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이해하는 눈높이 창으로 일본의 젊은이들의 행동을 빼놓을 수 없다. 2030세대다. 청년은 오늘이자, 내일이다. 일본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할 수 있고, 안정되고 정확한 시선이다. 사실 청년이란 창을 통하면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도 눈에 들어온다. 눈높이를 일본 청년에 맞추면 한국 청년의 내일이 보인다. 글로벌 시대와 함께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사회구조와 문화권이란 점 때문이겠지만, 양국 젊은이들의 의식은 서로 비슷하게 발전하고 있다.
예외도 있겠지만, 오늘날 한국에 일어나는 사회현상의 대부분은 이미 일본을 거쳐간 어제의 사건에 해당된다. 일정한 시차와 함께, 장점은 물론 비난받고 저평가되는 일본의 단점들조차 한국에 밀려온다. 넘치는 비정규직 근로자, 청년 자살자, 학교 내 왕따(イジメ), 경제인구 감소, 만혼 독신여성의 증가 같은 사회적 현상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악화, 관(官)피아에 휘둘리는 무책임한 조직,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정부부처 간 권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어제와 오늘은 한국의 오늘과 내일에 해당된다.
2030세대, 나아가 십대는 세상사에 민감하다. 인터넷 덕에 국경이 사라지면서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피부로 체득한다. 일본 청년들의 상황이나 세계관이 실시간으로 한국에 전달된다. 일본의 2030세대를 정확히 본다는 말은 한국 청년들의 오늘과 내일을 읽을 수 있다는 의미다.
지난해 일본 최고의 유행어는 ‘배로 갚아주겠다(倍返し)’이다. 지난해 10월호 <월간중앙>에 기고했듯이, 복수를 다지며 입술을 깨무는 핏빛 결의다. 일방적으로 당했지만 당한 것의 두 배 아니 열 배로 돌려주겠다는 복수의 비명이다. TBS 텔레비전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半沢直樹)> 속의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는 올해 최고 스타로 부상한다. ‘배로…’라는 말은 이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일본 전역을 강타한다. 특히 한자와를 대변하는 일본의 허리, 즉 30대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말로 풀이됐다. 21세기 초 일본인의 경고이자 결의가 일본의 허리에서 쏟아진 것이다.
필자는 당시 드라마를 보면서 ‘배로…’ 현상을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인의 자세로 해석했다. 중국에 대해, 나아가 불편한 관계 속의 한국에 대한 호전적 결의로 풀이했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한자와의 유행어와 함께 일본은 더 이상 중국에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센카쿠(尖閣, 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문제에서 보듯, 어느 틈엔가 미국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미·중 대리전으로 만들어가는 양상이다. 과거와 같은 ‘헤이와보케(平和ボケ: 평화지상주의)’로서의 일본이 아니다. 결전을 각오하는 비장한 분위기가 열도 전역에 만연해 있다.
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역사를 대하는 자세가 과거와 전혀 다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그의 부인 아키에(昭恵)는 친한(親韓) 수식어를 연발하는 부부다. 한글 공부에서부터 김치와 한류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들여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다. 필자는 그 같은 저자세의 원천이 ‘배로 갚아주겠다’는 심리에 있다고 믿는다. 입술을 깨무는 강한 결의가 있기에,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의 저자세를 연출해낼 수 있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배로…’라는 말은 버블세대에 만연한, 금융계의 무책임과 탐욕에 대한 경종에서 시작됐다. 실적위주로 경쟁을 조장하고, 문제가 생기면 뒤로 빠지는 무책임한 선배들을 고발하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슬로건이다. 애매한 관행과 법으로 젊은 부하직원들을 착취하고 희생양으로 만드는, 상명하복(上命下服) 세계에 대한 울분이기도 하다. 30대만이 아니라, 대학에 다니는 20대와 일찍부터 사회에 진출한 십대가 느끼는 시대공감이 ‘배로…’라는 유행어 속에 압축돼 있다.
일본에서 40대는 30대, 20대로 연결되는 공통적인 시대정신을 갖고 있다. 40대가 사회에 진출한 것은 1990년대다. 버블이 끝나면서 끝이 안 보이는 추락만이 기다리던 시기이다. 추락은 아베가 총리에 오른 2012년 말까지 계속된다. 흔히 말하는 ‘잃어버린 20년’이다. 버블이 꺼진 ‘잃어버린 20년’은 40대·30대·20대가 공유하는 공통분모다.
