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8일 열병식은 과거의 ‘열병식 문법’과 달랐다. 신형 미사일 대신 지난해 개발한 ICBM급 화성-14·15형을 이동형 발사대에 태워 보냈다. 군 관계자는 “더 이상 새로운 미사일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는 방증”으로 분석한다. ‘핵무력 결승점’에 다다른 김정은의 여유는 파상적인 ‘대화 공세’로 표현되고 있다. 결승점에 발을 디디기 전 협상에서 최대한의 실익을 얻어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평창올림픽 이후 ‘북핵 프로그램’의 예상 수순를 분석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을 하루 앞둔 2월 8일, 북한군 건군 70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렸다. 이동형 발사대에 실려 등장한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급 화성-15형 모습. / 사진:연합뉴스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2월 8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선 열병식이 열렸다. 북한군 창건 70주년을 기념해 열린 행사다. 세계의 이목을 끈 이유는 따로 있다. 북한이 핵무기 또는 신형 미사일을 공개하며 긴장 국면을 고조시킬까 우려됐다. ‘핵무력 완성’을 주장했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대대적으로 무기를 꺼내 들고 힘을 과시한다고 전망됐다. 올림픽을 맞아 남북 협력의 가능성을 비쳤지만 정작 군사적 위협을 키운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른바 ‘위장 평화론’이다. 김 위원장의 동생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의 한국 방문을 하루 앞둔 터라 속내가 더욱 궁금했다.
2월 8일 열병식은 소문난 잔치치곤 조용하게 마무리됐다. 그러나 한국 정부에 더 큰 고민을 안겨줬다. 게다가 2월 10일에는 김여정 부부장이 청와대를 찾아 문재인 대통령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왔다고 밝혔다. 이어 문 대통령 앞으로 보낸 김 위원장의 친서와 함께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다는 구두 제안을 건넸다. 김정은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말폭탄을 주고받던 지난 1월의 긴장감을 고려해보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북제재 효과가 나타난 걸까? 이제 발을 막 떼는 단계인 남북대화의 효과일까? 아니면 대화로 숨통을 틔우고 핵·미사일 개발을 완성하려는 김정은의 꼼수일까? 비핵화로 가는 길에 돌파구가 생겼는지, 안개가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는지 복잡해졌다.
▎주석단에서 나란히 경례를 받고 있는 김정각 총정치국장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김정각은 황병서에 이어 총정치국장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 사진:연합뉴스
열병식 수위 조절… 김정은의 ‘자신감’ 표현?
북한의 고단수 전략은 이미 열병식에서 드러났다. 그동안 점쳐졌던 핵무기나 신형 미사일 공개는 없었다. 열병식 규모도 크지 않았다. 탄도미사일과 장사정포 등을 합쳐 동원한 무기체계는 모두 15종이었다. 지난해 4월 김일성 생일을 기념해 개최된 열병식에서는 총 20종의 무기를 공개했었다. 2016년 열병식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당시는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기념해 무인기와 탄도미사일 등 35종을 선보였다. 하지만 김정은의 포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열병식의 규모가 줄었다고 ‘속빈 깡통’은 아니었다.
북한은 열병식 말미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인 화성-14형과 화성-15형을 공개했다. 모두 북한이 지난해 처음 시험발사한 탄도미사일이다. 화성-15형은 사거리가 1만3000㎞ 수준이라 미국 본토까지 날아갈 수 있다. 화성-14형은 사거리가 1만㎞ 정도로 미 동부 지역을 타격할 수 있다. 북한은 이날 화성-12형도 선보였다. 최대 사거리가 8000㎞ 안팎으로 미국 알래스카를 공격할 수 있다.
지난해 개발에 성공한 중장거리 미사일을 모두 공개했다. 신형 미사일은 포함하지 않았지만 완성품을 과시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북한은 보통 열병식에서 신형 미사일을 공개한 뒤 시험발사를 이어갔다. 군 관계자는 “이젠 더 이상 새로운 미사일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평가는 이미 지난해부터 제기됐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결승점에 가까이 붙었다는 얘기다.
