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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경영자(CEO) 책상에 올라오는 보고서 속의 실태와 실제 현장 상황이 다르듯,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현실과 다를 때가 많고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닐 때가 많다. 날이면 날마다 사자에게 쫓기는 얼룩말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그래서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지만 이것이야말로 오해고 착각이다.
자연 다큐멘터리의 착시
사자는 최대 15년에서 18년 정도를 산다(동물원처럼 ‘복지’가 잘 갖춰진 곳에서는 20년까지 산다). 얼룩말은 얼마나 살까. 평균 수명이 30년이다. 천하의 사자보다 ‘불쌍한’ 얼룩말이 훨씬 오래 산다. 이뿐인가. 사자의 생존율은 10%에 불과하지만 얼룩말의 생존율은 30%를 넘는다. 생존율이란 열 마리가 태어나면 제 수명을 다 채우고 죽는 비율인데, 사자가 열 마리 중 한 마리 정도만 제 명을 사는 반면, 얼룩말은 열에 셋 정도가 천수를 누리는 것이다. 일방적인 관계인 것 같은데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우리는 왜 잘못 생각하고 있을까.
자연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주긴 하지만 방송 프로그램인 이상 시청률이라는 멍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장면을 위주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하는 건 멋지고 우람한 초원의 제왕 사자가 자신이 원하는 걸 ‘한 방’에 얻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이를 위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약간 축소한다. 사자가 실패하는 횟수를 ‘잘 편집해서’(사실은 확 줄여서) 보여준다. 그러면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며 “역시!”라는 감탄사를 터트린다.
얼룩말들의 생존력이 생각보다 뛰어난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대부분의 얼룩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우르르 달리지 않는다. 우리가 자세히 보지 않고, 구체적으로 알지 못해서 그렇지 오랜 시간 축적하고 개발해 온 나름의 위기 대응 전략이 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진리 중의 하나는 ‘되는 대로 살아서는 제대로 잘 살 수 없다’는 것인데 얼룩말들 또한 이걸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얼룩말들은 대체로 무리를 이루어 살아간다. 무리를 이룰수록 보는 눈이 많아져 위험을 미리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리는 보통 한 마리의 강한 수컷과 여러 암컷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수컷과 경험 많은 암컷이 무리를 이끌어 가는 편이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그렇듯 리드가 잘 되는 무리에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무리에는 아무리 배가 고파 허겁지겁 풀을 뜯을 때에도 항상 고개를 들고 주변 상황을 살피는 녀석이 있다. 위기는 조용히, 그리고 불시에 들이닥친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까닭이다.
사자와 맞서 싸우는 것은 들이는 노력에 비해 소득이 크지 않다. 목숨을 걸어야 하니 말이다. 특히 얼룩말들은 민첩성과 전체적인 공격력에서 열세다. 무엇보다 사자들은 여러 마리가 협력해 한 녀석만을 집중 공격하는 일이 많아 꼼짝없이 당할 수 있다. 물론 맞서는 것이 더 이득일 때는 과감하게 맞서 싸운다. 새끼를 데리고 있는 어미 얼룩말은 사자를 향해 억세게 달려든다. 하지만 대부분의 얼룩말은 이런 위험한 전략 대신 다른 방법을 애용한다. 위험이 나타났다 싶은 순간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일단 달렸다 하면 몇 km쯤은 쉽게 달릴 수 있는데다 초원은 넓고 넓어 눈앞의 위험만 피하면 다시 위기와 맞닥뜨릴 위험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녀석들은 위기가 온다 싶으면 바람처럼 달리는 것으로 위기를 해결한다. 그런데 이렇게 도망치는 걸 좋은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론 뒤로 물러나는 것도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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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상황판단과 계획이 있다면 물러서는 것도 탁월한 전략적 선택일 수 있다. 물러나야 할 때 제대로 물러나지 못해서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허망하게 사라져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눈앞에 상황에 매몰돼 앞뒤 가리지 않고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하자’는 누군가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게 항상 최선인 건 아니다. 눈물을 머금고 후퇴해야 할 때도 있고 구차해도 살아남아야 할 때가 있다. 이럴 때 ‘36계 줄행랑’은 필요한 전략이다.
