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
문재인 정부가 조기 대선 승리 뒤 지난해 5월 10일 정권 인수위도 없이 ‘개문발차’ 형태로 출범했다. 이때만 해도 정부를 이끌어갈 인사 다수가 ‘노무현의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당장 대선캠프 핵심 자리를 참여정부 출신 인사가 대거 맡고 있었던 탓이다. 1년여 흐른 지금, 당시 예측은 상당히 빗나간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를 비롯해 내각과 여당을 움직이는 인물 상당수가 과거 ‘친노 핵심’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친노’라는 이유 때문에 자의반타의반으로 대통령 곁에서 멀어져야 하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이에 따라 전혀 새로운 권부의 지형이 그려졌고, 권력 작동 방식도 10년 전과 다르다. 향후 여권의 차기대권 구도 역시 새로운 얼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짜여질 공산이 크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1년간 문재인 정부 인사들 부침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현 정권의 핵심실세는 임하룡이다.” 여의도 정치판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과거 1980~90년대 웃음판을 주물렀던 인기 개그맨 임하룡이 갑자기 왜?’ 물론 임하룡씨의 이름에서 착안한 조어다. 청와대 핵심요직 3인방인 임종석 비서실장, 장하성 정책실장, 정의용 안보실장을 통칭하는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각 부처의 자율성과 주인의식을 강하게 주문해 왔다. 그러나 청와대가 국정을 주도하는 관성은 이번에도 어김없다. 여권 관계자들은 현실적 불가피성을 힘줘 말한다. 조기 대선과 급작스러운 정부 출범이라는 특수한 상황, 고도화하는 북한핵 위기로 인한 긴장국면, 촛불혁명이 부여한 시대적 과제 등등. 결국 대통령과 그 철학을 꿰뚫고 있는 측근 참모들이 총대를 메고 급한 불을 끄는 게 숙명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3실장은 자연스레 핵심실세로 자리매김했다.
역시 가장 높게 뜬 별은 임종석 비서실장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10일 새벽 대선 개표가 채 끝나기도 전에 ‘1호 인사’로 임 실장을 내정했다. 당시만 해도 대선을 치르며 후보 비서실장으로 함께 고생한 데 대한 ‘보은’적 인사로 받아들여졌다. 일각에선 ‘친문 패권 이미지 불식용(用)’ ‘양정철 캠프 부실장의 득세 가능성’ 등의 전망을 내놓기까지 했다. 50대 초반의 상대적 젊은 나이,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무부시장 출신, 과거 전대협 의장을 지낸 과격 운동권 이미지 등 그의 순항과 롱런을 막을 걸림돌은 적지 않아 보였다.
▎2001년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에 참석해 발언권을 신청하고 있는 장하성 당시 고려대 교수(왼쪽)와 김기식 참여연대 정책실장.
임종석 “인생동맹이 중요”
곧바로 이런 예측이 틀렸음이 드러났다. 취임 이틀째 문 대통령은 참모 몇몇과 커피를 들고 청와대 경내를 함께 산책했다. 모처럼 만에 보는 대통령의 소탈한 모습에 여론은 환호했다. 정작 정가의 시선은 대통령과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고 있는 임 실장을 쫓고 있었다. 얼마 뒤 대통령이 집무실을 비서동인 여민관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자, 세상은 ‘임종석 시대’의 개막을 직감했다.
올 초에 불거진 UAE(아랍에미리트연합) 방문 논란은 그의 정치적 위상을 새롭게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초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원전게이트’를 제기할 때만 해도 치명상이 불가피한 듯 보였다. 그러나 야당의 벌떼 공격에도 강단 있게 버텼고, 상황은 급반전됐다. 그가 옛 여권의 무리한 ‘비밀 군사협력 양해각서(MOU)’ 파문 수습을 위한 사실상의 ‘구원투수’였음이 드러났다. 야당은 ‘국익 차원 판단’이라는 말과 함께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누가 봐도 그의 ‘판정승’. 이즈음 야권 안팎에선 “임종석을 다시 보자”는 말이 번져 나갔다.
그 직후인 지난 1월 말, 필자는 우연히 서울 삼청동 호프집에서 임 실장과 조우하게 됐다. 마침 동행한 지인이 그와 익히 아는 사이라 잠깐의 합석 요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편안한 차림의 그는 “오늘 인사추천위원회 회의가 있었는데, 그간 인추위 멤버들과 밥 한끼 못 해 함께 식사 뒤 맥주 한잔하러 왔다”면서 조국 민정수석 등 일행에게 양해를 구했다.
