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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bes Korea

제빵사 프랑시스 올데가 억만장자가 된 비결은?

프랑스 프랑시스 올데는 제빵사업으로 억만장자가 되었다. 샤토블랑이라는 빵공장에서 빵을 대량생산하지만, 원래 빵맛을 잃지 않기 위해 제빵사가 손으로 빵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방식의 맞춤식 조립 라인을 도입했다. 60년간 빵을 빚은 장인정신과 대량생산 시스템을 결합시킨 것이다. 디저트로 유명한 파스텔톤의 먹음직스러운 마카롱도 그가 찾아내 보급시킨 아이템이다.

 

진열대에 전시된 빵

 

프랑스 릴(Lille)에 있는 페이스트리 공장에서 프랑시스 올데(Francis Holder)를 만났다. 공장 안에서는 초콜릿 냄새가 맴돌았고, 올데는 흰색 제빵사 가운을 입고 있었다. 올데의 이름이 수놓인 가운 안쪽으로 푸른색 맞춤 양복과 붉은색 줄무늬 넥타이가 보였다. 사무실의 세 벽면에는 그림이 가득 걸려 있었다. 다들 수백년의 역사를 가진 그림이다. 헐렁한 털모자를 쓰고 얼룩진 코트를 입은 젊은 제빵사의 초상화 옆에는 강아지가 바게트를 뜯어 먹는 그림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살짝 나온 손과 빵 한 덩이가 그려진 그림도 있었는데, 소설『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빵을 훔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분명했다. 8000점이나 되는 그림 중 유명 화가의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컬렉션에 들어오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 올데가 10억 달러만큼의 열정을 투자한 ‘베이킹’ 아니면 그가 최고로 애착하는 대상인 ‘빵’을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벽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유리 건너편에는 올데 그룹(Groupe Holder)의 대량생산 공장 샤토 블랑(Chateau Blanc) 연구개발(R&D) 센터가 있어서 올데는 사무실에서 언제라도 R&D 센터를 볼 수 있다. 올데는 비상장 제빵기업 올데 그룹의 창립자이자 지배주주다. 올해 77세인 올데는 하루 중 시간이 날 때마다 R&D 센터에 들어가 실험용 제빵 반죽기 7대와 작업대 3개 사이를 돌아다니며 셰프들과 의논하고 시험 생산한 빵을 맛본다. “장인정신을 가진 기업가라고 할 수 있죠.” 올데가 말했다.

 

복도로 나가 하얀 제빵사 가운을 입은 직원들이 오가는 사무실 수십 개를 지나가면, 약 9300㎡ 면적에 달하는 샤토 블랑의 심장과 같은 존재, 올데 그룹의 제품 중 가장 큰 사랑을 받는 마카롱 생산라인이 나온다. 장인의 노하우를 담아 설계된 컨베이어벨트를 모두 합하면 축구장 2개만큼의 길이가 나온다. 시간당 머랭 마카롱쿠키 3만여 개를 구워낼 수 있는 시설이다.

 

샤토 블랑(프랑스 어로 ‘하얀 성’)은 이름에 걸맞게 성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벽은 모두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샤토 블랑은 릴에서 자라난 올데가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꿈을 실현해준 공간이다. 그 후에도 이곳은 올데의 다른 꿈을 이뤄주었다. 올데가 처음 가졌던 꿈은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작은 빵 공장을 갖는 것이었다. 처음 꿈을 가졌던 순간부터 60년간 올데는 정성 들여 빵을 만드는 장인정신과 생산의 산업화를 완벽히 결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오래전부터 미국식 식품 산업화에 마음을 빼앗긴 올데는 각 단계가 매끄럽게 연결되는 대량생산 라인을 구축했고, 이를 발판으로 사업가로서 큰 도약을 이루었다. 올데는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고 빠른 생산을 현실화하면서도 최상의 재료를 골라 깐깐하게 제품을 만드는 프랑스식 장인정신과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의 공장은 대량생산 식빵과 페이스트리에도 신선한 노란색 유기 낙농 버터를 사용한다. “그는 산업용 생산의 질을 크게 개선했다”고 코넬대학교에서 50년간 프랑스 빵을 연구하고 샤토 블랑에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했던 스티븐 카플란(Steven Kaplan)이 말했다. “그는 대량생산 방식에 소규모 제빵 장인 모델을 적용했습니다. 자신이 속속들이 잘 아는 방법을 도입한 거죠.”