드라마에서 한자와가 은행원으로 출발하는 것은 1992년이다. 일본 부동산 가격이 하루아침에 반 토막, 아니 3분의 1로 주저앉았던 시기다. 불황은 한자와가 입사한 이래 2012년까지 20년간 이어진다. 이를 깨물면서 ‘배로 갚아주겠다’를 외치는 사람은 바로 20년간의 쓴맛을 몸으로 체득한 현재의 20대부터 40대에 걸쳐진 세대다. 일본 젊은이, 특히 2030세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앞으로 나타날 전혀 다른 일본을 진단하는 단서(端緖)가 될 수 있다.
일본은 좀처럼 속내를 알기 어려운 나라다. 특히 사람이 그러하다. 특유의 친절함으로 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정작 일본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극히 알기 어렵다. 외부에 널리 알려지는 것은 표면에 선 사람으로 제한된다.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이나, 비뚤어진 역사관 같은 것들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한국의 신문방송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젊은 일본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우익 데모를 통해 한국인 쫓아내기에 혈안이 돼 있고, 모두가 자아 의식도 없이 방황하는 약한 초식동물로 전락해 있을까? 인터넷에 가려져 한국이나 중국 헐뜯기에 여념 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한 비뚤어진 세계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까?
부분적으로 옳겠지만, 전체를 보면 전혀 다른 얘기들이다. 아주 상식적인 얘기지만, 아무리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와도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새로운 세상에 맞는 잣대가 아니라, 지금까지 사용해온 관용적 기준으로 재단하게 된다. 일본, 나아가 일본인을 보는 한국 내 연구가 천편일률적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한국인의 시각, 한국식 가치기준으로 일본을 분석·평가한다. 한국적 기준을 버리자는 게 아니다. 한국이 지향하는 가치 외의 기준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는것이 문제다.
일본을 항상 관찰하는 입장에서, 나름대로 터득한 젊은 일본인을 이해하는 최적의 방법이 하나 있다. 직접 만나 얘기를 들어보고,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이다. 필자가 일본에 갈때마다 행하는 나름의 노하우다. 장소는 도쿄 시부야(渋谷)에 있는 시부하우스(渋ハウス: www.shibuhouse.com)란 곳이다. 3년 전 알고 지내던 일본기자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된 곳으로 평범한 2030세대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당시 일본기자는 “시부하우스야말로 21세기형 일본청년의 사고와 생활방식,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며 강력 추천했다.
시부하우스는 최근 한국에도 유행하기 시작한 ‘셰어하우스(Share House)’다. 집세가 워낙 비싸다 보니 여러 명이 한꺼번에 공동으로 빌려 방세를 아끼는 식이다. 개인 공간이나 프라이버시가 전혀 없는, 군대 내무반식 구조다. 전부 3층 건물로, 1층이 잠자는 곳, 2층이 공부·대화·인터넷 파티를 하는 공간, 3층은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다. 전체 식구는 30명이다(5월 초 기준). 원래 전혀 모르던 관계로, 시부하우스에 입주하면서 알게 된 사이다. 20대가 주류이고, 30대 초반도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구나!” 처음 들렀을 때 가진 인상이다. 10평 정도 공간이 낮에는 놀이방, 밤에는 잠자리로 변한다. 구석에 침구와 베개가 3m 높이로 쌓여 있다. 잠자는 공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이불을 깔면 그냥 거기서 자게 된다. 남녀 구별도 없다. 대낮까지 잘 수 있고, 새벽까지 잠을 안 자고 와이파이 인터넷을 할 수도 있다. 규칙은 한 달에 방값 1만엔 정도와 수도·전기·가스·인터넷 비용을 균등하게 내는 것이다. 나머지는 전부 자유다. 한 달에 한 번 파티를 하고, 시부하우스 브랜드를 단 문화이벤트를 개최하기도 한다.
