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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2020년 수교 30년…한국 경제의 새 출구는 ‘유라시아’

올해는 우리나라와 러시아의 수교 30주년을 맞는 해에요. 사실 러시아는 미국이나 중국 못지않게 우리에게 중요한 나라이지요. 우윤근 전 러시아 대사는 눈 앞의 성과만 좇지 말고 긴 호흡으로 우호관계를 이어가야 한다고 말해요.

 

우윤근 전 러시아 대사는 “러시아는 일관되게, 정직하게 그러나 용감하게 대해야 할 나라”라고 힘줘 말했다.

 

일본 오사카(大阪)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마지막 날이던 2019년 6월 29일, 문재인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마주 앉았다. 두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5번째, 2018년 11월 싱가포르에서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때 이후 7개월 만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2020년에는 양국 간 수교 30주년을 맞이 한다”며 “교역도 늘어나 2018년에는 교역이 29% 증가했고 2019년 1월부터 4월까지 39% 증가했다”고 양국의 교역 현황을 소개했다.

문 대통령의 화답이 이어졌다. “양국 간 교류협력이 다방면에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4월 파트르쉐프 서기가 방한한 데 이어 문희상 국회의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러시아를 방문하는 등 양국 고위급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다.”

1988년 출범한 노태우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한 북방정책은 2년 뒤 첫 결실을 봤다. 바로 1990년 러시아와의 수교다. 한국은 중국(한·중 수교 1992년)보다 2년 먼저 러시아와 손을 잡고 동반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많은 외교 전문가가 4강 외교와 관련해 균형과 안배를 주문한다. 특히 미국이나 러시아보다 상대적으로 역할이 가려져 있는 러시아와의 관계설정을 강조하고 있다. 정태익 전 러시아 대사(2002~2004년)는 일찍이 “러시아에 한국은 남태평양 진출의 관문”이라며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그리고 한국과 우호적인 에너지 협력 및 한반도 통일을 위해 러시아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월간중앙이 문재인 정부 초대 러시아 대사(2017년 11월~2019년 5월)를 지낸 우윤근 전 대사를 만나 한·러 수교 30주년의 의미와 양국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우 대사는 “미래를 생각하면 러시아는 미국이나 중국 못지않게 한국에 중요한 나라”라며 말문을 열었다.

러시아 대사로 2년 가까이 재직했다. 성과를 설명해 달라.

“큰 성과로 2019년 6월 문재인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으로는 19년 만의 국빈 방문이었다. 최초의 국빈 방문은 1999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었다(당시 러시아 대통령은 보리스 옐친). 문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을 만나 많은 논의를 했고, 12가지 정도의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러시아 하원에서 연설도 했다.”

우 전 대사 재임 기간 경제적인 성과도 있었나?

“2014년 소위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대(對)러시아 제재가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제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2014년에는 한·러 무역 규모가 250억 달러를 넘어 사상 최고를 기록했는데, 제재 이후인 2015년과 2016년에는 140억 달러 수준까지 내려갔다. 그러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과 이듬해인 2018년에 30~40%가량 성장했고, 2018년 249억 달러까지 회복했다.”

민간 교류는 어땠나?

“민간 교류도 눈에 띄게 늘었다. 이전에는 연간 민간 교류가 20만~30만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8년 통계 기준으로 65만 명 정도로 민간 교류가 확대됐다. 문재인 정부는 한·러 관계에서 두 가지 비전을 제시했다. 2020년까지 무역 규모 300억 달러와 민간 교류 100만 명 달성이다. 둘 다 가능성이 높다.”

 

재임 기간 아쉬운 점은 무엇이었나?

“일이라는 게 돌아보면 늘 아쉽다. 지금 대사로 다시 부임한다면 더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솔직히 예전부터 러시아를 아주 좋아했었다. 젊은 시절(1997~2003년) 주한 러시아 대사관의 고문변호사로 오랫동안 일했다. 또 하나, 푸틴 대통령이 나온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대학원에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 러시아에서 공부한 적도 있다. 그뿐 아니라 정치인일 때도 러시아에 자주 가는 등 인연이 각별했다. 나는 굉장한 친러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러시아 대사로 임명될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를 많이 못했던 건 아쉬운 점이다.”