김정은은 지난해 11월 29일 화성-15형 발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모든 요소를 100% 국산화, 주체화하는 돌파구를 열었고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생산할 수 있게 됐다”며 만족감을 보였다. 당시 미사일은 고각으로 발사돼 최고 고도 4475㎞에 950㎞ 거리를 비행했다. 정상 각도로 쏠 경우 1만3000㎞ 떨어진 미국 플로리다의 트럼프 대통령 별장도 표적에 들어온다. 미 본토 전역이 사정권이다. 북한 당국은 이를 두고 ‘11월 대사변’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앞서 실험했던 화성-12형은 9월 15일 정상 각도로 발사돼 최고 고도 770㎞에 거리 3700㎞, 화성-14형은 7월 28일 실험에서 고각 발사로 최고 고도 3724.9㎞에 올랐고 998㎞를 날아갔다.
김정은의 2월 8일 열병식 연설도 행간에 숨은 뜻이 묻어 있다. 열병식을 앞두고 핵무기를 공개하지 않더라도 이에 준하는 파급력이 큰 발언이 예상됐다. 지난해 화성-15형 성공 직후에는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포했었다. 지난 1월 1일 신년사에서는 “핵탄두와 탄도로켓 대량생산 및 실전배치”를 지시하며 ‘핵무력 완성’을 기정사실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전망은 빗나갔다. 김정은이 축하 연설에서 “미국과 그 추종 세력이 조선반도 주변에서 부산을 피우고 있는 현 정세 하에서 인민군대는 고도의 격동 상태를 유지하고 싸움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해 나가야 한다”며 “침략자들이 조국의 존엄과 자주권을 0.001㎜도 침해하거나 희롱하려 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밝혔다. 북한이 견지해온 적대감을 강조했을 뿐이다. 핵무기의 ‘핵’자도 꺼내지 않았다.
▎북한은 지난해 7월 4일 ICBM급 화성-14형을 발사해 재진입 및 단 분리 기술을 시험했다. 다음 날 노동신문은 “대륙간탄도미사일 재진입·단 분리 기술을 최종 확증했다”고 주장했다. / 사진:연합뉴스
CIA “북한, 3개월 후면 미 본토 타격 가능해”
사실 북한은 미사일보다 핵무기 개발 속도를 더 빨리 올렸다. 이미 결승점을 통과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북한은 ICBM에 탑재 가능한 초기 수준의 능력도 갖추고 있다. 전문가들은 “최소한의 핵무기 소형화에 성공했다”며 평가를 모은다. 권 교수는 “북한이 핵탄두 기폭장치를 전격 공개한 2016년 초까지만 해도 핵 소형화 능력은 노동미사일에 탑재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며 “현재는 상당한 수준의 능력을 보유했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제프리 루이스 미 비확산센터(CNS) 소장은 “북한이 핵탄두를 직경 60㎝, 무게 200~300㎏ 정도로 소형화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기존 핵무장 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핵무기 소형화는 최초 실험 이후 2~7년 이내에 성공했다. 북한은 12년 전인 2006년 1차 핵실험을 했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했다.
북한은 지난해 9월까지 총 여섯 번의 핵실험을 이어갔다. 소형화 기술뿐 아니라 파괴력도 키웠다. 6차 핵실험의 폭발 위력은 1차 실험 때보다 50배 정도 커졌다. 1차 실험의 인공지진 규모는 3.9 수준으로 1㏏ 규모의 핵무기로 평가됐다. 폭발 위력 1㏏는 TNT 1000t의 파괴력과 같다. 지난해 실험은 규모 5.7에 폭발 위력은 50㏏로 추정돼 히로시마 원폭의 2.5배 정도 수준이다. 북한은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수소폭탄은 핵폭탄을 기폭제로 사용하며 폭발력은 최소 50㏏을 넘어선다. 반면 전문가들은 “증폭 핵분열탄과 수소탄의 경계”라고 분석했다. 북한의 증폭 핵분열탄 개발은 이미 예상됐었다. 2015년 12월 이상철 국가안보실 제1차장(당시 국방부 군비통제단장)은 북한연구학회 특별학술회의에 참석해 “북한이 ‘증폭 핵분열탄’을 개발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작고 가벼운 핵무기를 유지하면서도 위력을 2~5배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위협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결국 ICBM 개발 수준이 관건이다. 핵무기를 미사일에 탑재해 쏠 수 있어야 진짜 무기다. 이미 한반도는 사정권에 두고 있다. 북한은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거나 한반도에서 군사적 우위를 가지려 한다. 미 본토를 핵무기로 공격할 능력을 가져야 꿈꿔볼 수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지난해 말 트럼프 대통령에게 “3개월이 지나면 북한이 미국 도시들을 핵·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고 보고했다. 아직 기술적 미비가 남았지만 곧 완성된다는 평가였다.