용기란 앞으로 나아갈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물러나야 할 때도 필요하다. 물러나야 할 때 제대로 물러나는 건 누구나 할 수 없는 큰 용기다. 그동안 들인 노력 때문에, 아까운 돈 때문에, 체면 때문에 우물쭈물, 어영부영하다가 때를 놓치면 작게 잃을 수 있는 걸 크게 키워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다. 자신이 들인 시간과 노력이라는 수렁에 빠져나오지 못해 일을 그르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매몰비용 오류다.
예를 들어 새끼들이 있어 바람처럼 사라질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할까. 협력은 얼룩말 사회에서도 중요한 생존전략이다. 특히 무리를 잘 이끄는 존재가 있을 때 녀석들은 신속하게 둥글게 새끼를 둘러싸는 ‘덩치의 벽’을 만든다. 공포의 뒷발차기가 있기에 제 아무리 사자라도 함부로 덤빌 수 없게끔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자들에게 또 다른 장애물을 선사할 수도 있다. 사자들은 우리처럼 컬러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흑백으로 보기에 얼룩무늬가 뒤섞이게 되면 이 녀석이 저 녀석 같고, 저 녀석이 이 녀석 같아 타깃을 명확하게 설정할 수 없다. 무늬가 섞여 헷갈린다.
협력이 잘 되는 무리는 달릴 때도 멋진 작전을 구사한다. 혼자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는 식으로 제각기 달리지 않고 잘 뛰는 녀석들이 서로 교차(cross)하면서 흩어졌다 섞였다 한다. 느린 녀석들을 무리 속으로 들어오게 해서 쫓아오는 사자들로 하여금 타깃을 잃게 하는 것이다. 무리를 잘 이끌어가는 존재가 없는 얼룩말 무리는 반대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갈팡질팡하다 희생양을 만들고 만다.
‘느리게 생각하기’가 필요한 때
한국전쟁이 끝난 후 혈혈단신 노르웨이로 건너가 노르웨이 라면 시장의 80%를 점유해 ‘라면왕’으로 불리는 이철호씨가 성공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런 말을 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있었어요. ‘질문에 답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라. 그리고 그 대답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질문을 받거나 말을 해야 할 때는 ‘항상 한 박자 쉬고’ 말했다.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했다. 질문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한 번 더 생각했다는 것이다. 노련한 얼룩말처럼 말이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그러했으니 사업을 어떻게 했을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넓은 초원에 사는 얼룩말들의 전략은 갈수록 넓어지는 세계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뭐 하나 빼놓을 게 없을 정도로 적절하고 유용하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물결을 필두로 거대한 변화의 압력이 밀려오고 있는 지금은 더 그러하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조급해 하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남들이 뛰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새로운 세상은 남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자기만의 길을 가야 한다고, 그게 시대적 요청이라고 하고 있는데 실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일단 뛰려고 한다. 남들이 가는 곳으로 가려 한다. 다들 뛰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으로 불안감을 스스로 증폭시킨다.
세상 사람들이 향하는 곳이 반드시 좋은 곳은 아니다. 그들에게 좋은 곳이어도 나에게는 아닐 수 있다. 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실을 매고 바느질을 할 수는 없다. 노련한 얼룩말들이 시간이 남거나 목숨이 두 개여서 그 긴박한 순간에 상황파악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의 말대로 우리는 너무 빠르게, 아니 사실은 너무 쉽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행동하는 ‘느리게 생각하기’가 필요할 때다. 지레 겁먹고 뛰든, 아니면 남들이 뛴다고 같이 뛰든 초원에서 생각 없이 뛴 얼룩말들의 끝은 뻔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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