 

올데 그룹은 자회사 3개를 운영하고 있다. 릴에 있는 샤토 블랑 외에도 전 세계 50개국에 85개 매장을 둔 프랑스 유명 마카롱 브랜드 메종 라뒤레(Maison Ladurée)가 있고, 43개국에서 740개 매장을 운영 중인 소규모 동네 빵집 콘셉트의 베이커리 카페 폴(Paul)이 있다. 올데 그룹의 연 매출은 약 10억 달러에 달하고, 포브스 추산에 따른 순수익률은 14%다. 이는 2017년 오봉팽(Au Bon Pain)을 인수하기 전 파네라 브레드(Panera Bread)가 기록했던 순수익률의 2배가 넘는 수치다. 빵으로만 12억 달러의 순재산을 이룬 올데는 세계에서 1867번째로 돈이 많은 억만장자가 됐다.

 

“내일 재산이 열 배로 불어난다 해도 나한테는 별로 중요한 변화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올데는 순재산과 수익 공개를 거절했다.

 

파스텔톤의 먹음직스러운 마카롱

 

돈에 집착하지는 않지만, 두 개의 머랭쿠키 사이에 가나슈나 젤리를 넣은 디저트 마카롱이 ‘차세대 사업 아이템’으로 급부상하는 흐름은 놓치지 않았다. 그가 라뒤레를 인수한 해는 1993년이다. 1862년부터 시작된 라뒤레는 1993년 현대식 마카롱을 개발한 후 2012년 랑방(풍선껌 맛), 2015년 에밀리오 푸치(귤-레몬-라벤더 마카롱을 푸치의 시그니처 실크 프린트 카프리(Capri)로 포장해서 작은 상자에 넣은 세트) 같은 패션브랜드뿐 아니라 2014년 래퍼 패럴 윌리엄스(피넛 버터와 콜라 맛), 2017년 공연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프러시안 블루와 식용 금으로 만든 나뭇잎이 올라가고 아브라모비치 가문의 문장이 찍힌 마카롱) 등의 유명인과 함께 컬래버를 진행한 적이 있는 마카롱 대표 브랜드다.

 

라뒤레에 마카롱 말고도 다른 빵이 많은 것처럼, 마카롱도 라뒤레의 품을 벗어나 높은 도약을 이루었는데, 이는 모두 올데의 덕(혹은 탓)이다. 마카롱은 올데 그룹 매장 내 매출의 60%를 차지하는 걸로 추산된다. 올데는 프랑스 3대 마카롱 업체 모두에 마카롱을 공급하고 있다. 라뒤레와 폴, 그리고 (놀랍게도) 맥도날드다. 맥카페 마카롱은 일본뿐 아니라 스페인과 이탈리아, 벨기에를 비롯한 많은 해외 국가에서 판매되고 있다.

 

“맥도날드가 3위라고 하면 놀라는 사람이 많다”고 올데는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하죠. 우리 마카롱을 사가니까요’라고 말해줍니다. 맥도날드가 아주 충성스러운 고객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 세계에 공장을 두고 있습니다.”

 

프랑시스 올데는 18살 때 그가 자라난 아파트의 1층에 있는 가족의 작은 빵집을 물려받았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위탁가정에서 자란 그의 아버지는 51세에 심장마비로 가족을 떠났다. 올데의 작은 빵집은 비약적으로 성장을 거듭했는데, 대략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는 제빵 공장 설립, 2단계는 폴 베이커리 브랜드 구축, 3단계는 장인의 빵을 대중에게 선보이기 위해 폴과 제빵 공장을 결합한 사업모델 도입이다.

