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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낭만 시인 '백석', 북한에서의 삶을 소설로 쓴 김연수 작가

소설가 김연수가 8년 만에 신작을 발표했어요. 60년 문학 후배가 바라보는 서정시인 백석의 내면 복원. 외부 힘에 굴복하느니 고난을 견디고자 북에 남았던 백석의 내면은 어떨까요? 분단 이후 그 소식을 알 길이 없던 백석 시인의 행적을 소설로 구성한 <일곱 해의 마지막>은 출간이 한 달 안 돼 벌써 3만2000부를 찍었어요.

 

소설가 김연수씨는 시로 먼저 등단했다. 8년 만에 펴낸 새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서정시인 백석의 내면 복원을 시도했다. / 사진:임안나

 

인터넷 검색창에 ‘시인 백석’을 처넣으면 이런 글을 찾을 수 있다. 백석 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는 질문에 누군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원빈 닮음’이라고 답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원빈은 탤런트, 그 원빈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시인 백석(1912~1996)이 1938년에 발표한 작품. 원빈을 닮은 잘 생긴 외모와 함께(기자에게는 원빈보다는 현빈에 가까워 보이지만) 시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언제라도 증폭시키는 대표작이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런 매혹적인 문장이 들어 있어서 말이다.

 

소설가 김연수(50)씨는 이런 대중의 취향과는 다른 작품을 거론했다. “백석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이 무척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7월 9일 김씨의 경기도 고양시 작업실에서다. 그는 최근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8년 만에 새 장편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을 출간했다.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코로나의 고통과 불안을 견디게 하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에서 바로 백석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물론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 가상의 접근, 사회주의 체제의 압력을 견뎌내야 했던 서정시인의 내면 재구성이다. 자연히 인터뷰는 김씨와 백석의 인연을 복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김씨는 백석이라는 세계를 1988년 납·월북 문인 해금 조치 직후 처음 접했다고 했다. 89년, 90년쯤으로 기억했다. 백석으로 학위 논문을 쓴 선배 하나가 백석 시 전집을 건네줬다고 한다. ‘나와…’가 1935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백석의 비교적 초창기 시라면 1948년에 발표한 ‘남신의주…’는 그의 사실상 마지막 시다.

 

해방-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와중에 백석은 고향 평북 정주에 잔류하는 길을 선택했고 결국 예술 표현을 철저히 통제하는 북한 사회에서 주로 러시아 문학 번역가로, 가끔씩 동시를 발표하는 시인으로, 그것도 한시적으로 활동했을 뿐이다.

 

해방 혼돈 속에 북에 남아 주로 번역 작업

 

 

분단 이후 북한에서 백석의 행적을 알 길이 없던 당시의 김씨,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48년에 이 정도의 작품을 쓸 수 있는 시인이었으면 틀림없이 이후로도 계속해서 시를 썼을 텐데 그렇다면 사회주의 체제에서 서정시를 쓰는 어떤 사람, 그 사람이 겪었을 일들을 소설로 써보면 좋겠다.”

김씨는 1993년 시로, 이듬해인 1994년 소설로 등단했다. 그러니까 백석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 싶었다는 건 작가가 되기 전,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했던 문학청년의 희망사항이었던 셈이다.

꺼질 뻔했던 불씨가 살아난 건 2016년. 마흔여섯이라는 김씨의 나이가 계기가 됐다. 마흔여섯은 백석에게도 의미심장한 해였다. 그 두 해 전, 마흔넷이던 1956년 백석은 모처럼 공적인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기관지인 [조선문학] 9월호에 ‘나의 항의, 나의 제의’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면서다.

 

“현실의 벅찬 한 면만을 구호로 외치며 흥분하여 낯을 붉히는 사람들의 시 이전의 상식을 아동시는 배격한다 (…) 시는 깊어야 하며, 특이하여야 하며, 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 아동시에 관한 논의라는 단서가 붙어 있긴 하지만 사회주의 북한에서 과연 가능한 발언이었을까 싶게 과격한 내용이다. 김씨는 소설에서 잘라 말한다. “이 글은 (…) 당시의 시단에 대한 정면공격이었다.”(105쪽)

상황은 물론 우리의 예상대로 곧 뒤바뀐다. 소련의 스탈린 사후(1953년) 북한 사회에도 잠시 불었던 이완된 분위기가 사라지고 다시 경직된 이전 체제로 돌아가면서다. 1958년 마흔여섯의 백석은 시인으로서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는다. 1959년 벽두부터 당장 생활할 수 있도록, 해가 바뀌기 전에 중국과의 국경 부근 오지 삼수로 떠나라는 당의 처분이다.