인사말이 오간 뒤 화제는 자연스레 향후 그의 정치행보로 모아졌다. “글쎄요. 내가 뭘 할지보다는 일단 날씨가 맞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날씨를 결코 쉽게 생각해선 안 되기 때문이죠.” 주변에서 거론되는 ‘임종석 대망론’을 의식했기 때문일까. ‘날씨’라는 정치적 환경이 조성될 때까지 섣불리 나서거나 서두르지 않겠다는 나름의 신중함이 읽혀졌다. 그럼에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히 만들어 둬야 해요. 나머지는 인생동맹이랄까,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을 함께 엮는 작업도 중요하지요”라고 덧붙였다. 때는 기다리면서도 손놓고 앉아 있기보다는 준비는 충실히 하겠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기회는 준비한 자에게 온다’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아마도 문 대통령이 가장 공들여 영입한 인사가 장하성 정책실장일 것이다.”
정권 출범 직후 그가 ‘깜짝’ 발탁됐을 때 대선 캠프 관계자가 귀띔한 말이다. 장 실장은 2012년 대선 때 ‘적장’인 안철수 후보의 정책 브레인. 당시 첫 대선에 나섰던 문 대통령의 영입 요청을 일축하고 안 후보와 손을 잡았다는 후문이다. 그래도 그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던 모양. 2015년 말 안철수 전 대표의 새정치민주연합 탈당으로 정치위기에 내몰렸던 당시 문재인 당 대표는 또다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에 안 전 대표 측은 “정치 도의에 어긋나는 구태정치”라며 강하게 반발, 없던 일이 돼버렸다.
다시 두 사람이 맞붙은 지난해 대선에서도 문재인 후보는 SOS를 쳤지만 장하성은 끝내 외면했다. 대신 중립을 지켰다. 대통령에 당선되자 직접 전화를 걸어 정책실장 자리를 제안했다. 이번에도 거절했다. 그러나 이번엔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이나 전화로 예의를 갖추자 장하성도 손을 들었다. 언론은 탕평인사, 삼고초려 등 감동적 문구로 보도했다. 관가와 시장은 새로운 경제 실세의 등장에 초점을 맞췄다.
실제 장 실장은 집권 초기 소득주도 성장론, 증세론 등 문재인표 경제정책 ‘J노믹스’를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경제 각료 인선의 막후로 떠오른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라인을 완벽히 제압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또한 학연으로 맺어진 최종구 금융위원장(고려대)과 최흥식 전 금융감독원장,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이상 경기고) 등 ‘장하성 사단’을 구축했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최근 그의 위상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자신이 밀었던 것으로 알려진 최흥식 전 금감원장이 채용비리로 낙마한데 이어 그 후임을 정하는 데도 그의 뜻이 관철하지 못 했다는 전언이다.
▎정가에서 정권 실세 3인방으로 알려진 임종석 비서실장(가운데), 정의용 안보실장(왼쪽), 장하성 정책실장(오른쪽)이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 앞서 대화를 하고 있다.
정의용 ‘한국의 키신저’ 찬사
장하성 실장이 초반 상승세와는 달리 요즘 주춤하고 있다면, 정의용 안보실장은 정반대의 궤적을 보여 주고 있다. 정 실장의 임명 소식에 언론은 ‘파격’ ‘특기할 만한 인선’ 등 환영보다는 의구심 일색의 반응이었다. 한 매체는 “(문 정권이) 북한 핵·미사일 문제 해결을 후순위로 보는 것 아니냐”는 혹평까지 내놨다. 그동안 안보실장은 국방장관 출신이 독차지해 왔다. 여기다 북핵 위기 국면에 외교관, 그것도 대미 외교통이 아니라 통상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다자외교 전문가를 발탁한 데 대한 우려와 비판이었다. 그러자 문 대통령이 직접 해명에 나섰다. “지금처럼 북핵,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경제가 하나로 얽힌 숙제를 풀려면 확고한 안보의식과 함께 외교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외교가에 알려진 정 실장의 별명은 ‘르네상스맨’. 여러 분야에 걸쳐 전문적 식견을 가진 인물로 평가돼 왔다는 얘기다.