한·러 FTA 추진 상황이 궁금하다.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에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무래도 한·미 동맹 등으로 정치·군사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에)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제 협력과 문화 교류 쪽은 여지가 많다. 그래서 임기 동안 FTA를 추진하려고 노력했는데, 러시아 측에서 많이 경계하더라. ‘한국은 FTA의 선수다’ ‘FTA를 잘하는 나라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마침 내 임기가 막 끝난 무렵이던 6월, 한·러 간 서비스·투자 분야에 대한 FTA 협상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로 결정됐다. 상품 분야가 체결돼야 효과가 크지만, 그 부분은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러시아가 체결을 꺼리는 건가?

“러시아는 자원이 많은 국가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나라는 자동차나 전자제품 같은 고부가가치가 제품을 파는 나라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손해 나는 장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은 원자재를 수입해서 가공 후 러시아에 비싸게 팔기 때문에 자신들이 손해라는 것이다.”

러시아와의 FTA가 중요한 이유는?

“러시아와 우리나라는 상호보완적인 부분이 많다. 러시아는 국제사회에서 여러 가지 제재를 받기 때문에 서방 진출이 어렵다. 따라서 현재는 중국과의 교역량이 가장 많다. 그런데 러시아는 아시아에 진출하고 싶어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정서적으로도 우리와 통하는 게 많다.”

얼마 전(2019년 10월) 러시아 극동연방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나?

“사실 굉장히 의외였다. 그 학교는 극동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대학이다. (학위 수여) 소식을 듣고 갔더니 거창하게 준비했더라. 그래서 ‘왜 내가 이걸 받는지 모르겠다’고 극동연방대 총장에게 물어봤다. 왜냐하면 나 이전에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신 분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지성들이었으니까. ‘당신은 한국에서 러시아를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이니까’라는 총장의 답변에 한번 더 놀랐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히 과분한 일이다.”

양국은 수교 30주년을 맞는 2020년 300억 달러 교역을 이루기로 다짐하고 있다.

“2020년은 양국 수교 30년이다. 그래서 30년을 기념하는 준비위원회가 양국에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는 정세균 전 국회의장, 러시아에서는 극동 담당 부총리가 위원장이다. 30주년 기념행사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 협력 관계를 이루는 게 더 중요하다. 교역 규모 300억 달러라면 한국은 러시아의 5~6위쯤 되는 파트너가 된다. 중국·독일·네덜란드·벨라루스 순서로 러시아와의 교역량이 많다. 그런데 네덜란드와 벨라루스는 중계무역 국가를 하는 나라다. 따라서 300억 달러 교역 규모라면 실제로는 중국·독일 다음 수준이다. 민간 교류도 곧 연간 100만 명 수준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사학위를 받으러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봤더니 한국 젊은이들이 굉장히 많이 왔더라.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오는 비행기가 대략 일주일에 70차례가 넘는다고 하더라. 경제 협력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민간 교류에서 한국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나.”


그들에게 한국은 가보고 싶은 나라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0월 청와대에서 당시 4강 대사 임명장 수여식을 마친 후 참석자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왼쪽 둘째가 우윤근 러시아 대사.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대한(對韓) 수출 규제 이후 국내에서는 부품·소재·장비 국산화 필요성이 대두했다. 그런 면에서 러시아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

“러시아는 과거 소련 시절부터 기초과학 응용분야 기술이 탁월할 뿐 아니라 천재들도 많았다. 인공위성을 가장 먼저 발사한 나라가 러시아 아닌가. 그런데 러시아는 상용화 기술이 좀 떨어진다. 그게 가장 문제다. 러시아 관료들에게 ‘당신들은 우수한 원천기술과 기초과학 기술이 많은데, 우리나라는 IT(정보통신)를 비롯해 상용화하는 기술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나라’라고 했더니 그들도 인정하더라. 그래서 양국의 부총리가 위원장이 되는 과학공동위원회도 운영하기로 했다. 과학 분야에서 러시아와 한국의 이해관계는 굉장히 밀접하다. 러시아의 원천기술과 한국의 상용화 기술이 결합하면 큰 시너지효과를 낼 것이다. 삼성이 모스크바에 ‘AI 연구소’를 만든 게 좋은 예다. 삼성은 그 같은 연구소를 세계 6~7곳에 두고 있으며, 1000명이 넘는 연구원이 있다고 들었다. 삼성에서 러시아의 우수한 기초과학 기술과 두뇌들을 활용하기 위해 모스크바에도 삼성 ‘AI 연구소’를 세운 것이다. 앞으로 참고할 만한, 굉장히 모범적이고 우수한 사례라고 본다.”

