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연암협에 은거하던 사람이(十載巖棲客)/ 새벽녘 행장 꾸려 먼 길 간다고 고하네.(晨裝告遠遊)/ 반평생을 책 속에서만 살더니(半生方冊裏)/ 오늘은 황제의 나라 중국으로 떠나네.(今日帝王州) -박지원 저, 김혈조 옮김 <열하일기> 3권 131쪽
연암의 처남이자 지기인 이재성이 연암에게 건넨 전별시다. 연암의 여행에 이재성의 가슴이 더 두근거렸나 보다. 하긴, 왜 안 그렇겠는가. 이때 연암의 나이 마흔넷, 당시로선 반백의 초로에 접어든 때였다. 절친인 홍대용은 15년 전에 중국을 다녀왔고, 이덕무와 박제가 등 ‘백탑파’ 후배들도 이미 연행을 마친 터였다. 서책과 풍문으로만 듣던 그 땅을 드디어 밟게 된 것이다. 건륭황제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단에 정사 박명원의 자제군관으로 뽑힌 덕분이다.
때는 1780년 음력 6월 24일. 연암은 드디어 압록강을 건넌다. 강을 건너 요동으로, 요동에서 심양으로, 심양에서 다시 산해관. 이 관을 건너면 황제의 궁전인 자금성이 있는 연경이다. 하지만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동북방 피서지 열하에 있었던 것. 하여, 예정에도 없던 열하라는 여정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시간으로 따지면 5개월, 거리로는 총 3천여 리에 달하는 이 ‘대장정’의 기록이 바로 <열하일기>다. <열하일기>는 세계 최고의 여행기이자 천고에 드문 ‘절대기문’이다. 대체 그 길 위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여행은 시종일관 정주와 질주가 격하게 교차하는 이중주였다. 하지만 연암은 이 리듬에 휘둘리지 않았다. 거꾸로 그걸 능동적으로 활용했다. 발목이 묶일 때는 인정물태와 청 문명의 저변을 훑고, 질주해야 할 때는 사유를 통해 ‘심연과 산정’을 넘나들었다. 고담준론과 깨알 같은 에피소드, 화려한 레토릭과 황당한 해프닝, 풍속과 역사 등 아주 이질적인 담론들이 매끄럽게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간은 시간의 펼침이고, 시간은 공간의 주름이다. 시공의 펼침과 주름, 그것이 곧 리듬이다. 이 리듬에 고유한 강밀도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여행은 곧 유목이 된다. 연암의 여행이 바로 그러했다.
연암의 청년기는 꿀꿀했다. 17∼18세 즈음, 한창 과거공부에 매진하던 그때 연암은 우울증을 앓았다. 먹지도 자지도 못할 정도로 중증이었다. 칠정이 누르고 엉기어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가 된 것이다. 그때 그는 무엇을 했던가? 저잣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났다. 분뇨장수, 건달, 이야기꾼, 역관 등등 한마디로 자신과는 전혀 다른 ‘타자들’과 접속한 것이다. 타자란 자기와 ‘다르게’ 사는 존재들을 뜻한다.
그들을 통해 전혀 다른 인생, 전혀 다른 길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꽉 막힌 기혈이 뚫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거친 이후 그는 미련 없이 생의 노선을 바꾼다. 입신양명의 레이스를 벗어나 거리의 백수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울증은 청년기의 통과의례에 해당한다.
열하는 동북방에 있는 장성 밖의 요충지다. 건륭제의 할아버지인 강희제 때부터 여름이면 늘 황제가 이곳에서 피서를 즐기곤 했다. ‘겉으로는 태평하게 휴가를 즐긴 듯 보이지만 그 속내는 험준한 요새인 이곳에서 몽고의 목구멍을 틀어막고자 함이다.’ 연경에서 열하까지의 거리는 공식적으로는 400여 리지만, 실제로는 700여 리다. 강희제가 신하들을 길들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역참을 줄인 탓이란다.
열하행이 결정되자 연암은 머뭇거린다. “먼 길을 겨우 쫓아 와서 안장을 끄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먼 길을 떠나자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요, 또 만일 열하에서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연경 유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자 정사 박명원이 이렇게 충고한다. “열하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인데,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냥 놓칠 셈인가.” 결국 그는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이 순간이 여행의 전 과정 중에서 가장 극적인 반전 포인트다. 이 여행기가 단순한 ‘연행록’에서 <열하일기>라는 절대기문으로 바뀌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연암이 중원으로 간 까닭은? 당연히 청 문명의 진수를 직접 목격하기 위해서다. 왜? 청나라는 만주족 오랑캐가 세운 나라다. 게다가 그들은 병자호란 때 조선을 무릎 꿇린 원수의 나라가 아니던가. 이후 조선은 스스로를 ‘소중화’라 자임하면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공식이념으로 내세웠다. 이 소중화주의와 북벌론의 기치를 높이 내건 당파가 노론이고 송시열 학맥이다.
연암은 바로 그 라인에 속한 인물이다. 대의 자체야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헌데, 문제는 늘 현실이다. 청나라는 역대 어떤 왕조보다도 더 역동적인 문명을 이루었다. 그에 반해 조선의 ‘소중화주의’와 ‘북벌론’은 그저 허울뿐이었다. 청나라를 되놈이라고 부정하면서 내부의 동력을 억누르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
연암은 이 사상적 배치를 전복한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비록 원수라 해도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 오랑캐의 나라는 저토록 활발한데 중화를 표방하는 조선은 왜 이토록 무력한가? 학맥이나 당파로는 주류적 라인에 속했음에도 연암은 이 불편한 진실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18세기 조선의 지성사는 두 개의 흐름으로 양분되었다. 연암그룹과 다산학파. 이 둘은 당파적으로 노론과 남인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보다는 사상적 차이가 더 극심했다. 전자는 명청 교체기의 양명좌파와, 후자는 서양기술 및 천주교와 연결되었다. 물론 연암그룹도 천주교와 서양문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술적 차원이었을 뿐 교리적 차원이 아니었다. 그래서인가. 인연이 계속 어긋난다. 연경에 도착하자마자 천주당을 찾아가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열하에서도 두루 탐문해보지만 선이 영 닿질 않는다. 대신 엉뚱하게 티베트불교와 마주친다.
여행의 입구였던 저 요동벌판에서 외친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탄식이 열하라는 시공간을 만나 한층 더 강렬하게 변주된 셈이다. 결국 연암의 시선에서 보자면, 인생이란 ‘길 없는 대지(크리슈나무르티)’ 위를 걸어가는 여행이다.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그런 여행! 이 ‘길 없는 대지’ 위에선 잠들었던 말들이 웅성거리고 천지의 비의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때 길은 글쓰기의 향연장이자 전쟁터가 된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월간중앙, 2014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