대통령의 전폭적 지지를 업고 제일 먼저 매달린 일이 사드 문제로 촉발된 한·중 간의 갈등을 푸는 것.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 사드 문제 해법 단초를 만든 뒤 지난해 말 문 대통령의 방중으로 급한 불을 껐다. 물론 사드 추가 불(不)배치,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 불참, 한·미·일 군사동맹 비추진 등 ‘3노(No)’를 중국 측에 약속해 줘 보수층의 질타를 사기도 했다. 특히 미국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맨투맨으로 부딪혔다.
이 중 카운트 파트인 허버트 맥매스터 당시 백악관 국가 안보보좌관을 감동시킨 일화가 백미다. 그의 집까지 찾아가 5시간의 심야 마라톤 대화로 미국의 신뢰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특히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여로 형성된 남북 화해 기류를 타고 성사된 대북특사단의 단장역을 맡아 이뤄낸 성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직접 확인한 뒤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어 미국을 방문, 북한의 의도를 전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적극적 호응을 얻어내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까지 중재해 냈다. 진작 형성해 놓은 맥매스터와의 ‘케미’가 결정적 작용을 했다는 후문이다. 당장 ‘한국의 키신저’라는 과분한 찬사가 쏟아졌다. 향후 관건은 예정된 남북, 북·미 정상회담이 한반도 비핵화를 도출할 수 있느냐는 점. 잘되면 ‘한반도 운전자’의 기획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새길 수 있다. 반대의 경우엔 그 책임을 몽땅 뒤집어쓸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소위 잘나가는 인사들의 면면을 살피다 보면 대략 두 개의 키워드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먼저 참여연대다. 장제원 한국당 수석대변인은 3월 31일 “참여연대라는 스펙만 있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고 출세는 떼어 놓은 당상이 된 지 오래”라고 꼬집었다.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지낸 김기식 전 의원이 이날 금융감독원장으로 임명되자 현 정부의 참여연대 편중 인사를 강하게 질타했던 것. 장 대변인은 “그렇게 많이 꽂아 넣고도 아직 배가 고픈가 보다”면서 현 정부에서 중용된 인사들 명단을 줄줄이 읊었다. 청와대에선 장하성 정책실장, 조국 민정수석, 김성진 사회혁신비서관이 꼽혔다. 내각에선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박은정 국민권익위원장,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을 거론했다. 김 원장을 포함하면 장관급만 5명. 여기다 ‘왕수석’ 조국 민정수석의 중량감을 감안하면 과히 참여연대가 현 정권의 최대 인재풀(pool)인 셈이다. “본인이 오랫동안 인권·노동 전문변호사로 활동해온 만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권력을 감시하고, 사회개혁을 위해 노력해 온 참여연대 인사들과 ‘코드’가 맞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오랫동안 문 대통령의 활동을 지켜봐온 부산의 동료 변호사 말이다.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가운데)는 ‘문재인 정부의 해결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최대 인재풀 된 참여연대와 성공회대
또 하나의 키워드는 성공회대다. 정부의 민감한 현안 해법 또는 굵직한 정책 발표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다. “또 정해구 교수냐?”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정해구 교수의 종횡무진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정권인수위원회 역할을 했던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위원을 시발로, 국가정보원 과거사 청산 임무를 맡은 국정원개혁발전위원장을 거쳐 국가 중장기 발전전략을 자문하는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장(장관급)으로 활동 중이다. 또 지난 2월 초 발족한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대통령 발의 개헌안 초안 작성까지 떠맡았다. 그래서 ‘문 정권의 해결사’라는 별칭을 얻었다. 문 대통령과는 참여정부 정책기획위원을 계기로 인연을 맺은 뒤 2012년 대선 캠프 이후 정치적 고비 때마다 줄곧 곁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인연도 인연이지만, 정 교수가 몸담은 성공회대와 문 대통령의 각별한 사연도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 한 당직자는 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존경한다”며 애틋한 애정을 표한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현 정권과 성공회대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또 있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실 선임행정관. 성공회대 졸업 뒤 공연기획 전문가로 활동 중 2009년 6월 모교에서 열린 ‘노무현 추모 콘서트’ 기획을 맡음으로써 그의 인생행로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이후 노무현재단 창립 기념공연 등의 기획을 맡으며 ‘문재인의 사람’이 된 것. 정권 출범 후 거의 모든 청와대 행사를 주관하면서 이젠 ‘왕의 남자’로 떠올랐다. 최근 남한 예술단의 평양 공연 막후 연출자로 성황리에 행사를 마쳐 대통령의 ‘절대적’ 신뢰에 부응했다. 한국당 관계자는 “과거 저서에서 드러난 탁 행정관의 부적절한 성(性) 인식을 문제 삼아 사퇴를 주장하지만, 오히려 그의 존재감만 키워주는 꼴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탁 행정관의 직급은 2급에 불과(?)하지만, 영향력은 수석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게 지배적 평가다.