러시아를 통한 북극항로 이용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기후변화다. 인간은 0.1도에서 0.5도 정도의 기온 차를 감지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구 전체적으로는 평균온도가 0.1도만 올라가도 엄청난 변화가 온다. 북극의 얼음들이 현재도 계속 녹고 있는데 앞으로 20~30년 안에 지난 50년보다 더 빠르게 이 같은 현상이 진행될 것이란 보고서도 있다. 그런가 하면 기술도 진보하고 있다. 쇄빙선을 만드는 기술이 굉장히 좋아졌기 때문에 북극항로가 활성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물류 국가다. 주로 선적을 이용해 수출한다. 대부분 수에즈 운하를 통해 유럽의 노트르담으로 가는데, 평균 24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리고 거리도 2만㎞가 넘는다. 뿐만 아니라 아덴만 같은 곳에는 해적이 출몰하기 때문에 군함도 파견해야 한다. 그런데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시간은 평균 14일로 10일이 단축되고 거리도 1만2000㎞가 줄어든다. 북극항로를 이용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시간과 물류비용을 30~40% 정도 절약할 수 있다. 북극항로는 향후 한국에 대단히 중요한 활로가 될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러시아는 매우 큰 나라다. 그리고 1812년 유럽 최고 국가인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물리친 제국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또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해 레닌그라드 봉쇄 공방전을 벌였을 당시 900일 동안 점령당하지 않고 버텼다. 독일이 무너지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나라가 러시아다. 과거 러시아는 우리나라를 작고 못사는 나라, 남북분단에 갈등이 심한 나라 정도로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우리 정부기관이 세계 17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다. 한국에 대한 호감도 면에서 1위가 인도네시아였고, 2위가 러시아였다. 모스크바 시민 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은 ▷경제가 굉장히 발달한 나라 ▷K팝이 매력적인 나라 ▷좋은 제품을 아주 잘 만드는 나라였다. 모스크바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곳에 간 적 있는데 수천 명의 러시아 젊은이들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러시아에서는 한국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가보고 싶은 나라로 생각한다. 지난 3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우리나라를 중요한 나라로 보고 있나?

“러시아에 비하면 한국은 매우 작은 나라다. 개인적인 생각에, 아직은 러시아가 한국을 대단한 중요도를 가진 나라로 보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다.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외교정책은 주도권은 중국이 갖도록 하고 자기들은 뒤에서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유럽이나 중동에서는 반대로 러시아가 주도권을 갖고, 중국이 후견인 노릇을 하는 것이 오랜 러시아 외교 정책의 근간이다. 그런데 최근 남북관계 상황을 지켜봤을 때 경제 협력 분야에서 한국과 북한은 비교가 안 된다. 우리는 작년(2018년)에 러시아와 무역 교역 규모가 250억 달러였던 데 반해 북한은 37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이미 러시아에 한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필요한 나라가 됐다. 다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는 경계하는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한국은 미국과 동맹국이니까.”

이 대목에서 우 전 대사는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귀띔했다. 우 전 대사가 러시아 대사로 재직하던 2018년과 2019년 연초 러시아 외교부에서는 설을 쇠는 아시아 국가들(중국·베트남·싱가포르·몽골·한국·북한)의 대사를 영빈관으로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

 

1999년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그런데 건배사 순서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호스트인 러시아 아시아 담당 외교 차관이 중국 대사에게 가장 먼저 건배사를 제의한 데 이어 두 번째 마이크를 우 전 대사에게 건넨 것이다. 마이크를 받아 들면서 우 전 대사는 김형준 북한 대사를 힐끔 쳐다봤다. 북한 대사의 얼굴이 굉장히 경직돼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2018년에 이어 2019년에도 우 전대사는 중국 대사에 이어 두 번째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우 전 대사는 “다른 대사들에게 와인을 따라준 뒤 김형준 북한 대사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는데 그가 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 전 대사는 “러시아 차관이 내게 마이크를 건네는 순간, 북한 대사가 매우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내년이면 양국 수교 30주년이다. 한·러 수교 30년의 의미는 무엇일까?

