 거행하는 것이다.
▎노벨평화센터 안에 전시된 평화상 수상자들의 얼굴.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다이나마이트로 거부가 되었는데 63세의 일기로 1896년에 이탈리아의 북부 해변도시 산레모에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막대한 재산을 모두 헌납하여 매년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하는 상을 제정하도록 유언했다. 그가 원래 화학공학자였으니 화학상과 물리학상을 제정한 것은 이해가 되지만 왜 평화상을 제정했는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노벨의 생애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이나마이트가 파괴와 살상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를 제정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그가 평화주의자 여류작가인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tner 1843~1914)의 영향을 많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녀는 체코-오스트리아 귀족 킨스키 가문 출신으로 그녀가 쓴 소설 <무기를 내려놓아라!>는 당시 유럽에서 여러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다. 그녀는 1905년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런데 노벨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는데 왜 유독 평화상만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시상식을 거행하도록 했을까? 그 이유도 확실하지 않다. 한때 노르웨이 노벨평화상위원회는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같은 군사적 전통이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노벨이 이곳을 평화상을 수여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한편 노벨이 생존해 있을 때 노르웨이는 스웨덴에 합병되어 있었으나 1905년에 평화스럽게 독립했다.
▎노벨평화센터 안 '수상자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전시실에서 보이는 김대중 대통령 사진.
노벨평화상과 관련하여 또 찾아가 볼 곳은 노벨평화센터이다. 이 센터는 시청사 앞 광장에서 부두를 따라 남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데, 1800년대 후반 양식으로 디자인 된 이 건물은 원래 오슬로 서부역이었으나 1989년에 폐쇄된 다음 용도가 변경되어 2005년에 노벨평화센터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곳에는 무엇보다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에 관련된 자료들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노벨상 중에서 특히 평화상은 극히 정치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논쟁의 도마에 오른 것이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두 번이 아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 당시의 우리나라 언론은 ‘민족의 경사’라고 대서특필했다. 정말 순진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바이킹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를 상대로 시장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노벨상은 민족분단의 비극을 담보로 한 그런 상이 아닌 다른 분야의 노벨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