마지막 단계는 무엇일까? 대기권 재진입(re-entry) 기술이다. ICBM은 음속의 20배 이상 속도로 대기권에 들어온다. 이때 엄청난 충격과 섭씨 7000~8000도에 이르는 고열이 발생한다. 탄두 부분이 닳아 없어지는 삭마(削磨) 현상이 균일하게 이뤄지지 못하면 균형을 잡지 못해 방향을 잃거나 진동이 발생해 공중에서 폭발한다. 북한은 2016년 3월 탄두 대기권 재진입 모의실험을 공개했지만 지난해 7월 화성-14형이 재진입하던 중 해면 고도 3~4㎞ 부근에서 희미해지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영상이 찍히기도 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관련 기술 확보에 나섰다. 1990년대 초 동유럽과 소련의 전문가들을 극비리에 북한으로 불러들였다. 재진입체 관련 방열 소재 기술을 얻기 위해서다. 북한은 재진입 시 연소 방지를 위한 세라믹 차폐와 열 차단 능력이 우수한 탄소복합재료 관련 기술을 일부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학생 파견과 국제 공동연구를 통해 관련 기술을 키워갔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최현규 책임연구원이 펴낸 ‘북한 과학자의 국제학술논문(SCOPUS) 분석 연구(2007~2016년)’를 보면 군사 분야 논문은 29건이며, 특히 미사일과 관련된 ▷전자파 차폐 ▷복합재료 등의 분야도 10건이 있었다.
지난해 8월 김정은이 국방과학원 화학재료연구소를 다녀가며 ‘로케트전투부 첨두’를 공개했다. 김정은이 ‘4D탄소/탄소복합재료’ 공정을 나열한 설명판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장거리 미사일의 재진입체에 사용되는 첨단 소재다. 당시 노동신문은 “대기권 재돌입 능력을 입증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탄두 모양도 다양하게 바꿨다. 화성-14형의 앞쪽은 뾰족하고 원뿔 중간이 볼록한 모양이었지만 화성-15형은 뭉툭하다. 탄두가 뭉툭하면 열이 분산돼 그만큼 삭마가 줄어든다. 또 진입 속도가 줄어들어 오랜 시간 연소하더라도 탄두가 견뎌낼 수 있다. 미국 참여과학자연대(UCS) 데이비드 라이트 박사는 “(북한이) 아마도 정상 각도에서 성공적으로 재진입이 가능한 기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월 9일 열린 올림픽 개회식 리셉션에서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왼쪽 둘째)을 비롯한 각국 주요 정상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내외는 만찬을 함께하지 않았다. / 사진:연합뉴스
‘핵무력 완성’ 카드로 ‘평창 청구서’ 요구할까
그러나 권 교수는 “재진입체 기술은 북한이 화성-12형 시험 발사를 포함해 연속적으로 여섯 번에 걸쳐 장거리 미사일 비행 시험에 성공했지만 아직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내놨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화성-15형 시험발사 직후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재진입과 종말 단계 유도 분야 기술은 입증되지 않았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CNN도 재진입 과정에서 폭발해 정상적으로 낙하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CIA가 전망한 3개월 시점을 두고 논란이 나오는 이유다. 고위 군 소식통은 “3개월 시점은 정치적 의미를 담았다고 본다”며 “기술 개발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3개월 시점은 2월 말을 의미하는데 결국 평창겨울올림픽 이후 전개될 정세를 두고 나온 경고가 아니겠느냐”라고 분석했다. ‘위장 평화론’을 의식해 남북대화의 속도를 조절하라는 의미다. 북한이 화성-15형 시험발사에 성공한 직후부터 제기된 우려가 반영됐다. 한·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2018년 들어 본격적인 평화 공세, 남북대화 제의에 나서고 있다고 전망했다. 핵무력 완성이라는 카드를 들고 협상장에 나온다는 분석이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핵무력 완성을 강조했고, 동생 김여정을 한국에 보내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며 그 전망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이 자신감을 갖고 대화를 주장하는 배경은 기술 성적표다. 핵무기와 ICBM 능력을 어느 정도 갖췄다는 평가를 바탕을 둔다. 협상장에서 전략적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정은 집권 이후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고 핵·미사일 개발에만 몰두했다. 협상 가능성을 보이며 이중 전략을 구사했던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는 노선이 달랐다. 한국과 주변국을 의식하지 않고 핵·미사일 개발에 속도를 냈다. 이렇게 지난 6년간 투입했던 노력은 지난해 성과로 나타났다. 김정은이 이제 협상카드로 꺼내 볼 수 있다고 생각한 이유다.
