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는 사람들의 오호가 강한 학자이다. 그는 ‘거리의 인문주의자’라고도 불린다. 책을 쓰는 것마다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인문학 책은 1천 부를 팔기 힘들다는 출판계 현실 속에서도 강신주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 <철학 VS 철학> 등 다수의 저서를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렸다. 한 해 동안에 <강신주의 감정수업> <강신주의 다상담> 등 무려 6종의 신간을 쏟아냈다. 이 어마어마한 라이팅 파워 자체가 연구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강신주


강신주의 강점은 특유의 기획력에 있다. 사물과 현상을 종합·분석하고 합종연횡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비틀어보기에도 능한데, 그 비틀어보기에 흔히 동반되는 경박함이 없다. 그의 최대 강점은 문학에 대한 관심과 소양이다. 그의 문학적 소양은 2012년 발간된 <김수영을 위하여>를 통해 입증됐거니와, 그는 그 책에서 시인 김수영의 삶을 반추하며 그를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바 있다.

강신주는 요즘 영화에 빠져 있다. 지난 7월부터 영화평론가 이상용과 함께 ‘영화와 인문학’ 마라톤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CGV압구정 무비꼴라쥬관에서 매주 열리는 이 강의는 내년 1월 끝난다. ‘강신주·이상용의 씨네샹떼’다. 25편의 세계 영화사 속 걸작이 강의 소재로 다뤄진다.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1895), 현실과 꿈의 경계를 다룬 <셜록 주니어>(1924),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1939),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1960),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등이다. 


책장 하나에 빼곡히 차 있는 영화 DVD 보기, 이론서 읽기에 요즘 푹 빠져 산다고 한다. 내년 3월경 그 결과물이 800쪽짜리 단행본으로 나온다. 영화 해석의 새로운 차원을 열겠다는 그의 야심이 배어 있는 기획이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1903∼70)가 요즘 그를 사로잡는 또 하나의 테마다. 내년 3월 예당 갤러리가 그의 전시회를 여는 게 계기가 됐다. 그에 대한 책을 쓰고 전시회 기획에도 관여한다. 

마크 로스코는 두 개의 대비되는 붉은 색채와 그 사이의 심원한 간극을 즐겨 그린 20세기 세계 미술계의 거장이다. 강신주의 표현을 빌면 “화면의 색이 눈에 엄청난 힘으로 밀려들어오는 느낌을 주는, 마치 음악과도 같이 마음을 정화하는 작품”을 그렸다. 

문학에서 영화로, 또 미술로…. 이 철학자의 끊임 없는 영역 확장을 경이의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그는 관심사가 확장된 것이 아니라 ‘옮겨간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시가 재미 없어져 안보는 거다. 영화가 재미있으니까 영화를 보고, 시는 이제 재미 없으니까 안보는 거다. 좋아하는 것이 바뀌는 것일 뿐 확장은 아니다.”

< 그의 인터뷰는 5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중 중요한 대목만 옮겨본다. 


Q. 사람들의 삶이 고단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힐링이란 말과 개념이 범람하죠. 혼란스럽습니다.

사람들은 힘들 때 술을 마시죠. 그것도 일종의 힐링이에요. 그러나 술 마신다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청년들이 클럽 가는 것도 힐링 행위 중 하나죠. 자본주의 삶에서 오는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힐링이라면 그 힐링 또한 하나의 상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상처를 준 체제 또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약을 주는 격이랄까요? 힐링은 완벽한 치유가 아니고 반창고를 붙이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Q. 진정한 치유를 지칭할 때 ‘극복’이란 표현이 더 합당 할까요?

나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가를 정직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시작입니다. 고통 속에 매몰된 자의 아픔은 이해하지만 본 척하면서 확 피해버려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세상이 변하고 나도 변해야 치유가 오는 건데, 힐링은 세상은 가만히 있는데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겁니다. 관념적으로 세상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환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실로 다시 돌아오면 다시 술을 마셔야 해요.


Q. 정치도 성(性)도 타락했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옵니다.

섹스는 남녀관계의 완성이란 관점이 우리의 성과 사랑을 타락시켰습니다. 섹스는 남녀관계의 시작일 뿐입니다. 신혼여행에 가서 첫 관계를 맺겠다는 커플의 성 관념을 뒤집어보면 결국 섹스하기 위해 결혼한다는 말이 되어요. 섹스가 목적이기 때문에 1∼2년 사이에 관계가 심드렁해지고 둘 중 누군가 바람을 피우게 되죠. 

어떤 남녀가 잠을 같이 자고, 우리 이제 뭐 하지, 이렇게 되는 거죠. 섹스를 한 후 남녀가 할 일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저 사람과 영화도 보고 싶고, 음악도 듣고 싶다…. 

