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면 이전 시대를 이끌던 기술·산업은 무력해져요. 대부분은 숙명에 따라 사장되지만, 어떤 이들은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도전하죠. 사양산업이라고 평가되는 인쇄·출판 시장에서 공격적인 투자로 성장을 꾀하는 신장섭 네오프린텍 대표가 그런 사람이에요.

 

신장섭 네오프린텍 대표는 “2003년부터 스마트공장을 도입해 고객사와 두터운 신뢰를 쌓고 있다”며 “최근엔 해외 진출, 자체적인 디자인 개발 등으로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 공장은 작업 중인 인쇄기 옆에서 대화는 물론 통화까지 가능합니다. 보통은 옆 사람과 대화가 안 될 정도로 시끄럽거든요. 공장을 설계할 때부터 소음을 줄이려고 현장엔 조용한 생산 설비만 두고 컴프레서 같은 시끄러운 부대설비는 모두 떼서 지하에 넣었습니다. 오늘처럼 추운 날(이날 파주의 기온은 영하권) 작업자들이 반팔 입고 있는 것도 우리 공장의 자랑거리죠. 인쇄 품질을 가장 많이 좌우하는 요소가 온·습도인데, 이를 사계절 내내 잘 유지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월 9일 파주출판문화도시에 있는 네오프린텍 본사에서 만난 신장섭 네오프린텍 대표(71)에게 공장 소개를 부탁하자 나온 답변이다. ‘세계적인 기기가 몇 대나 있고, 그 성능과 작업 효율성은 얼마나 월등한지’를 설명할 거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신 대표는 좋은 공장을 ‘훌륭한 생산 환경을 갖춘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용산에 있던 공장을 2013년 파주로 옮길 때 외관부터 설비까지 엄청난 투자를 했다”며 “인쇄하기에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내 역할이라 아깝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올해로 회사 설립 41년 차를 맞은 신 대표는 업계에서 보기 드문 과감한 투자자로 통한다. 이런 성향은 위기 때마다 네오프린텍을 굳건히 하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다. 신 대표가 처음 맞은 위기는 IMF 구제금융이었다. 1980년 네오프린텍의 전신인 용지인쇄를 차린 이후 16년 만의 일이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들도 부도를 걱정하던 이때 신 대표는 난데없이 시설 증대를 결심했다.

“모두 만류했어요. 업계에서도 보기 드문 값비싼 5색 인쇄기를 구매하겠다고 했거든요. 자금에 여유가 있었고, 직원들한테도 ‘우리 회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심어줄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과적으론 이때 들여온 인쇄기가 나중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최고의 수비는 최대의 공격”


40년 넘게 쉼 없이 공격적으로 달려온 결과 네오프린텍은 현재 직원 수가 100명이 넘고 연 매출액이 200억~300억원(국내 인쇄업계 내 매출 상위 10위권) 규모인 중견회사로 자리 잡았다. 공장도 파주 본사, 광탄과 구미 등 세 곳으로 늘었고 종이인쇄뿐이던 사업 영역을 삼성전자·아모레퍼시픽 등 국내외 80여 개 기업의 상품 패키지 제작업으로 넓혔다.

 

사업 범위를 넓히면서 패키지 제작 설비를 갖추기 위해 수십억원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신 대표에 따르면 국내에서 종이인쇄와 패키지 제작을 한 군데서 처리할 수 있는 곳은 네오프린텍이 유일하다.

패키지 제작은 현재 네오프린텍을 대표하는 사업이지만 시작은 전화 한 통에서 비롯됐다.

“2003년 삼성전자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핸드폰 매뉴얼 북 인쇄를 우리한테 맡기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당시 경쟁국인 일본에서는 인쇄물에 잉크 점 하나 찍히는 걸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품질관리를 까다롭게 하고 있었습니다. 삼성전자도 인쇄물 품질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었죠. 선정 과정은 듣지 못했지만 우리 회사 품질이 최고라고 인정받은 것 아니겠어요?(웃음) 그때부터 삼성전자의 매뉴얼 북을 인쇄했고, 2010년 즈음 갤럭시 S2가 인기를 얻으며 패키지 제작까지 의뢰 받았죠. 우리 회사에 패키지 제조 관련 설비가 한 대도 없었는데 부랴부랴 구매했어요. 삼성전자와의 인연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격적인 투자는 리스크가 큰 법이지만 신 대표는 발전을 위해 이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축구 경기에서 얻은 교훈이다.

“최고의 수비는 공격이죠. 이기고 있는 팀이 골문을 걸어 잠그겠다고 수비만 하다가 역전패당하는 걸 수없이 봤습니다. 새로운 일을 추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발전합니다.”

신 대표는 업계에서 돈만 좇지 않는 사업가로도 유명하다. 사업 초반 가슴 깊이 새겼던 ‘인쇄업은 문화사업이다’는 자부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 돈 안 되는(?) 각종 문화사업에도 열심이다. 그 결과 신 대표의 사무실엔 행정안전부장관·중소기업 청장·행정자치부장관·건설교통부장관에게 받은 감사장·표창장이 가득하다. 2015년엔 대통령이 수여하는 훈장까지 받았다. 1990년대부터 10여 년간 이어온 다국어 폰트(서체) 개발 사업의 공로를 인정한 상이었다.

