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 기록을 통해 삼국시대에 이미 화장술이 발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KBS 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 역을 맡은 배우 하지원이 화려한 화장과 의상·장신구 등을 한껏 뽐내고 있다.
삼국시대에 이미 얼굴 화장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고안돼 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쌍영총이라든지 수산리 고분 등의 벽화에서는 뺨에 연지를 붉고 선명하게 찍은 사실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머리 모양이나 장신구 등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몸을 치장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공예 또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전완길 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백분(白粉)의 사용과 제조 기술이 높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한 스님이 692년 일본에서 연분(鉛粉)을 만들어서 상을 받았다는 내용이 일본의 기록에 남아 있다. 아마도 백분에 납 성분을 적절히 섞어서 만든 연분은 부착력이 좋아지고 잘 펴지기 때문에 화장품 발달사에서는 획기적인 발명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그만큼 삼국시대의 화장품 만드는 기술은 꽤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그것은 화장품 수요가 사회적으로 많았다는 점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장품 선물은 근대 이전보다 근대 이후에 사회적으로 부상(浮上)한 행위라고 하겠다. 근대 이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뜻밖에도 화장품 선물과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다. 고전소설이나 잡록류(雜錄類)의 산문에서 물론 선물의 편린(片鱗)을 발견할 수는 있다. 여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화장품을 선물하는 일화가 삽입돼 있지만 그마저도 자주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빗이나 거울·목걸이 같은 귀중품을 선물로 주는 것은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이런 물건을 화장품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고려 여인들의 ‘향낭 사랑’
▎ 고구려시대 쌍영총 고분 벽화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 볼 연지와 입술화장 등이 눈에 띈다.
화장품은 시각적인 몸치장을 위해 바르고 그리는 것들과 좋은 향기를 내기 위한 향료 계통을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화장품은 어느 시기에나 있었지만 그 종류가 갑작스럽게 많아진 것은 아무래도 근대 이후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 근대 이전 이 땅에서 화장품의 종류도 적었을 것이고 유통망 역시 부실했을 것이다. 선물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물건을 구해야 하는데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선물 기록을 남기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많은 기록이 거울이나 빗과 같은 장신구에 머무르는 것도 이런 환경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외에도 화장품 선물 관련 기록을 이전의 기록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몇 가지 연유가 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선물을 하는 문화적 풍토가 형성돼 있지 않았던 점이 가장 큰 원인이다. 화장품은 기본적으로 집에서 만들어 자급자족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구입하기도 어려웠거니와 남자가 화장품 같은 것들을 집 안의 여성에게 선물하는 것은 낯뜨거운 일로 치부됐다. 그렇지만 화장품이 선물용으로 전혀 유통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1123년(인종 1)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개경에 한 달 남짓 머무는 동안 자신이 관찰한 고려의 풍습을 적은 책인 <고려도경(高麗圖經)>(권20)에는 고려 귀부인들의 치장이 묘사돼 있다. 당시의 여성들은 담박한 화장법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향유 바르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든지 분을 바르되 붉은빛이 도는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은 12세기 고려 여성들의 전반적인 화장 경향을 보여준다.
대신 여러 가지 장신구를 선호했다는 점도 읽을 수 있다. 특히 비단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허리에 참으로써 좋은 냄새가 나도록 한 것은 삼국시대 이래 꾸준히 전승돼왔던 좋은 향기에 대한 선호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 향낭에 무엇이 들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아마도 향이라든지 사향과 같은 종류가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한다) 그 냄새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하면서 유행을 탔을 것이다.
이 정도로 여성들의 치레가 대단했다면 그녀들을 위한 물품 판매소가 있었을 것이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했을망정 약간의 선물 문화도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화장품 선물 행위가 일정 수준으로는 있었으리라 추정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근대 이전 우리 사회에서 그녀들의 화장술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환경이 어떠하든 용모를 꾸미고 몸을 단장하는 일은 모든 여성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대부분의 화장품이 자급자족되던 시대에, 한 가문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그들 나름의 화장법이나 화장품 만드는 법이 전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단오가 되면 여성들이 창포 달인 물에 머리를 감는 것도 머리카락의 윤기를 보존하면서 좋은 향이 배어나도록 하는, 화장법의 일종이었다. 이시필(李時弼, 1657~1724)이 18세기 초에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소문사설( 聞事說)>에 이미 얼굴에 바르기 위한 화장품인 면지(面脂) 만드는 방법이 소개돼 있고, 1809년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저술한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도 입술 연지를 찍는 다양한 방법이 소개돼 있는 것만 봐도 사회적으로 화장술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
화장품 선물은 예나 지금이나 참 어려웠을 것이다. 남성이 여성의 화장품을 구입하기 위해 서성거리는 것이 문화적으로 낯선 풍경이었던 시절에는 화장품 선물은 더욱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화장품은 개인의 선호도라든지 피부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선물을 받는 당사자의 사정을 모른 채 아무거나 구입해서 선물했다가는 선물로서의 효과를 보지 못하기 일쑤다.
그러니 자연히 여성들을 위한 선물은 화장품보다는 화장을 위한 도구나 장신구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에 이미 분을 파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기초 화장품이 유통됐지만, 그것을 선물로 주고받은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