그래서 섹스는 관계의 시작이 될 때에만 건강해집니다. 타락한 섹스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본에는 아주 묘한 성매매 관행이 있어요. 여자가 온 몸을 다 벗고 보여주는데 만지면 안 된다는 조건이에요. 관음성의 섹스죠. 섹스가 관음성이 되면 정치와 연결됩니다.

강신주



Q. 소련이 무너진 뒤 20년이 더 흘렀는데도 한국사회엔 보수와 진보의 이념논쟁이 치열합니다. ‘수구 꼴통’이니 ‘좌빨’이니 하는 말이 횡행하고, 편가르기식 사고와 판단이 너무도 일상화돼 있어요.

한국 소설가 중엔 이병주와 최인훈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보다 이병주의 <지리산>에 더 공감합니다. <지리산>의 주인공 중엔 이념을 혐오하는 지식인 하영근이 나오죠. 끊임 없이 고뇌하고 의심하는 회색분자입니다. 

최인훈의 <광장>에는 거제도 포로 석방 때 남과 북을 거부하고 제3국인 인도행을 택한 이명준이 나옵니다. 그도 역시 ‘회색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란 회색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에 매몰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인문적 인간’은 회색인이 될 수밖에 없어요. 

거제도 반공포로 석방 시 12명이 인도행을 선택했습니다. 회색인들이죠. 남북한을 통해 그런 회색인이 아주 많아지면 저는 통일이 이뤄질 수 있다고 봐요. 사람을 중간에 설 수 없게 하는 사회는 잔혹합니다. 계속 선택을 강요하고, 결국 중간에 있는 사람이 죽어요. 


Q. 요즘 사람들은 인문주의, 인문학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인문학’이란 말이 누구나 편리하게 갖다 쓰는 상투어가 된 느낌도 듭니다.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어요. 인문학의 주어는 ‘나’입니다. ‘나’라는 고유성이 드러나지 않은 저작은 인문학 책이라고 볼 수 없어요. 

‘우리’라는 것을 섣불리 언급해선 안 된다는 말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시인 김수영이 당시 참여 시 계열의 시를 비판한 것은 그들의 시에 ‘나’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나’라는 것이 먼저 드러나서 ‘우리’라는 대표성이 발현되면 좋은데, 생뚱맞게 ‘우리’가 먼저 등장하는 거죠. 그래서 억압적 체제 하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재미가 없습니다. 문학 작품에서는 ‘내’가 움직이면서 민중이 드러나야 해요. 작가가 민중을 끌고 가려 하거나, 민중 뒤에 숨어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김수영은 시를 ‘온몸’으로 쓴다고 했어요. 여기서 ‘온몸’이란 바로 ‘나’이지요. 

민중이나 거대한 역사는 관념입니다. 머리 속에서 짱구를 굴리는 건 관념이지시가 아니다, 온몸으로 부딪혀야 비로소 시가 된다고 말합니다. 내 몸을 밀고 들어가 시를 쓸 수 있다면 민중이나 혁명이 드러나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에요. 김수영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나’라는 생각이 없으면 시가 아닌 거죠. 인문학은 창작의 주체, 바로 그 사람이 느껴지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기 얘기가 성숙돼서 보편성의 공감을 획득해야지 갑자기 보편성을 먼저 생각하면 가짜가 됩니다.


Q. ‘위에서 내려다보려 할 때’ 지식인은 파국을 맞게 되는군요? 우리 사회 보수세력의 직분과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선배와 후배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저는 선배를 ‘밥 사주는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밥을 사주면서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선배의 직분입니다. 선배가 밥 먹는 자리에서 말을 많이 하려면 밥을 자주 사줘야 합니다. 

카드(회사 카드 말고)를 먼저 긋고 일어나면서 ‘잘들 놀다 와라’ 해야 선배란 말입니다. 그런 선배가 밥을 사주면 후배는 선배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선배 같은 존재가 바로 보수입니다. ‘가오’를 잡을 수 있어야 보수입니다. 

‘나는 선비다, 너희들하곤 다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장에 나가는 장수는 가장 먼저 적진에 가서 가장 늦게 빠져나와야 합니다. 부하들이 그러죠. 저 사람은 비범하다고. 자신의 권좌가 그래서 유지됩니다. 

태종이 신문고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영의정 한 사람이 하인을 시켜 그 신문고를 치게 합니다. 자기도 백성 중 하나라면서. 장수가 도망치면서 ‘나도 인간이다’라고 말합니다. CEO는 정리해고를 하면서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수가 아닙니다. 전부 가짜죠. 우리 사회엔 진정한 보수가 없습니다. 헌신과 인내, 처절한 노력이 필요한데, 어디 보수적 선비 되기가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진짜 보수가 출현하면 진보 세력도 그를 만만하게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진짜 진보가 있느냐. 저는 없다고 봅니다. 진보의 권위주의도 만만치 않습니다. 진보가 보수 행세를 합니다. 앤디 워홀과 같은 사람이 진짜 진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회에 등원할 때 머리를 물들이고 청바지를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진보는 기존의 형식과 권위에 도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갈등하면서 공존해야 사회가 건강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진보는 생명력과 활력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Q.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춘, 지식과 사상에 목마른 젊은이가 많습니다. 독서를 해도 지혜는 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과 사랑, 공부와 일상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답을 구해보겠습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읽는’게 아니라 ‘읽어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작가의 글에 빠져 다른 글은 통 읽지 못하게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아주 절실하고 치열한 독서체험이죠. 