한 정권에서 ‘뜬 별’을 판정할 때 빠지지 않은 잣대가 차기 대권구도에서의 존재감 여부다. 이런 기준에서 역시 가장 시선을 모으는 이는 임종석 비서실장이다. 따지고 보면 야당이 UAE 방문 논란 등 잊을 만하면 그에게 집중포화를 퍼붓는 이유다. 그 외에도 존재감을 드러낸 이들이 있다. 먼저 이낙연 총리. 발탁 당시만 해도 무난한 관리자형 총리로 머물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호남 배려 몫, 온건 합리적 노선, 계파 색채가 옅은 정치 이력 등을 감안할 때 향후 정치적 가능성은 사실 별로였다. 하지만 ‘물 만난 고기’처럼 총리로서 거침이 없다. 지난해 살충제 계란 파동 때 유영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을, 최근 재활용품 쓰레기 대란 땐 김은경 환경부 장관을 공개 질책해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국회 대정부 질문에선 야당의 파상공세를 되받아치는 여유와 경륜으로 매번 뉴스의 중심에 섰다. 대통령은 정례 독대를 통해 확실히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가 총리, 그 너머를 향해 본격 행보를 할 경우 “간단치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지난해 8월 문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 앞서 청와대 관계자와 얘기를 나누는 탁현민 행정관(오른쪽).
▎성폭력 의혹을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4월 4일 두 번째 영장실질심사를 앞두고 서울 서울서부지법으로 들어가고 있다.
너무나 극적인 안희정의 몰락
“민주당엔 주류·비주류도 없고 추미애 대표만 있다.” 얼마 전 한 언론이 추 대표가 당내 견제세력이 없는 점을 이용, 자기사람 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비판 기사를 내보내며 붙인 제목이다. 기사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분명한 사실은 현재 여당 의원 중 추 대표만큼의 정치적 비중을 가진 이를 찾기 힘들다는 점. 적잖은 구설을 낳긴 했지만, 이른바 ‘촛불혁명’과 뒤이은 정권교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지도력과 정치력은 누구도 토를 달기 어렵다. 때문에 추 대표의 말 한마디, 발걸음마다 대권 풍향계가 작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향후 대권가도에서 대통령의 지지율에 기대지 않고 추 대표가 독자적 행보를 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당직자의 촌평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어쩌면 지금은 미래형인 추 대표의 거취보다 현재 진행형인 김경수 의원의 도전을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 김 의원은 ‘대통령의 복심(復心)’으로 불리면서도 초선이라는 꼬리표 탓에 정치적 위상이 평가 절하돼 왔던 터다. 장고 끝에 그가 경남지사에 도전장을 던 지자 여권에선 긴장과 기대가 교차하고 있다. 민주당 간판을 달고 처음으로 경남에서의 승리, 그것도 홍준표 한국당 대표의 텃밭을 장악할 경우 “차기 대선가도에서 안희정의 빈자리를 김경수가 메울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이 나오기 때문이다.