도쿄 시부야는 청년들이 즐겨 찾는, 도쿄를 대표하는 예술과 문화의 거리다. 한국 신문에 나오는 반한 데모를 일삼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평균적 일본인의 생각에 가까운 청년들이 모이는 곳이다. 고맙게도 시부하우스는 정례파티를 모두에게 오픈한다. 처음 시부하우스 방문은 파티비 1천 엔을 내면서 자연스럽게 참석할 수 있었다. 10평 공간은 100명 이상의 사람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2030세대만이 아니라, 필자와 같은 장년세대도 볼 수 있었다.
시부하우스에 대한 얘기를 듣고 젊은이들의 생각을 ‘염탐’하기 위해 들른 것이다. 새벽 3시까지 이어진 각종 대화에 끼어들었다. 주로 듣는 입장인 것은 물론이다. 하우스 식구들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자연스럽게 ‘친구(?)’ 관계를 만들게 됐다. 이후 일본에 들릴때 마다 시부하우스 멤버와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됐다. 지난 3월, 일본에 들렀을 때도 만나 함께 식사를 나누며 얘기를 나눴다.
일본 여성들이 인정하는 미남의 이미지 중 하나로, ‘소금형 분위기의 남자(塩顔男)’가 있다. 이케멘(イケメン), 즉 21세기형 미남이 소금형 남자다. 7가지 특징을 통해 이케멘 여부가 결정된다.
1. 서브컬처(Sub Culture)에 주목하는 지성.
2. 운동을 해서 알맞게 다져진 체형과, 튼튼한 앞가슴.
3. 헤어스타일은 정형적이지 않고 다소 길며, 막 감고 나온 뒤의 엉클어진 모습.
4. 바지는 너무 딱 붙지도, 헐렁하지도 않은 적당한 스타일.
5. 약간 울퉁불퉁하면서 혈관이 돌출된 듯한 남성다운 손등.
6. 파스텔 톤의 색상으로 장식된 의류.
7. 가끔 선글라스나 안경을 쓰는 이지적인 모습.
전체적으로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허연 이미지지만, 맛은 혀를 자극하는 소금맛이어야만 한다.
소금형 남자는 고백하기보다, 고백당하기를 기다리는 초식남(草食男)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다. 무색무취의 초식남에 소금을 뿌린 것이 소금남의 정체다. 튼튼한 앞가슴과 울불퉁한 손을 통해 남성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소금남이라 해도 짠맛을 내는 남성일 필요는 없다.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소금에 따라 음식 맛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두세 배 돈을 주더라도 이탈리아 스페인과 같은 지중해산 소금이 풍부한 맛을 만들어낸다. 짠맛만이 아니라, 깊고도 부드러운 달콤한 맛이 느껴진다. 소금남에서 느껴지는 소금의 맛은 달콤한 짠맛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 같은 맛을 결정하는 것은 서브컬처다.
일본어로 ‘사브카루(サブカル)’로 불리는, 만화·애니메이션·비디오·인터넷·음악·오락·소설에 관한 지식이나 관심을 의미한다. 영미권의 팝아트(Pop Art)에 해당한다. 오페라·콘서트·클래식·박물관·오일페인팅이 아니다. 작은 레스토랑에서의 사진전이나 음악 발표, 길거리에서의 이벤트나 노래, 20평 지하실에서 행해지는 힙팝 콘서트와 애니메이션 발표회 같은 것이다. 비싸고, 크고, 무거운 것이 아니다. 작고 가벼워서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팝컬처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달콤한 소금맛의 관건이다.
크게 보면 소금남은 초식남의 일부에 속한다. 서브컬처, 파스텔톤, 선글라스… 같은 것이 증거다. 한국에서 오해를 하는데, 한국식 미남에 들어가는 강한 캐릭터와 이미지를 가진 육식남(肉食南)은 관심 밖의 캐릭터다. 원재료의 맛을 죽이는, 소스 맛을 내는 남자는 인기가 없다. 강한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강하다는 이유로 적이 생기기 때문이다. 약한 것은 앞에 나설 수는 없지만, 오래갈 수 있다.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시부하우스를 통해 만나본 일본인은 5명이다. 4명의 남성과 1명의 여성으로 모두 20대다. 각자 개성이 강하고 삶에 대한 의욕이 넘친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갖고, 미래에 대한 꿈을 분명히 갖고 있다. 4명의 남성을 보면, 소금남으로서의 이미지가 공통적으로 드리워져 있다. 의도적으로 소금남을 목표로 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소금남으로 나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먼저 세상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큰 주장이나 요구가 없다. 정치·외교·군사에 관한 관심이 극히 드물다. 한국에도 연일 보도되는 영토 분쟁이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도 무심하다.