김정은의 복안은 미국의 북한 침공을 막아낼 능력을 갖췄다는 계산이다. 북한은 지난해 5월 29일 지대함미사일(ASBM) 실험을 한 뒤 “정밀조종 유도체계를 도입한 탄도 로케트를 새로 개발하고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며 “적 함선을 비롯한 해상과 지상의 목표물을 정밀타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사시 한반도에 증원될 미국의 항공모함 강습단을 노린다.
게다가 치명적인 보복 능력도 갖췄다. 북한은 2016년 8월 SLBM ‘북극성’ 실험에 성공했다. 잠수함이 수면 가까이 올라와 언제라도 핵무기를 쏠 수 있어 한국과 일본의 움직임을 어렵게 만든다. 주한·주일 미군 역시 마찬가지여서 미국도 공격 대상에 들어온다. 북한은 지난해 2월 ‘북극성-2형’ 시험 발사에도 성공했다. SLBM 북극성을 개조해 지상 이동형 발사대(TEL)에 장착했다. 궤도형 차량이라 산악 지형에 은밀하게 숨을 수 있다. 한·미 연합군의 감시망을 피해 킬체인을 무력화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이어 5월에는 북극성-2형을 세 번째 실험했는데 비행거리 500㎞에 최고 고도 550㎞를 기록했다. 정상 각도로 쏠 경우 사거리는 약 2000㎞로 추정된다. 한반도와 일본 전역이 사정권에 들어온다.
김정은이 맞춤형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향후 협상 구도와 과정을 보면서 개발 속도를 조절한다는 계략이다. 억지력 측면에서 이미 최소한의 능력은 갖췄으니 급하게 추가 실험에 나설 이유는 없다는 분석이다. 한국과 미국이 소극적으로 나오면 그때 봐서 실험을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판단이다. 한국은 일단 대화를 시작하고 핵 폐기 논의로 이어가자는 ‘입구론’을 제안했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방북 초청도 이런 사정을 고려한 김정은의 선택이다. 문제는 미국이다. 미국은 대화에 나설 협상 조건이 보다 엄격하다. 현재 보유한 핵무기 폐기를 확약해야 어떤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이다. 탐색전도 하지 않겠다며 버티고 있다.
▎2016년 11월 30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 석탄 수출 제재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북제재 결의안 2321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미국의 대북 강경파는 “대북제재가 실효를 거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평화 공세’ 외면하기 힘든 트럼프의 딜레마
미국 정부는 남북대화를 냉소적으로 본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지난 2월 9일 오산공군기지에서 ‘전례 없이 엄중하고 강력한 경제제재’를 예고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올림픽 성화가 꺼지면 대북 관계의 해빙도 끝나기를 바란다”며 구체적인 시점도 명시했다. 북한이 2월 10일 제의한 정상회담을 앞두고 선제적으로 나온 강경 발언으로 해석된다.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2월 9일 밤(현지시간) “남북관계 개선은 북한 핵프로그램을 해결하는 것과 별개로 진전할 수 없다”며 “협상에 관한 한 그동안 북한이 보여온 행적은 잘 알려져 있고, 우리는 환상을 갖지 않고 냉정하게 지켜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이런 반응이 터무니없는 주장은 아니다.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포함해 지난 20년간 각종 협상을 두고 나온 평가를 반영하고 있다. 북한이 성실한 대화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핵·미사일 개발계획을 은밀하게 진행했기 때문이다.
미국도 고민은 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는 말처럼 협상하자는 북한을 피할 수만은 없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펜스 부통령이 김여정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만찬 행사장을 나와 김영남을 피했지만 그뿐이다. 외면한다고 북핵 문제가 해결되거나 멈추진 않는다. 트럼프가 강조하던 예방적 공격은 이미 수사적 표현으로 드러났다. 진짜 실현 가능한 해법을 보여줘야 한다.
신범철 국립외교원 교수는 “군사력 사용은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성이 작다”며 “대북제재가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 효과를 보려면 장기적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압박과 관여는 동시에 이뤄져야 성과를 도출할 수 있다”며 “대화를 무조건 거부해서는 제재 효과도 없다”고 말했다. 고위 당국자는 “제한적 북한 공격, 즉 ‘코피 작전’은 북한을 최대한 압박하려는 트럼프의 벼랑끝 전술”이라며 “실제로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없고 북한도 이 점을 잘 안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북한은 지금도 뛰고 있다. 대북제재가 북한에 압박이라면 평화 공세는 미국에 대한 압박이라는 평가다. 북한은 속도를 낮췄지만 핵·미사일 관련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협상 제의가 실패할 경우 본격적으로 개발 경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시 지난해처럼 말폭탄을 주고받아도 북한이 얻을 게 더 많다는 분석이다. 전력화 측면에서 화성-12형과 화성-14형은 초기 단계로 볼 수 있어 괌이나 태평양 한가운데로 날려 보는 데 어려움이 없다. 화성-15형은 추가 실험 가능성이 있다. 올해 내에 전력화가 가능하다고 전망된다.