“노태우 정부 때 북방정책을 추진한 건 굉장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러시아에서 신뢰받는 대통령으로 기억됐고, 국빈 방문도 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생각만큼 교류가 활발하지는 못했다. 상대적으로 미국·중국·일본에 비하면 4대 강국이라고 하지만 (러시아의 존재감이) 미미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우선은 우리나라에 미국·중국이 중요하고, 현실적으로 봤을 때 미·중과의 교역량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또 같은 투자를 하더라도 빨리 이득이 돌아오는 것 역시 미국과 중국이다. 반면 러시아는 장기적으로 미래를 보고 투자해야 할 대상이라 좀 어렵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미국·중국과의 교역량은 현실적으로 더 늘리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새로운 출구를 찾아야 할 때다. 우리가 영원히 중국과 미국에만 모든 것을 의존할 수는 없지 않나. 그런데 이미 러시아는 한국에 먼 미래가 아니라 현실이고, 한국의 먹고사는 문제와도 직결돼 있다. 또 미국과 중국에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이득이 생기는 시기가 왔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는 미국이나 중국 못지않게 중요한 나라다.”


일관되게 그리고 용감하게

 

2015년 2월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최고위원회의에서 우윤근 원내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러시아와 교역·교류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30년이면 한 세대가 지나간다. 예전에 러시아는 우리나라에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먼 나라였다. 그러나 유라시아 대륙은 우리가 찾아가서 협력해야 할 파트너이자 현실적인 목표가 됐다고 생각한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를 만났을 때 ‘독일은 서방국가이면서도 러시아와 교역량이 많다. 그 비결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슈뢰더 전 총리는 ‘그것은 국가 기밀 사안인데, 알려줄 수 없다’고 웃으면서 나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러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그래서 내가 ‘러시아는 큰 나라’라고 대답했더니 슈뢰더 전 총리는 ‘그럼 당신은 큰 나라에서 나고 자란 러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 말은, 즉 한국은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러시아를 이해하려면 더 많이 연구해야 하고, 오랜 시간 동안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또 러시아의 이웃 국가인 핀란드 외교부 장관인 티노소이니는 ‘러시아는 일관되게, 정직하게 그러나 용감하게 대해야 할 나라다. 왔다 갔다 하면서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고 내게 조언했다. 지난 30년 동안은 조금 먼 나라였지만, 지금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될 나라다. 북극항로는 물론이고,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TSR)도 우리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철도에 한국이 참여한다면 러시아도 좋고, 우리나라도 좋다. 그리고 우리는 유라시아 국가들,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정서적·인류학적으로도 굉장히 밀접하다.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실질적으로 협력을 강화할 때라고 본다.”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가 4대 강국 중 러시아를 좀 소홀히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던데.

“러시아가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 크게 이득을 주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미래에 대한 투자까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 러시아는 미래가 아닌 현재다. 북방외교의 변수를 꼽자면 ▷북핵 문제 ▷한·미 동맹 문제 ▷중국에 과도한 치우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핵 문제에 관해 보자면 러시아는 중국만큼 북한을 우선시하지는 않는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한국이 더 이득이 크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한다. 핵 폐기 문제에서도 러시아가 도와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 전 대사는 ‘러시아 홀대론’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공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재외공관장 만찬 초청 행사에서 의전서열은 러시아·중국·미국·일본 순이라는 것이다. 우 전 대사는 “러시아 정부에서도 그 점을 높게 평가했다”면서 “문재인 정부에서는 결코 러시아를 홀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럴 이유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2017년 10월 25일 청와대에서 거행된 4강 대사 임명장 수여식도 우윤근 러시아 대사, 노영민 중국 대사, 조윤제 미국 대사, 이수훈 일본 대사 순으로 이뤄졌다.

러시아에 북한은 어떤 나라일까?