이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국가·사회와 같은 세상이 아니라, 그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스스로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좀 더 개발할 수 있을까, 비용을 줄이면서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자신이 자신을 속이면서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국가·사회와 같은 세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갈고 닦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필자가 만나 본 2030세대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중심은 아베, 미·일동맹 같은 얘기와 거리가 멀다. 서브컬처가 화제의 중심이다. 주목할 부분은 서브컬처가 연예인 가십이나 드라마 뒷얘기 같은 잡담수준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아주 깊다. 일본 특유의 오타쿠(オタク·한 분야에 몰입하는 사람) 문화에 기초해 서로 깊은 토론을 한다. 어정쩡하게 끼어들었다가는 얘기 상대로 받아주지도 않는다. 그 분야에 관해 잘 알고 있어야 하고, 나름대로의 대안도 갖고 있어야 한다. 시부하우스는 바로 그 같은 토론의 장소이기도 하다.
‘머리가 텅 빈,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못 갖는 약한 캐릭터’는 한국에 전해지는 일본 청년의 이미지 중 하나다. 철저히 한국식 세계관에 익숙한 판단이다. 일본 청년에게 센카쿠나 역사문제를 물으면 대부분은 기초적인 부분에서 침묵한다. 한국인 모두가 알고 있는 사항이라 해도 전혀 무지하다. 일본 신문을 통해 최근에야 널리 알려졌지만,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에 의해 암살됐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서브컬처에서 보듯, 자신의 관심사에만 주목하는, 각론 중심 오타쿠 문화의 결과다.
<그런 일이라면 끝내는 게 좋지 않겠어? (そんな仕事ならやめちゃえば?)>
지난해 가을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책이다.‘30세부터 시작하는 자신의 천직 찾기(オーバー30からの天職探し)’라는 부제(副題)를 단 단행본으로, 작가는 아베 료우(阿部涼)다. 글 중간에 삽화를 넣어 단숨에 읽을 수 있다. <아사히신문>을 비롯해 대부분의 신문·방송이 소개하면서 일약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제목을 보면, 독자에게 알맞은 천직을 소개해주는 취직 참고서나 지침서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을 구입해 읽어봤다. 50대인 필자에게도 자극을 주는 흥미진진한 내용들이다. 저자는 일본대 예술학부(日本大学芸術学部) 출신 여성으로 현재 30대 후반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실화다. 졸업 후 10여 년 동안 무려 19군데 직업을 전전한다. 최초로 부동산회사에 들어가 일하지만, 현장으로 손님을 안내하던 중 교통사고에 휘말려 퇴사하게 된다. 대기업 1층의 안내창구 직원으로 옮긴다. 그러나 신사옥에서의 화학물질 알레르기로 인해 퇴사한다. 다시 취직하지만, 갖가지 이유로 인해 그만둔다. 1년에 평균 두 군데씩 옮겨 다닌다. 운도 나쁘고 취직과 관련된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할 생각마저 갖게 된다.
전환점이 된 것은 30대 초 어느 날이다. 지난 10여 년간 자신의 행적을 더듬어본다. 돈이나 간판 나아가 적당히 놀면서 일할 수 있는, 보여주기 위한 직장생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원하는 직업, 자신에게 진짜 맞는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자아에 대한 고려 없이, 직장에 스스로를 맞춘 것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3개의 원칙을 정한 뒤 천직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는다.
1. 10년간 모은 전 재산 98만 엔(약 1천만 원)을 이용해 앞으로 1년간 천직을 찾아 나선다.
2. 거짓말 하지 말자. 다른 사람은 물론, 특히 나 자신에게….
3. 순도 200%의 직업,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 직업을 찾을 것.
저자는 그 같은 기준에 따라 세 개의 직업을 탐사(?)한다. 도쿄 긴자(銀座) 호스테스, 절과 산을 오가는 심신 수행단(修行團) 안내원, 홋카이도 목장 사원이다. 돈, 간판, 적당한 타협으로서의 직장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윤택하게 해줄 천직으로서의 직업이다. 19번 실패한 여성답게(?) 3군데에서의일하는 모습은 진지하고도, 비장하게 느껴진다. 34세에 호스테스로 들어가 겪는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긴자 호스테스의 정년은 25세 정도다.