 

1호점은 1961년에 문을 열었다. 알제리 전쟁에 잠깐 참전했다가 고향에 돌아온 올데는 사람들이 빵을 구매하는 방식이 확 변한 걸 깨달았다. 작은 동네 빵집은 슈퍼마켓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변화의 방향을 깨달은 올데는 5년 만에 프랑스 대형마트 체인 모노프리(Monoprix)와 오샹(Auchan)에 바게트와 빵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업계 경쟁이 살벌해지면서 슈퍼마켓은 더 많은 할인을 요구하기 시작해 11% 할인율은 순식간에 45%로 불어났다. 게다가 매일 팔리지 않고 남은 빵은 올데가 다시 돈을 내고 사가야 했다. 손실이 나기 시작했고, 올데는 평범한 빵만 판매하지 말고 사업을 다각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 고객을 유지하기 위해 공장을 재정비해서 매월 100만 파운드의 빵을 생산했다. 그러나 증설은 중단했다. 손실이 나는 기간에 그는 공장 부지 일부를 유료 주차장으로 바꿔 월정 요금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미래 수익을 보호하기 위한 내용을 계약서에 넣어 슈퍼마켓과 재협상했고, 마트들이 팔다 남은 빵을 반품하지 못하게 계약 내용을 수정했다.

 

수익률이 낮은 대량생산 사업부가 정체기를 겪는 동안, 올데는 가족 아파트 1층에 있는 폴 베이커리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장인정신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폴에서는 두껍고 쫀득하면서도 살짝 헤이즐넛 맛이 나는 노란 빵을 판매했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빵과 완전히 맛이 다른 빵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슈퍼마켓과의 경쟁 때문에 동네 빵집 수가 25%나 줄어들었을 때였다. 올데는 맛있는 빵을 살 수 있는 동네 빵집 체인으로 폴의 콘셉트를 정하고, 대표직을 맡았다. 그리고 1974년 파리로 사업을 확장하기 전 릴에 매장을 2개 더 열었다. 그때 쇼핑몰이 등장했다. 슈퍼마켓 때처럼 올데는 이번에도 ‘대규모 리테일’이라는 변화의 흐름에 남보다 먼저 올라탔다. 이 무렵 미국을 돌아본 그는 미국식 식품 가공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는 미국에서 프렌치 베이커리 겸 카페 ‘라 마들렌(La Madeleine)’ 창업을 도와 성공을 이끌었지만, 파트너들에게 쫓겨난 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1980년대 말까지 올데는 폴의 매장 수를 120개로 늘렸다. 10년 만에 매장을 12배나 늘린 것이다. 이전의 경험 덕분에 이번에는 급성장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높은 임대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방 시설이 다 들어갈 필요 없는 작은 판매점을 주요 입지에 열고, 빵은 중앙 베이커리에서 만들어 공급하는 방식을 택했다. 신선하게 구운 빵은 하루 세 번 배달했다. 빵을 미리 굽거나 얼리는 방식은 피했다. 루이 르뒤프(억만장자 822위, 재산 29억 달러)를 비롯한 경쟁업체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갖가지 빵들

 

 

