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대 국왕 정종은 자진하여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또 아들들이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승려로 만들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이토록 무력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정말 무력하기만 한 왕이었을까?
▒ 방원의 반란, '제1차 왕자의 난'
정종(방과)은 태조 이성계의 본처인 신의왕후 한 씨 소생의 6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 방우가 아버지가 역성혁명을 일으킨 사실에 분노하여 해주에 은거하며 폭음을 일삼다가 목숨을 버린 탓에, 그는 훗날 조선의 제2대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편, 태조 이성계에게는 후처 신덕왕후 강 씨가 있었다. 그는 권문세가 출신으로 이성계를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한 창업의 대표적 조력자였다.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를 태조의 사람으로 만드는데 정치력을 발휘한 이성계의 정치적 동지이기도 하다. 그런 강 씨에게는 무안대군 방번과 의안대군 방석이 있었는데 태조는 그들을 끔찍이 생각했다.
정종 '후릉수개도감의궤'
그런 연유로 태조는 다음 왕위 자리를 여덟 번째 아들인 방석에게 물려주려고 하여, 불과 11살이었던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를 등위 시킨 일등공신이었던 방원은 분노했고, 이 무렵 신권 정치를 내세운 정도전의 사병혁파정책은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을 극대화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방원은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들어 형제들 수중의 사병을 동원하여 선제공격했다.이로서 이복형제인 방석과 방번이 제거됐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이다.
▒ 방원 대신 왕위에 오른 정종
'왕자의 난' 이후 태조는 물러나고, 실세는 방원에게로 돌아갔다. 훗날 정종이 된 방과는 원래 왕위에 뜻이 없어,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됐을 때도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업적은 모두 정안군(방원)의 공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며 극구 사양했다.
태종 이방원
하지만 방원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나서 방원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것은 누가 봐도 좋은 모양새가 아니었기 때문에 방원은 일단 방과를 왕으로 내세웠다. 방과에게는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양자가 돼 적통을 물려받는다면 세간의 눈총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만큼 방원은 주도면밀했다.
정종 2년 1월에는 이른바 '방간의 난'인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지만 방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고, 하륜 등 방원 측근들은 정종에게 왕위를 이양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주변을 의식한 방원은 정종의 양자로서 왕위를 계승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 무력한 리더? 지혜로운 리더?
정종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안분지족의 삶을 선택했다. 그것은 유약함으로 생존을 도모한 다른 방식의 전략이자 리더십이었다. 위험을 짊어지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왕위에 오르게 된 것도 태종 이방원의 허수아비 노릇을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싸움에도 뛰어들지 않았다.
정종 후릉(사진출처 : 사단법인 정통풍수지리학회 http://poongsoojiri.co.kr/)
하지만 이러한 그의 행동은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나름 생존전략이 남달랐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재위 시에는 정무에 힘쓰기보다 격구놀이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보전했고, 권좌에서도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노년의 평안을 추구했다. 그래서 태종 역시 2년간 자신을 위해 임시로 왕위를 맡아준 형에 대한 보상으로 정종의 목숨을 보전하고 영구히 곁에 두어 말동무로 삼았다.
한마디로 정종에게서는 과욕을 자제하는 능력으로 생존의 방편으로 삼고, 유약함을 가장한 카리스마를 찾아볼 수 있다. 덕분에 정종은 2년 2개월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을 통해 왕좌에서 물러나 죽을 때까지 19년간의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무력한 리더였다기보다는 자신만의 생존방식을 알았던 지혜로운 리더였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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