자기 실존의 스타일과 리듬을 가진 작가와 만났을 때 그 용솟음치는 시너지는 대단합니다. 그래서 진짜 혼을 바쳐 읽어버리는 것이죠. 어린 아이의 책 읽기와 닮았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른 채 책 한 권을 몰입해 다 읽어버리는 아이들의 순수한 경험입니다.

<철학 VS 철학> <감정수업> 등은 이렇게 ‘읽어버렸던’ 독서의 결과물입니다. 다독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100명의 여자와 잠을 잔다고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죠. 한 여자와 정말 지독하게 사랑을 해야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됩니다. 

젊은 여자들이 그러죠. 나는 쿨하게 마음에 드는 남자와 하룻밤을 잔다고. 그럼 저는 묻죠. 잔 거냐, 자버린 거냐. 그냥 잔 거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자위행위에 불과한 거다, 이렇게 말해줍니다.

강신주


Q. 강연을 많이 다니면서 무엇을 배우고 느끼나요?

짧은 시간 안에 청중과 교감하는 법, 그리고 그들이 듣고 싶은 것과 그 수준을 파악하는 법, 주제 전체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가장 집중도가 높은 토픽을 3시간 정도 유지하는 법 등을 익히게 되었죠. 기업에도 강연을 많이 다녔는데 CEO가 절반은 좋아하고 절반은 싫어해요. 

신입사원 강연 때 그러거든요. 여러분이 회사를 그만둘 때를 알려주겠다, 이 회사 아니면 밥줄 끊어진다는 생각 들기 전에 그만둬야 한다고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회사에 뼈를 묻어라’는 말이거든요. 기업에서는 기겁을 하죠. 

강연 을 하다 보면 50∼60대의 호응이 아주 높은 경우가 있습니다. 원래 제가 그 정도 연배 사람들과 친하게 지냅니다. 그 사람들은 인생을 충분히 살아서 관념적이지 않아요. 20대가 제일 어렵습니다. 관념적이거든요. 

특히 대학원생들이 저를 싫어합니다. 자신들이 읽은 몇 가지 명제나 이론을 토대로 엉터리 질문을 하거든요. 제가 그럽니다. ‘그런 질문으로 해서 지적으로 보이고 싶은가? 그 입 닥쳐!’라고요.


Q. 글솜씨와 강연 능력, 독창적인 사유로 많은 독자와 팬을 확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절정의 인생을 맞고 있는 것 아닌가요?

방송에도 출연하고 유명세를 타다 보니 CF 제의도 여러번 들어왔습니다. 몇 개 대학으로부터는 전임 교수직 제안도 받았고요. 그러나 다 거절했습니다.

제가 철학자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스트셀러의 저자이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줬다는 게 정점인데, 정점을 찍었다는 생각이 들때 저는 빨리 내려옵니다. 정점에서 욕심을 내면 추락합니다. 요즘 말로 한방에 훅 가는 거죠. 

김수영 시인의 말처럼 글쟁이는 글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산을 타봐서 아는데 툭툭 빠져나와야 합니다. 거기에 갇히면 에베레스트산 정상에서 얼어 죽어요. 사람들은 베스트셀러 작가 강신주를 상품으로 소비합니다. 그리고 관음증적으로 관찰을 해요. 정상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돈까지 주면서…. 그때가 제일 위험하지요. 내려와야 합니다. 

나의 글을 읽고 삶에 변화가 생겼다는 독자의 편지를 받는 것만으로도 저는 최고의 인생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진정한 예술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갖춘다는 말은 맞는 말이죠. 진정한 예술은 대중성과 상관 없다, 이건 개소리죠. 

작품이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란 걸 잊으면 안돼요. 시인 파울 첼란의 말대로 작품은 타인에게 보내는 유리병 편지인 거죠. 드높은 작품성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았던 베토벤의 경우가 참 행복했어요. 작가로서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더없이 훌륭한 삶을 산 것이겠지요.

강신주는 거칠다. 그는 글에서도 말에서도 마초성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자리를 안다. 거리에서 인문학을 외치면서 철학자임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어쩌면 그의 이야기는 기성 세대를 관통하는 이야기일른지도 모르겠다. 절정의 인생은 욕심을 내야할 곳이 아니라 빨리 내려와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한기홍 기자
[월간중앙 201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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