호스테스로서 비정한 세계를 경험하지만, 스스로를 다지는 교훈과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수없이 다짐한, ‘다시는 실패하지 말자’라는 말이 ‘또다시 실패할 때 남들이 어떻게 볼까?’라는, 남을 의식한 두려움의 소산이란 것도 알아낸다. 수행 안내원과 목장 사원을 통해 인간이 가진 정신과 육체의 한계도 알게 된다. 저자는 세 가지 새로운 직업을 전전하지만, 결국 천직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대신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는 과정에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고, 결국 책을 내게 됐다는 식으로 끝난다. 좀 허무한 결론이지만, 작가로 데뷔하게 된 대의명분이 ‘그런 일이라면 끝내는 게 좋지 않겠어?’에 있다는 의미다.
책을 덮은 뒤 내용이 다소 인위적인 냄새가 풍기는 스토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출판사가 기획해 만든, 그럴듯한 얘기를 끌어모은 픽션이 아닐까? 그러나 그 같은 의문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책에 대한 일본 젊은이들의 반응 때문이다. 인터넷 블로그와 서평을 살펴보면 2030세대의 입장과 생각을 잘 대변해주는 내용으로 평가된다. 한국에서 출간된 <88만원세대>에서 보듯, 청년들이 공감하는 내용이 책 속에 잘 그려져 있다.
책을 읽으면서 크게 와 닿은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로 주목한 부분이 ‘직장’이 아니라 ‘직업’이란 사실이다. 플랫폼이 아니라, 콘텐트 나아가 콘텍스트(Context)가 주제다. 총론으로서의 사회생활이 아닌, 각론으로서의 구체적인 나의 인생에 주목한다. 19번 이직을 거듭한 여성이 결심한 것은 남들이 인정하는 직장에 관한 부분이 아니다. 자신에게 맞는 삶으로서의 천직이다. 하늘에 연결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하늘이 나에게 맡긴 일을 찾아나서는, 자신의 모습·색깔·목소리를 찾아보려는 자신과의 대화이다.
둘째,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동안 자기 처지를 한탄하거나 남을 탓하는 모습이 거의 안 보인다. 호스테스로 일하는 첫날밤 잠자리를 요구받지만, 스스로의 꿈을 깨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소문처럼 떠돌던 현실을 인정하는 계기로 받아들인다. 삶을 가로막는 차가운 현실은 자신을 더더욱 강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에 해당된다.
셋째, 철저히 혼자 해결한다. 직장 동료나 친구도 글 속에 나오지만, 혼자서 해결해나가는 독립인생으로서의 자화상이다. 부모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렵다. 사회나 국가에 대한 요구나 원망은 단 한 줄도 없다.
시부하우스나 20번 이상 직업을 전전한 여성이 일본 청년문화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으로 일본을 바라본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국가·사회와 같은 거창한 이념에서 벗어나는, 개인으로 나아가는 것이 일본 청년문화의 한 흐름으로 정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한국의 2030세대에게서도 볼 수 있는 똑같은 상황이다. 복잡하고 번거로운 것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삶에 충실하자는 자세다. 극단적으로 보면 좌도 우도 다 싫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한국과 다른 부분이 있다. 평소에 개체로 벗어나 있지만, 위기 시에는 조직·집단으로 간단히 결집된다는 점이다. 개개인의 삶에 충실하지만, 상황이 되면 스스로를 포기하는 분위기가 일본 사회의 특징 중 하나다. 시부하우스는 개성이 강한 젊은이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집단의식이 흐르고 있다. 불화나 불만으로 무너질 듯하지만,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가 양보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개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되, 집단으로서의 ‘화(和)’를 결코 잊지 않는다. 일본이 위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그 같은 ‘본능적 집단의식’에 있다. 오타쿠는 결코 일본 특유의 집단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오타쿠문화 자체가 집단의식의 또 다른 표현이다. 부정적이고 단편적인 눈높이가 아니라, 긍정적이고 종합적인 일본 분석이 필요하다. 일본의 2030세대를 정확히 이해할 경우, 일본의 오늘과 내일은 물론, 한국의 미래도 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