‘안희정 지지율, 1주일 새 9% 뛰었다’ ‘안희정, 내친 김에 20%까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대선 출마 포기 직후였던 지난해 2월 초,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의 지지율은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친문캠프는 ‘문재인 대세론 흔들’이라는 보도에 아연 긴장했다. 하지만 감당도 못할 섣부른 ‘연정’ 발언으로 주춤하더니 승기를 놓쳐 버렸다. 경선 결과도 이재명을 겨우 제친 ‘2위 턱걸이’였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의 정치적 비중과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TV로 생중계되던 광화문 무대에서 문재인 당선자에게 기습 뽀뽀를 감행할 정도로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이후 줄곧 차기 대권주자 1위로 꼽혔다. 강호의 책사들이 그에게 몰린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정무비서 김지은씨의 성폭행 폭로 인터뷰 한방에 그는 급전직하했다. 처음엔 자발적 성관계라고 발뺌했다. 그러나 분노한 여론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지지자들마저 등을 돌렸다. 그러자 슬그머니 정치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그의 추락은 한껏 치솟았던 정치적 위상만큼이나 너무나 극적이었다. 이젠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안희정이 아닌, 그가 머물다 사라진 공간이 빚어낼 정치적 역동성에 모두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19대 총선을 앞둔 2012년 1월 당시 문재인 국회의원 예비 후보가 서울 중랑구에서 열린 한 북콘서트에 게스트로 참가, 마이크를 잡았다. “노무현 청와대에 수많은 비서관이 있었다. 참여정부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양정철 전 홍보기획 비서관만 애칭으로 ‘양비’로 부른다. 다른 비서관을 ‘김비’나 ‘이비’로 부르지 않는다. 그만큼 양비는 참여정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는 중랑을(乙)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양정철이 출정식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문 예비후보는 양비의 승리를 기원하면서도 각별한 사의도 잊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양비가 제게 책을 쓰도록 하고 제 등을 떠밀어서 저를 정치권으로 다가가게 했다. 제가 낸 [운명]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정치적으로 떴다. 개인적으로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공직 복귀 가능성 닫지 않은 양정철
정치 입문 때 진작 이처럼 고마움을 간직했던 문 대통령. 한 번의 실패 뒤 4년이 넘는 세월을 곁에서 온갖 풍파를 막아내며 결국 자신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그의 공로에 대해선 어떻게 감사하고 보상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그에게 져야 할 그 정치적 부채가 역설적으로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말았다. “비워야 채워지고, 곁을 내줘야 새 사람이 오는 세상 이치에 순응하고자 합니다.” 양비는 정권 출범 엿새 만에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이때만 해도 양비가 잠시 곁을 비울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1년여 시간이 흐른 지금, 그의 복귀 가능성은 오히려 더 희박해졌다. 당장 양비의 뜻이 완고하다. 연초 외국에서 돌아올 때만해도 무성했던 복귀설은 “나는 대통령에게 양날의 칼이다. 지금이든 다음이든 공직엔 안 간다”는 말 한마디에 쑥 들어갔다. 무엇보다 새로운 인물로 진영을 짠 문재인 정부가 비교적 순항하고 있는 현실도 그에게 조금의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양비가 완전히 ‘진 별’이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지난 1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권이 어려워지면 공직으로 불려갈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묘한 여운을 남겼다. “그런 특별한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고 답했다. “어떤 경우든 복귀는 없다”가 아니었다. 구원투수로서 등판 가능성은 열어둔 셈이다. 만에 하나 실제 그런 상황이 닥쳐 그가 복귀한다면 떠날 때만큼이나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양비가 ‘잊혀질 권리’를 외치며 떠나던 즈음, 또 다른 원조 친노가 미리 잠수를 탔다. 양정철·전해철 의원과 함께 ‘3철’의 고리에 묶였던 이호철 전 민정수석.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된 ‘부림사건’으로 구속돼 맺은 노무현 변호사와의 인연으로 문 대통령과 알게 된 뒤 줄곧 동지적 관계를 이어왔다. 참여정부 출범 때 함께 청와대로 들어가 민정비서관(이)-민정수석(문), 민정수석(이)-비서실장(문)으로 끝까지 노 대통령을 보좌했다. 문 대통령이 어렵게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도 듬직한 좌장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연히 문재인 정부에서 그의 역할을 놓고 뒷담화가 무성했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기가 무섭게 외국으로 떠나 지난해 여름 조용히 귀국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친노 지지층은 ‘부산이 부른다. 응답하라 이호철’이라는 캠페인을 펼치며 시장 출마를 강하게 압박했다. 막무가내로 버티다 올해 초 전격 불출마를 선언했다. 대신 민주당 부산시당 외곽 지원그룹인 ‘원팀(One Team)’을 꾸려 6·13 지방선거 승리를 위해 뛰고 있다. “아마도 선거가 끝나면 제자리로 돌아갈 거예요. 본인 스스로 공식 자리를 맡는 것을 태생적으로 꺼리니까요.” 원팀 관계자는 그의 정치적 활동은 지방선거 때까지일 것이라고 단언했다.
ⓒ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