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이 천만 이상 관객 동원 영화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영화로서 열 번째 작품이다. 사회 전체가 이 흥행의 맥락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왜 <명량>이고, 왜 이순신일까?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10편의 한국 천만 영화 중, 게다가 최근의 흥행 영화 중 무려 세 편이 실존 인물 혹은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 <변호인> 그리고 <명량>이 그렇다. 게다가 이 실존 인물은 모두 역사의 리더들이다. 광해는 말 그대로 광해군을 소재로 삼았고,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입문 전 변호사 시절을 다루었다.
이러한 현상은 천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외화들이 판타지라는 점과 비교된다. 손 대는 것마다 얼음으로 바꾸는 능력을 지닌 얼음여왕 엘사의 이야기를 다룬 판타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과 먼 미래, 나비족이 살아가는 행성을 다루고 있는 <아바타>가 바로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던 외국 영화다. 외국 영화에서는 현실을 벗어난 판타지를 바라고 한국 영화에서는 철저히 현실적이며 사실적인 것을 원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렇듯 실존의 인물과 실제 역사를 다룬 영화들이 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영웅’에 대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화된 인물들이 모두 역사가 된 고인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없는 사람, 부재에 대한 반추는 그러한 인물들이 보여줬던 어떤 세계관과 철학 자체가 사라졌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그들은 단순히 구체적 삶을 살았던 인간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 비치는 어떤 상징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과 그 그림자를 현실에 수혈하고자 하는 대중의 욕망은 비슷하게 역사를 그렸지만 허구를 다룬 작품들 즉 <군도>나 <해적>이 관객들에게 상대적으로 외면받았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차이점은 <군도>와 <명량>에서 극명히 대비된다.
우선 <군도>는 있었을 법한, 그러니까 가상의 허구적 사건을 과거 속에서 그려낸다. 무리 진 군도를 그리는 스타일도 상당히 이채롭다. <군도>는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의 문법, 그러니까 조선 시대와 사뭇 거리가 있는 서부영화 스타일을 전적으로 추구한다. 선과 악이 불분명하다는 것도 <명량>과 대조적이다. <군도>의 악역이라고 할 수 있을 강동원은 철저한 악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콤플렉스를 지닌 사회적 희생양처럼 그려진다. 본래 악독한 것이 아니라 서자라는 출생의 한계가 그를 성격 파탄자로 키워낸 것이다.
영화적 몰입을 훼방 놓고 오히려 희화화를 유도하는 내레이션 기법도 그렇다. 영화에 대한 몰입을 지연시키려는 듯 영화를 현실처럼 받아들이려는 순간 목소리가 차갑게 끼어들어 거리를 벌린다. 상세한 설명이나 상황의 압축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인공적인 세계, 즉 영화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하지만 <명량>은 정반대다. 우선, <명량>은 음악·화면 등의 영화적 기술을 통해 끊임없이 관객의 몰입을 요구한다. 영화 <군도>에 등장하는 수많은 조연이 나름의 결정적 장면을 갖는다면, <명량>의 조연들은 말 그대로 후광에 가린 배경에 그친다. 조진웅·류승룡·김명곤 등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나름의 사연이나 에피소드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조연급 배우들의 남용이라는 비판까지 받기도 했다.
하지만, <명량>의 주인공은 정유재란이 아니라 이순신 바로 그 인물이다. 개인적 고초와 역사적 고난을 함께 맞은 위기의 남자 이순신이 순간순간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지, 즉 ‘이순신’이 보여줄 것들을 기대하는 것이다.
조연들은 그저 이순신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그래서 이순신을 빛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배역이어야만 한다. 적은 이순신의 고난을 위해 더 강하고, 단순하고, 잔인하게 묘사돼야만 한다.
더 눈길을 끄는 것, 그리고 관객의 울화를 치밀게 하는 것은 외부의 적 왜구보다 내부의 적들이다. 이순신의 승승장구를 국난 극복이 아닌 개인의 출세로 보았던 원균 무리들이나 그런 이간질에 넘어가 이순신을 벌했던 임금 선조, 그리고 장수의 말을 비웃는 부하들, 이 사면초가의 상황에 관객들은 분노한다.
그 분노는 옳은 말을 하고, 옳다고 믿는 일을 행하려하던 한 남자에 대한 뜨거운 공감이기도 하고,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이기도 하다.
<난중일기>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매우 강렬한 감정과 사건만이 건조한 몇 개의 문장으로 서술 돼 있을 뿐 투덜거림이나 엄살이 없다. 사실의 기록이 가장 소중하다는 듯, 날짜와 날씨에 무척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무척 정확하다.
1597년 음력 9월, 그는 드라마틱했던 명량의 승리도 단 한 줄로 요약하고 있다. “천행이었다”라고 말이다.
영화 <명량>은 이 ‘천행’의 의미를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편 기념비적이다 못해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명량대첩의 비밀을 해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감독 김한민은 <명량>을 두고 난중일기에 대한 착실한 해독일 뿐이라고 말했다.
두 시간여의 영화는 심리를 다룬 전반부와 전투의 스펙터클을 다룬 후반부로 나뉜다. 영화는 불신과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굴욕을 단단히 당겨 대첩의 카타르시스를 정조준한다. 천행은 여기서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신하 된 자의 충이 백성을 향하면 백성이 저절로 움직여 큰 힘이 되어준다는 것이고, 둘째는 결국 진심은 통한다는 것이다.
공감을 이끌어낸 건 바로 이순신의 감정노동이었다. 인간 이순신을 가장 괴롭힌 건 왜적이 아니라 바로 리더로서의 감정노동으로 그려진다. 우리가 공감하게 되는 지점은 그 감정노동을 해소하는 방식이다. 이순신은 우리와 똑같이 아니 우리보다 더 심한 감정노동에 시달렸지만 그는 우리와 달리 큰 길로 나간다. 일본 장수가 대도무문이라 내걸었지만 실상 관객에게 그 큰 길은 리더 이순신의 결단으로 다가온다.
천만이 넘는 관객이 <명량>에서 찾는 것은 백병전의 박진감도, 대첩의 승리도 아닌 바로 인간 이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이순신은 아무것도 결정지을 수 없는 험난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
탈영하다 붙잡혀온 부하를 지엄한 군율로 다스리고, 모두가 두려움에 빠져 있는 순간 아군과 적군의 마음속에 꿈틀대는 두려움을 역이용한다. 아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고 심지어 배신하지만, 그리고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가능성마저 불타버리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모두가 흔들리지만 적어도 흔들리는 민초와 부하들 앞에 이순신은 당당히 서 있다. 밀물에 밀려 뒤로 물러나는 배와 달리 닻을 내리고 제자리를 지키는 대장선처럼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 이순신은 그렇게 두려운 전장의 맨 앞자리에 붙박듯 서 있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소아적 출세에 목을 매는 ‘관리’가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그 판단을 실행하는 ‘사람’을 원한다. 이 소박한 이상을 실현해줄 인물이 우리의 현실, 현재 여기에 없다는 것, 그 안타까움이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소환으로 실현된다.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어려움을 판단하고 어려움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 이 혼란 속에서도 옳은 길을 가는 리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