네오프린텍에서 지금까지 개발한 다국어 폰트는 인도네시아·베트남·페르시아어 등 20개가 넘는다. 개발한 폰트는 어학사전으로 만들어 외국어 대학이나 기업들에 납품했다. 한 국가의 언어를 폰트로 개발하려면 5000만원가량 들어가는데 사전 하나 납품하면 수익이 제로에 가까웠다. 숫자만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되는 사업이 분명하다. 그저 교육·외교에 꼭 필요한 부분을 네오프린텍이 제공한다는 보람으로 꾸준히 해온 일이다.

그런 신 대표에게도 공장 문을 닫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1999년 12월 26일 발생한 공장의 화재사건이다. 뒷건물에서 시작된 불이 신 대표의 공장에 옮겨붙은 것이다. 겨울철 세찬 바람에 불길은 순식간에 번졌고, 공장 뼈대만 남기고 모두 태워버렸다.

 

“소방차가 내뿜은 물을 빨리 빼내지 않으면 얼어붙어서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가 될 것 같았죠.” 이마저도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일요일인 탓에 사람들을 부르기 쉽지 않았다. 좌절하고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이 등장했다. 바로 신 대표가 회장으로 있던 양천구 축구연합회 회원들이었다. 장정 수십 명이 밤새 물을 퍼냈고 공장 재정비까지 도와줬다. 결국 전소 일주일 만인 1월 3일, 공장을 정상 가동할 수 있었다. 신 대표는 아직도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의리로 똘똘 뭉친 인맥을 만든 신 대표만의 비결이 뭘까. 그는 ‘특별한 게 없다’고 손사래 쳤다. “그저 약속을 잘 지킬 뿐이죠. 공장 문을 열고 지금까지 한 번도 대금 지급이 늦은 적이 없어요. J포럼 강의도 한 번도 결석하지 않았죠.(웃음)” 최근 두 딸에게 경영 수업을 시키고 있는데, 가장 강조하는 말이 ‘신용을 목숨처럼 여겨라’는 것이다.


“사업가에게 신용은 목숨과 같아”

 

 

신 대표는 내리막길을 걷는 인쇄업에서 결국 ‘신용’이 생존을 위한 돌파구가 될 거라고 믿는다. “모두 알다시피 요즘 인쇄업계가 많이 어렵습니다. 대부분 인쇄소의 매출이 매년 반토막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 2003년부터 일찌감치 스마트공장 만들기에 힘썼어요. 스마트공장이 실현되면 고객사들과의 약속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죠. 이것도 신용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스마트공장은 정보화 생산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모든 데이터를 전산화해 공장별·라인별·부서별 ‘칸막이’를 없앤 것을 말한다. 책임자가 공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영업사원은 고객사와 미팅하면서 ‘언제까지 납품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약속할 수 있다.

 

재고량을 줄이는 데도 효과적이다. 네오프린텍이 인쇄 라인에만 적용했던 스마트공장의 생산관리 시스템 MES(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와 POP(Point Of Production)를 최근 패키지 생산 라인에 적용했더니 견적·생산·원부자재 등 데이터 기반 관리가 수월해져 이전보다 재고량을 20% 절감할 수 있었다.

MES·POP 시스템을 도입하는 과정에도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삼성에서 전사적 자원관리를 하는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라는 프로그램을 무료로 나눠줬지만 인쇄업종과는 잘 맞지 않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전문 업체에 맡겨 프로그램도 개발했지만 이마저도 신 대표의 성에 차지 않았다. 결국 2003년 MES·POP 시스템을 개발하는 ‘와이플러스’라는 회사를 세워 인쇄업계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공급하고 있다.

이 외에도 신 대표는 네오프린텍의 다양한 미래 성장전략을 소개했다.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 플로리다주에 영업사무소를 설립했고, 베트남 호찌민에는 생산·유통 협력 채널을 구축했다. 2011년엔 사내 디자인연구소를 만들어 출판물·패키지를 직접 디자인하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누구보다 열심히 미래를 고민 중인 신 대표지만 그도 어느새 70대에 접어들었다. 바쁘게 달려왔으니 이젠 여유로운 삶을 꿈꿀 법도 한데 ‘은퇴 계획은 없다’고 선을 긋는다. “제 동창 대부분이 행정고시 합격하고 젊은 시절 국가기관, 대기업에서 화려한 시절을 보냈어요. 저와 배우 임채무씨만 다른 길을 걸었죠. 그런 친구들이 이젠 저와 임채무씨가 가장 부럽다네요. 일터가 있다고 말이죠. 물론 실무는 딸들에게 넘길 생각이지만 체력 닿는 날까지 출근할 겁니다.”

 

신윤애 기자 shin.yunae@joongang.co.kr

사진 이원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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