 

삼수가 어떤 곳인가. 양강도 삼수군. 한겨울이면 수은주가 영하 삼십 도까지 떨어져 잉크마저 얼어붙는 곳이다. 백석은 이곳에서 1962년까지는 작품 발표를 한다. 하지만 1963년부터 1996년 사망할 때까지 30년 넘게 양치는 농장 노동자로 일한다.


1959년 최북단 삼수로 좌천돼 노동자 생활

 

사진:임안나

 

“다시는 평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사람의 심정이 어땠을까. 인생이 대실패, 완전한 실패라는 것.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실패로 결정됐는데, 실패라고 모두에게 알려졌는데도 그 이후로 30, 40년을 더 살아가는 삶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그걸 한 번 알아보자. 그런 생각이었다.”

문학 인생 60년 후배인 소설가 김씨는 선배 문인 백석에게 감정이입을 해봤다고 한다. 그랬더니 쓸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소설을 비로소 쓸 수 있겠더라는 것. 그래서 세상에 나온 게 [일곱 해의…]다.

그런데 이상하다. 백석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최악의 전락을 20년 전에 미리 예견한 듯한 작품을 쓴 것 아닌가.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나와…’의 그 구절 말이다. 실제로 삼수로 향하는 백석의 속마음은 세상 더럽다는 것이었을까.

 

소설가 김씨와 문답을 거듭하다 보니 세상이 더럽다는 쪽보다는 고상한 쪽으로 백석의 마음은 향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는 것이 소설가 김연수의 희망사항, 소설의 정처(定處)다. 시인들이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백석. 소설보다 시로 먼저 등단한 김씨를 포함해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이 더욱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는 작품인 ‘흰 바람벽이 있어’. 그 안에 나오는 이런 구절 비슷한 상태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 가도록 태어났다/ (…) /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김씨는 등단 이후 누구보다 열심히 써 온 작가라고 해야겠다. 굳이 얘기하자면 작품 분량, 그에 따른 성과도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적지 않은 문학상을 받았고 고정 독자도 상당수 거느리고 있다. 당장 이번 소설 [일곱 해의…]의 반응이 그걸 말해준다. 초판을 무려 2만2000부를 찍었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재판 1만 부를 추가로 찍었다.

적지 않은 분량의 김연수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하나로 꿰는, 혹은 그 작품들의 궤적을 그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얘기해볼 수는 있다. 김연수의 소설에는 서사와 어떤 간절함이 공존한다. 거칠지만 서사는 남성 독자용, 주로 상대 여성을 향한 남성 캐릭터의 갈급함, 이라는 형태로 그려지는 듯한 간절함은 여성 독자용, 이렇게 말하자. 2007년·2008년 잇따라 출간한 두 편의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밤은 노래한다]는 그런 김연수 소설의 특징들을 언뜻언뜻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199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북한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학생 운동권 주변을 그린 [네가 누구든…]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결국 만지면 부서지는 나비의 날개 같은 것이지. 현실이 잔혹할 때, 희망이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장난감 같은 거야. 그래서 나는 모든 희망을 버린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야. 희망과 함께 자신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167쪽) 어딘가 삼수로 향하는 백석의 간절함이 연상되지 않나. [밤은…]은 김연수 소설 너머로 경계를 확장해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되는 작품이다.

 

1930년대 초반 만주를 배경으로 동족끼리 죽고 죽였던 기막힌 민생단 사건을 다룬다. 이 소설의 ‘작가의 말’에는 김연수 문학의 ‘밈(meme, 비유전적 문화요소)’이라고 할 만한 대목이 보인다. “나는 원래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세계가 그 열망을 도와준다고 믿으며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다. 대신에 조건은 있다. 온 세계가 그 열망을 도와줄 때까지 계속 간절히 원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340쪽) 이런 열망에 관한 소설가 김연수의 소설적 열망은 변주를 보인다.

 

같은 ‘작가의 말’에 이런 대목이 뒤따른다. “어쩌면 열망은 그 열망이 이뤄지는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리라. 열망으로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열망은 결코 원인이 아니다. 열망은 그 자체로 결과이리라. 열망은 단지 열망하는 그 순간에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뿐이다.” (344쪽)

결국 이런 진술은 현실에서 패배한 자들의 일종의 정신승리를 말하는 것인가.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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