핵무기를 정확하게 원하는 목표 지점에 공격하려면 재진입 기술 완성이 필요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 대기권에 진입하기 전 폭발시켜 핵 전자기펄스(EMP)로 심대한 충격을 줄 수도 있다. 핵무기의 지상 폭발이 아닌 고도 40~50㎞ 이상에서 핵탄두를 기폭(起爆)시키는 경우다. 북한은 이처럼 핵무기를 사용하는 다양한 전략적 효과를 생각한다. 북한에 재진입 기술은 필수가 아닌 선택일 수도 있다.
미국에 있어 핵무기 확산은 치명적 위협이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핵무기 사용을 과시하면 핵무장을 노리는 국가들이 움직인다. 미국은 핵무기 확산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동맹국인 한국이나 대만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북한은 핵무기 능력 과시를 위해 태평양에서 핵실험을 할 수 있다. 이에 영향받은 중동이나 테러단체가 핵무장에 나서면 미국의 국제적 위상은 흔들린다.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하면 전 세계로 파급되는 도미노 현상을 피할 수 없다.
핵 폐기, 아직까진 가능성 요원한 희망일 뿐
트럼프 집권 이전에 미국 고위 관계자는 “미국은 북핵 동결에 만족할 수 있다”며 “한국처럼 완전한 폐기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미국이 한국보다 북한 비핵화에 기대 수준이 낮다는 평가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가 나온 배경이기도 했다. 인내를 넘어 무관심으로 일관해 북핵을 방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이유로 트럼프 행정부가 전략적 인내 정책을 폐기했지만 이를 대체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북한은 회심의 승부수를 던졌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고민에 빠졌다. 미국에서는 아직 대북 강경론에 힘이 실린다. 북한이 강화된 대북제재 효과 때문에 손을 들고 나왔다는 주장이다. 대북제재에 정통한 소식통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며 “중국이 전면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지만 북한에 큰 부담이 된다”고 분석했다. 이어 “북한에 강력한 압박을 줄 수 있는 대북제재는 이제 시작 단계”라며 “지난 10년 넘게 허울뿐인 제재를 하면서 마치 대단한 일을 했다고 과장했다”고 지적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당장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얘기다.
기회는 아직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월 6일 북한이 재진입 기술 완성 등 한계를 극복하려면 몇 년 정도 시간이 남았다고 지적했다. 시그프리드 헤커 전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의 평가를 인용하면서다. 그는 “북한이 미국의 도시를 타격할 완벽한 무기들을 갖추기까지 최소 2년의 시간과 수차례의 핵실험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현재 긴장을 낮출 대화를 시작할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고 말했다. 군 관계자도 “미국 정보당국도 아직 북한의 기술 완성이 임박했다고 보지 않는다”고 전했다. 권 교수는 “북한은 궁극적으로 고체 추진 ICBM을 노리며 화성-13형은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최초의 3단 ICBM이 될 수 있다”며 “북한의 빠른 속도를 볼 때 2020년 이전에 가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세 가지 갈림길이 있다. 미국이 대화 진입을 반대할 경우 북한은 핵·미사일 실험을 본격적으로 재개한다. 올해 안에 제한적인 핵무기 전력을 갖추고 2~3년 안에 완성한다. 또는 남북·북미 대화를 시작했지만 동결이나 폐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북한이 다시 개발에 나설 경우다. 핵무기 탑재 ICBM 전력화 시점은 1~2년 정도 늦춰질 수 있다. 물론 북한이 기만전술로 은밀하게 개발을 이어갈 경우 시험발사를 못한 만큼 지연될 수는 있다. 마지막으로 대화 당사자가 모두 선의를 갖고 참여할 경우다. 대화를 지속한 기간만큼 본격적인 개발을 막아낼 수 있다. 여건에 따라서는 현존·미래 핵을 폐기할 수도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은 희망일 뿐이다.
ⓒ 박용한 중앙일보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 북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