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은 기업들이 설립되었다 사라진다. 세계적인 저성장 기조를 보면 앞으로는 성장보단 생존이 최우선 과제가 될지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장수기업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많이 생기지만 쉽게 사라지고, 기업 승계도 활발하지 않다. 장수 기업은 진짜 헛된 꿈일 뿐일까?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의 21개의 크고 작은 장수기업을 취재했다. 그들의 장점은 분명했다. 위기를 돌파하는 도전정신 (Challenge spirit), 건전한 오너십(Ownership), 원활한 세대 교체(Alternation of generations), 지역사회와의 상생(Coexistence), 기술전승(Hand down technique)이 공통적인 장점이었다.
▒ 한국의 백년 기업, 어떤 곳들이 있을까?
기업들은 세계적인 저성장으로 경영 환경이 악화된데다, 치열한 경쟁 구도 탓에 생존 자체가 위협 받고 있다. ‘성장은커녕 안 망하면 다행’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장수기업의 탄생은 개별 기업의 생존 문제일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를 논할 때도 중요하다. 장수기업이 늘수록 안정된 고용과 부가가치의 증가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스피 상장사 기준으로 국내 기업의 일반적인 수명은 약 30년이다. 실제로 장수기업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삼는 장수의 기준은 30년 아닌 100년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현재 100년 이상 존속해온 국내 기업은 두산(1896년 창업)과 동화약품공업(1897년 창업), 신한은행(1897년 창업) 등 7개 정도다. 기사 더보기
▒ 백년 기업으로 가려면, 초장기의 도전 정신을 늘 간직해야
혁신과 업력은 반비례한다? 얼핏 들으면 모순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혁신하는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회사가 쓰러지지 않고 오랜 기간 버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실제로 ‘혁신 기업’이란 자랑스런 이름표를 찬 기업의 상당 수는 대체로 업력이 짧다.
미국 경영 월간지 ‘패스트컴퍼니(Fast Company)’가 매년 선정하는 ‘50대 글로벌 혁신 기업(The World’s 50 Most Innovative Companies)’으로 선정된 기업들의 평균 업력은 27년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혁신 기업이 2000년 이후에 설립됐다는 말이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연구에 따르면 대기업과 중소·벤처의 혁신성은 20배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 대기업은 혁신에 취약하고, 중소·벤처는 시장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장수기업의 첫 번째 DNA를 엿볼 수 있다. 바로 혁신에 도전하는 정신(Challenge Sprit)이다. ‘혁신 기업의 상당수가 업력이 짧다’는 사실을 거꾸로 보면 신생 기업의 도전 DNA를 오래 유지한 기업이야말로 장수기업으로 발돋움할 확률이 높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일본 기업은 벤처의 ‘불굴의 정신’을 보유한 기업이 많다. 쌀과자를 만드는 아미다이케 다이코쿠의 고바야시 사장은 1995년 대지진 때 위기에 직면했다. 육로가 끊어지니 납품 기일을 맞추기 어려운 건 당연지사. 납품을 받는 업체들도 제대로 과자가 도착하지 못할 걸로 으레 짐작했다.
하지만 고바야시 사장은 아예 배를 빌려서 납품 기일에 맞춰 과자를 운송했다. 납품 기일을 맞추고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아미다이케 다이코쿠를 보고 경쟁 업체들도 혀를 내둘렀다. 에도 시대인 1805년에 설립된 과자가게가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비결이다.
장수기업의 도전정신은 필요하면 주력 사업도 포기하게 만든다. 특정 분야에서 이미 수익을 내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중간은 갈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을 과감히 접고, 완전히 새로운 사업에 뛰어든다는 의미다. 규모가 커질수록 기업의 의사 결정 속도는 늦어지게 마련이다. 대기업일수록 신사업을 추진하는 게 어렵다.
하지만 장수기업들은 신사업에 뛰어드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기존 사업을 접고 신사업에 ‘다걸기’를 하는 과감함이 돋보인다. 이윤철 산업정책연구원 이사장은 “장수기업이 한 영역만 고수하면 혁신할 수 없다”며 “영속하려면 업종을 뛰어넘는 과감한 도전과 혁신이 늘 필요하다”고 말한다. IBM이 대표적 사례다. 기사 더보기
▒ 장수기업 = 가족기업 공식은 없다! 소유의 영속성 보다 존속의 영속성에 무게
유럽 지역엔 장수기업이 매우 많다. 장수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정확한 숫자는 달라지겠지만 2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업만 유럽 내에 약 4000여개다. 독일이 1563개로 가장 많고, 프랑스가 331개로 그 다음이다. 장수기업 경영자들의 모임도 활발하다.
영국 기업이 중심이 된 ‘300년 클럽(Tercentenarians Club)’과 프랑스 장수 중견기업 모임인 ‘소코다(Socoda)’ 등이 대표적이다. 유럽과 일본 등 세계 각국의 200년 이상의 장수기업 경영자 모임인 ‘레 제노키앙(Les Henokiens)’도 잘 알려져 있다.
가족기업이 많은 유럽에선 의외로 ‘반드시 내 자식이 사업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덜하다. 오히려 자녀의 선택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자발적인 승계를 유도하고, 혹 여의치 않은 경우라면 가업을 다른 가문에게 이양하는 일도 흔하다.
장수기업이라고 무조건 가족이 직접 경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최근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전문가에 경영을 맡기는 곳도 많다. 이익 분배에 따른 가족 간 분쟁 심화, 가족 구성원을 우선시하는 인사제도 등 가족경영의 단점이 부각되면서다.
프랑소아 꽁땅 르 고엑스 회장은 기업가라면 좀 더 큰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저는 경영자가 유지하고 지켜가야 할 건 부(지분)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축적된 기업의 가치(기술력)라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바뀌어도 이건 사라지지 않죠.
지금은 이 회사가 내 것이지만 시간을 길게 보면 저도 이 회사의 중간 관리자쯤 될 겁니다. 경제 생태계 안에서 기업은 사람처럼 태어나고, 죽습니다. 누구의 것이랄 게 없죠. 내 자식이 회사의 다음 주인이 돼서 나쁠 것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누가 주인이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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