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은행을 포함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모든 정책행위는 부채 디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한 몸부림에 다름없다. 즉, 물가상승률이 낮아지거나 물가가 아예 하락하면 부채 원금의 실질 상환 부담이 증가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대출을 꺼리고 소비를 줄인다. 경기와 물가가 더 낮아지고 빚을 못 갚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로인해 경기가 침체되고 물가가 하락하는 악성순환고리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부채 디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일정한 수준으로 안정되어 있는 동안에는 저물가 현상이 나타나더라도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약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흔들리고 디플레이션 기대가 형성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심리는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물가는 실제로 떨어지게 된다.
저물가는 그 자체로 중앙은행에 위협이 되기보다는, 장기간 지속될 경우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저하시키기 때문에 디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야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부채 디플레이션의 방아쇠를 당기는 ‘기대 인플레이션의 저하’는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의지와 능력에 대한 불신을 의미한다. 그래서 중앙은행들은 기대 인플레이션이 흔들릴 조짐을 보일 때마다,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의지와 능력이 의심받을 때마다 뭔가를 보여주려고 애쓰게 된다
지금은 부채가 턱밑에까지 차 있다. 어지간한 자극이 아니라면 부채를 더 늘려서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만한 화학적 동기와 물리적 여력이 없다. 오히려 빚이 너무나 많아 약간의 자극만으로도 ‘실질 상환 부담 공포’가 자극될 정도다. 지금 물가는 ‘하방’ 순환고리 형성에 취약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좋은 디플레이션(benign deflation)’이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좋은 디플레이션이란 수요 부진이 아닌 공급충격에 의해서 물가가 떨어지고 실질구매력이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생산성 혁명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에너지원을 발견했을 때 발생한다. 그러나 좋은 디플레이션이라 하더라도 강도가 지나치면, 요즘 같은 때에는 악성(malicious)으로 변질될 수 있다. 잔뜩 짊어지고 있는 부채의 실질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가 행한 2차 양적 완화(QE2)는 경기와 고용보다는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었다. 연준은 달러화를 절하해 원유와 같은 원자재 가격을 인상시키는 방법을 동원했다. 설사 그것이 경제 주체들의 실질 구매력을 일시적으로 저해하는 것이더라도 당시 다시 형성되고 있던 디플레이션 심리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연준은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부채 부담을 안고 있다. 이 막대한 부채 부담을 털어내는 과정은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누군가에는 반드시 엄청난 고통이 된다. 인플레이션으로 빚을 해소한다면 채권자(저축자)가, 실질 소득의 증가를 통해 해소하려면 채무자가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 그리고 부채 감축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세계 경제의 빚은 지금도 계속 늘고 있다. 관건은 중앙은행들이 돈을 더 찍어낸다고 해서 과연 인플레이션을 살려낼 수 있느냐는 점이다. 지금 중앙은행들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여기에 있다.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지금 금융시장에서는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있다. 화폐 증발은 과거(old normal)에는 그 효과가 즉각적이었다.
그러나 부채가 목에까지 차 있는 지금(new normal)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인플레이션은 공급 능력을 초과하는 새로운 수요가 등장하는 때에만 발생할 수 있다. 모든 경제 주체들의 빚이 한계치로 불어나 있는 현 상황에서 그나마 무리를 해서라도 지출을 늘릴 수 있는 곳은 정부뿐이다. 재정지출을 늘리지 않는다면 중앙은행들의 인플레이션 기대심리 사수 노력은 불발에 그칠 수 있다.
지금은 모두가 경쟁적으로 돈을 풀어 자국의 화폐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환율전쟁의 상황이다. 혼자서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부양에 나서면 그 과실은 전 세계로 흩어져 버린다. 수입이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9~2010년 사이 중국의 대대적인 경기 부양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따라서 이 문제는 주요국 정부들의 합의와 공조를 통해서만 풀 수 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세상은 더 위험해진다. 돈은 갈수록 더 많이 풀려 나오고 있으며, 중앙은행들에 대한 신뢰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주요국들이 공동 부양에 합의하려면 상황이 좀더 심각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적 명분을 얻을 수가 있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이코노미스트, 12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