폴 브랜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워낙 유명해져서 맥도날드 유럽 대표가 매년 신규 매장을 80개씩 열어 2500개까지 늘리겠다는 인수 제의를 했을 정도다. 폴의 대대적 성공 덕분에 올데는 빵 공장을 세우겠다는 자신의 꿈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중요한 반전이 있었다. 그는 “다른 업체는 품질에 신경 쓰지 않고 생산량을 늘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며, “장인정신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죠”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배운 교훈을 바탕으로 올데는 수백만 달러를 투자해 제빵사가 손으로 빵을 만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제조하는 맞춤식 조립 라인을 설계했다. 크루아상 기계의 경우, 도(dough)를 펴서 버터를 고르게 바른다. 그렇게 도를 층층이 쌓아서 얇게 벗겨지는 페이스트리를 완성하면 충분히 숙성시킬 수 있다. 다른 곳과 달리 올데의 공장에서는 도를 숙성(이스트를 넣어 발효시키는 빵의 경우 숙성이 특히 중요)한 후 굽는 시간을 줄이지 않는다. 이는 올데가 아버지에게 제빵을 배우며 얻은 중요한 교훈이다. 저장 공간을 추가하지 않으면서 생산량을 늘리고 시간을 줄이기 위해 보존제나 인공 첨가제를 넣는 다른 제빵업체와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올데 그룹의 캐시카우는 마카롱이지만, 올데는 마카롱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저는 얇게 벗겨지는 페이스트리가 좋습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파스텔 색 쿠키와 맺은 우연한 인연은 25년 전 라뒤레를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라뒤레는 금테를 두른 식당과 파스텔 색의 천장 프레스코화로 유명해진 19세기 파리의 티 살롱이었다. 올데 가족은 토요일마다 라뒤레에 가서 티 샌드위치와 버섯 오믈렛을 즐겨 먹었다. 그는 “라뒤레에 가서도 마카롱은 먹지 않았다”고 실토했다. 술을 잘 마시지는 않지만 럼주를 부어 먹는 바바 페이스트리는 정말 좋아했다. 그랬기 때문에 라뒤레 상속자들이 사업을 정리하고 돈을 챙겨서 나가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인수 의사를 타진한 사람도 바로 올데였다.

 

처음에는 소일거리 정도로 생각하고 라뒤레를 인수했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 51살이 되자 올데는 큰아들 데이비드에게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니 와서 일을 배우라고 사정했다. 데이비드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2년간 하루 15시간씩 일하다가 살이 7kg이나 빠졌다. 수습 생활을 마친 데이비드는 아버지에게 그만 은퇴하시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프랑시스는 라뒤레를 인수하고 데이비드에게 운영을 맡기면 자기는 폴과 샤토 블랑에 더 전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브런치 단골에서 매장 주인이 된 25세의 데이비드는 네 가지 맛밖에 없었던 라뒤레 마카롱에 패션프루트, 솔티드 캐러멜 등 계절별 메뉴를 추가했다. 1997년 라뒤레는 샹젤리제 거리에 1300㎡ 면적의 대표 매장을 열었다. 2005년에는 런던 해롯백화점에 첫 해외 매장을 열었고, 2년 뒤에는 도쿄와 미국에서도 영업을 시작했다.

 

프랑시스는 마카롱을 대중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하고 성장을 위한 적극적 투자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에는 전혀 트렌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폴 베이커리 같은 곳에서 마카롱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마카롱이 아주 커진 것이죠.” 비유적으로도 그렇지만, 정말 크기가 커지기도 했다. 이전에는 약 2.5㎝ 지름의 작은 마카롱을 개당 3달러에 판매했지만, 프랑스 폴 매장에서는 2005년부터 마카롱을 크게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고, 곧 해외 매장에서도 큰 마카롱을 만들었다. 2007년이 되자 샤토블랑에서는 릴에 세계 최초의 마카롱 전용 자동 생산시설을 구비하면서 마카롱에 ‘올인’했다. 지금은 샤토 블랑에서 만든 마카롱을 유럽에 있는 맥도날드 매장 300여 곳에서도 살 수 있다. 이후 올데는 미국 고객을 위한 화이트 라벨 라인을 출시했다. 스타벅스를 위한 한정판 제품도 있고, 샘스클럽용 생산라인도 있다.

 

도박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10년간 마카롱은 컵케이크를 대신하는 미국의 대표 디저트로 자리매김했다. 미국에만 9개 라뒤레 매장이 생겼고(딸 엘리자베스(45)가 뉴욕에서 경영을 총괄), 폴 매장은 12개(폴 인터내셔널 대표로 임명된 아들 맥심(48)이 런던에서 경영감독)가 새롭게 문을 열었다. 맥심 부임 이후, 폴은 250개 이상의 해외 매장을 열었다.

 

제빵사로 60년 넘는 경력을 자랑하지만, 올데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미국에도 샤토 블랑 공장을 열어서 유럽에서의 성공을 재현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용감했기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올데는 자신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한다. “미국에서는 위험을 감수하고 성공한 사람을 영웅으로 인정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