“속내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푸틴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의 리더로 등장한 이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박 2일로 만난 것 한 번(2019년 4월)밖에 없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면 문 대통령과는 모스크바 정상회담, 동방경제포럼, 그 밖의 다자외교에서 자주 만났다. 그걸 보면 러시아가 정치적으로도 북한을 우리보다 더 긴밀하게 대하지는 않는 것 같다. 또 일본도 비자 면제 국가가 아닌데 러시아는 우리에게 비자 면제를 해준다. 이런 걸 봐도 러시아가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러시아 정부는 한국에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있다고 볼 수 있고, 또 푸틴 대통령의 동방정책과 문재인 대통령의 북방정책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 극동이기 때문에 러시아가 대단히 현실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과거의 동맹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나라와 친해야 잘 먹고 잘살 것인가와 같은 실용주의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에 북한은 과거만큼 비중이 큰 나라가 아니라는 건가?

“그렇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북핵 문제 해결과 관련해 푸틴 대통령은 2019년 6월 “김정은의 핵심 요구는 안전보장과 비핵화 상응조치”라고 지적한 바 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북핵 문제에 관해서는 중국의 목소리가 크고, 러시아는 뒤에서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중국과 거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을 견제해야 하므로 중국 편을 들면서 지금도 다자안보 체제 틀에서 북한의 안전을 보장한다.”


北, 과거만큼 큰 비중 있는 나라 아냐

 

1991년 4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 내외가 방한한 고르바초프 대통령 내외를 영접하고 있다.

 

대사 재직 때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이따금 연락했나?

“공개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대통령이 러시아에 오셨을 때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는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서 보고했다.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주저하 지 않는 점이 정치인 출신 대사의 강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로서는 러시아 대사직이 외교관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할 말은 했고, 전달해야 할 사안은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청와대에서도 잘 받아줬던 것 같다.”

대통령에게 건의 또는 보고한 내용 중 공개할 수 있는 게 있다면?

“2018년 한·러 정상회담 때 대통령이 ‘우 대사, 러시아는 어떤 나라인가요’라고 물으신 적이 있다. ‘제가 보기에 러시아는 서양 사람의 얼굴을 한 동양적인 사고를 가진 나라입니다’라고 먼저 짧게 말씀드린 뒤 설명을 곁들였다. 설명을 들으신 뒤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우 전 대사는 법조인·정치인·행정가(국회 사무총장)·외교관 등 여러 직업을 경험했는데.

“제1야당 원내대표, 국회 법사위원장, 국회 사무총장, 로펌의 대표를 해봤지만, 그중에서 가장 영예롭고 분에 넘치는 자리는 대사였다. 러시아에서 많은 외교관을 만났는데, 그중에 존 헌츠먼 주니어라는 주러 미국 대사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이분이 주지사를 두 번이나 했고, 한때(2012년 공화당) 대통령 경선에도 나갔던 거물이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은 대사와 장군(general)이다. 대사와 장군에게는 절대 ‘전(前)’ 자를 붙이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번 대사와 장군은 영원한 대사와 장군’이라고 하더라. 돌이켜 생각해보니 3선 국회의원이었지만 국가보다 당을 먼저 생각할 때가 많았고, 표를 얻기 위해 지역주의에 매몰되기도 했었다. 국회 사무총장일 때는 조직이기주의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었다. 각기 장단점이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대사가 가장 영예로운 직업이고, 또 분에 넘친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대사는 정당이나 조직을 뛰어넘어 국가를 위해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행보를 준비하는지.

“대사를 지낸 경험이 매우 큰 의미였다. 국가를 위한 방법이 내 편, 네 편 나눠서 싸우기보다 더 큰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람이 있다면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는 것이다. ‘내년 총선에 출마할 거냐’는 질문을 받는 건 사실이다. 불출마가 당에 보탬이 된다면 그 길도 마다치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당이 필요로 하는 지역이 있다면 어디든 마다치 않겠다는 생각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현재 발전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산업화·민주화 모두 완벽하진 않지만 새로운 미래를 향한 마지막 진통의 과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갈등을 멈추고, 힘을 모아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할 때다. 러시아 사람들은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우리도 편견과 오해를 버리고 러시아를 좋은 파트너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사진 김경빈 선임기자 kgboy@joongang.co.kr

녹취 정리 박호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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