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첫 번째 천만 영화로 기록된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처럼 흥남부두에서 목놓아 누이를 찾던 또 다른 '덕수'들은 아직까지도 그 장면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 흥남부두에선 무슨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함흥과 흥남 일대로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흥남 교두보를 끝까지 지켜내느냐, 포기하느냐의 문제였다.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한 유엔군사령부는 12월 8일 철수 명령을 내린다.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전개된 흥남철수작전의 시작이었다.
우선순위는 병력이 1순위, 군수물자가 2순위, 초기만 해도 민간인은 철수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군인 신분이 아니면 배에 오를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당시 1군단 사령관 김백일 장군은 피란민의 자원입대 신청을 받기도 했다. 이북 청년들을 국군 병력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 같은 방식으로 피란 온 인원이 2천 명을 넘는다.
▧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 박사, 10만 피란민을 구하다
그런 기적을 만든 사람 중에서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린 현봉학 박사도 있다. 그는 당시 민사부 고문으로 미 10군단에 소속돼 통역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군단의 총책임자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을 찾아가 함흥 사람들의 사정을 설명하고 민간인의 철수를 고려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당시 흥남부두와 선박 규모로는 피란민 모두를 대피시키가 불가능했을뿐더러, 피란민들 중 인민군이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알몬드는 섣불리 민간인을 철수 계획에 포함시키기 어려웠다. 군의 편의를 위해서 그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현 박사의 설득에 결국 알몬드는 민간인 구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1950년 12월 초순, 4천여 명의 함흥 사람이 함흥에서 흥남으로 향하는 열차에 빈틈없이 몸을 실었다. 열차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은 얼어있는 논밭을 걷고 성천강을 건너서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어렵사리 흥남에 도착한 피란민의 수가 10만 명을 넘었으나 그들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흥남에는 추위를 피할 마땅한 시설이 부족했던 것이다. 버려진 학교나 빈집에 들어가 지낸 운 좋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학교 운동장 같은 노천에서 생활했다.추위를 견디지 못해 동상에 걸려 목숨을 잃은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19일,마침내 민간인들의 승선 허락이 떨어져 약 10만 명의 피란민이 부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크리스마스의 기적 메러디스호, 마지막 피란민을 태우다
또다른 기적의 주인공은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다. 메러디스호는 7600t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무역선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6개월 동안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다. 이 배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이 긴급타전을 받아 흥남부두에 도착했을 때는 철수작전이 진행되던 12월 20일이었다.
메러디스호에 승선한 미군 대령 중 한 명은 "당신이 자원하여 배를 갖고 들어가 해변의 피란민 중 얼마라도 태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소."라고 말했다.메러디스호는 총 59명의 인원이 탈 수 있도록 설계된 화물선으로, 이미 선원과 승무원이 타고 있기 때문에 12명의 여유 공간만 있고 여분의 물과 식량도 남아있지 않았다. 미처 하역하지 못한 300t의 항공유가 있어, 공격을 받기라도 하면 선박 화재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라루 선장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피란민 구호를 약속했다. 항공유를 제외한 모든 물자를 내려놓은 뒤, 12월 22일 피란민 탑승 작업이 시작됐다. 무려 1만4천 명의 피란민이 이 배에 올라탄 메르디스호는 12월 23일에 출항했고, 미군은 중공군의 항구 사용을 막기 위해 흥남부두를 폭파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이 피어났다. 12월 23일부터 25일까지 3일 동안 5명의 아이가 태어났던 것이다. 메러디스호의 선원들은 아기들을 'Kimchi 1'부터 'Kimchi 5'라고 불렀다. 이렇듯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이끌어낸 메러디스호는 '세계 전사(戰史)에서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인명을 구한 배'로 2004년 세계 기네스북에 올랐다.
▧ 흥남철수 64주년, 여전한 이산의 아픔
흥남철수 당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대부분 거제도에 정착했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 왔지만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다. 그 당시 거제도는 외딴 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피란 과정에서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가족과 이별한 이들, 서로 다른 배에 타는 바람에 만나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산의 아픔은 흥남철수도 비껴갈 수 없었다.
그런 아픔을 그나마 어루만져준 건 인심 좋은 거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피란민에게 집을 빌려주거나 마당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도록 편의를 봐줬다. 유엔군으로부터 배급받은 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종교의 힘도 컸다. 흥남철수 당시 단체로 내려온 함주군 덕천교회 사람들은 잃어버린 가족을 만나기 위해 거제도 교회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감동의 흥남철수작전이 일어난 지 64년. 하지만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는 점점 줄어든다. <국제시장>의 흥행으로 흥남철수작전이 언론의 반짝 조명을 받았지만 관심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영화 속의 '덕수'는 천만 관객을 울렸지만 현실 속의 수많은 '덕수'는 백발이 된 나이에도 피란 과정에서 헤어진 가족을 애타게 찾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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