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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국민타자 이승엽의 야구 인생 이야기

국민타자 이승엽이 지난해 23년간 야구선수 생활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구장학재단 이사장, KBO 홍보대사 등 왕성한 활동을 하며 새로운 야구인생을 시작했다. 이승엽이 야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던 저력은 무엇일까? 이승엽의 프로야구 선수시절 이야기를 통해 그가 성공한 이유와 앞으로의 새로운 꿈에 대해 들어보자.

 

이승엽(42)은 한국 야구의 아이콘이다. 한국인치고 이승엽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1995년 데뷔한 이승엽은 23년간 그라운드를 누비다 지난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대사, 이승엽 야구장학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승엽이 월간중앙과 단독으로 만나 자신의 야구인생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국민타자 이승엽

 

▎‘국민타자’ 이승엽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프로야구 선수로서 살았던 23년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인터뷰 말미에 카메라를 보며 넥타이를 고쳐 매는 이승엽.


 

"운동을 안 하니까 확실히 몸이 약해진 것 같네요. 선수 시절엔 감기를 모르고 살았는데 지난겨울에 감기에 걸려 죽는 줄 알았어요. 링거만 세 번이나 맞았다니까요.”

 

4월 4일 서울 서초구 양재역 인근에 위치한 ‘이승엽 야구장학재단’ 사무실. 이날은 KBO 퓨처스(2군) 리그 개막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인터뷰 직후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양복을 입은 ‘국민타자’는 오랜만에 만난 기자에게 앓는 소리부터 한다. 마흔을 훌쩍 넘긴 아저씨가 ‘왕년’ 얘기부터 꺼내는 걸 보니 아직 선수 시절의 물이 다 빠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한국 프로야구(KBO리그) 사상 최초로 50홈런 시대(1999년 54홈런, 2003년 56홈런)를 열고, 올림픽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등 국제대회에서 국민들에게 잊지 못할 홈런의 감동을 선물한 ‘국민타자’. 그러나 한·일 통산 626 홈런(한국 467홈런, 일본 159홈런)을 때려낸 전설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그 시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그의 은퇴는 현실이 됐다.

 

‘대사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은가, 이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은가’ 질문을 마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는 “아직은 이승엽 선수가 편하다”며 웃는다. 그는 현재 직함 두 개를 갖고 있다. 하나는 ‘KBO 홍보대사’, 또 하나는 ‘이승엽 야구장학재단 이사장’이다.

 

“요즘 어디 가면 이 대사, 어디 가면 이 이사장이라 그럽니다. 사실 아직까지는 이승엽 선수라고 불러주는 게 저도 편해요. 대사나 이사장이라고 하면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들죠. 많이 쑥스럽습니다.(웃음) 그러나 이제 조금씩 익숙해져야겠죠.”

 

1995년 삼성에 입단한 이승엽은 지난 시즌을 끝으로 23년 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멀리던지기 대회에 나갔다가 야구 감독의 눈에 띄어 야구에 입문한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32년간 몸에 걸쳤던 정든 유니폼을 벗었다. 팬들도 올 시즌 개막 후 그가 없는 그라운드가 생경하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일 터다.

 


스스로 벗은 유니폼 “이제 조금씩 은퇴 실감”

 


“요즘 가끔 잠을 자다 무의식 중에 야구하는 꿈을 꿀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나바로(도미니카공화국 출신 외국인 선수로 2014~2015년 삼성에서 활약)가 꿈에 나타나기도 했어요. 같이 야구를 하고 있었는데, 잠에서 깨는 순간 ‘아, 현실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죠. 그리고는 ‘많은 선수 중에 그 친구가 왜 꿈에 나왔지?’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올해 KBO리그 개막식 때 잠실에 홍보대사 자격으로 갔는데 잔디를 밟을 때만 해도 그라운드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런데 저를 소개할 때 팬들이 박수를 치고 제 이름을 부르면서 환호를 해주시더라고요. 그때는 마치 내가 선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서 짜릿했죠. 은퇴 후엔 그라운드를 절대 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처음으로 ‘저기서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나 어차피 돌아가지 못할 길 아닙니까? 부상이나 부진으로 은퇴했으면 큰 아쉬움도 남고 억울하겠지만 23년간 내가 해볼 수 있는 야구는 다 해봤기 때문에 정말 후회는 없습니다.”

 

그는 2016시즌을 앞두고 2년간 36억원에 계약을 했다. 36억원은 그의 등번호 36번을 의미했다. 당시 그가 2년 계약을 한 이유는 명확했다. 2년 후 은퇴를 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언론과 팬들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렸다. 한마디로 은퇴 예고였다. 직전 해인 2015년만 해도 타율 0.332에 26홈런, 90타점을 쳐냈다.

 

20개 이상의 홈런을 칠 힘도 여전히 남아 있었고 3할대 타율을 때릴 수 있는 정교함도 살아 있었다. 그런데 “두 시즌만 더 뛰고 은퇴하겠다”고 하자 모두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시유종(有始有終). 그가 최근 펴낸 자서전 [나. 36. 이승엽]을 보면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 사자성어를 설명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지금껏 선배들의 은퇴 과정을 보면서 매끄럽지 못한 모습도 종종 봤다. 프랜차이즈 스타가 떠날 때는 늘 진통이 있었다. 경기 실력이 떨어진 게 분명한데도 선수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조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에 구단은 세대교체를 위해 은퇴를 종용한다. 이 과정에서 선수와 구단의 줄다리기가 이어진다. 결말은 대부분 먹먹한 새드엔딩이다. 선수생활의 시작과 끝 모두 내가 선택해야 할 부분이다. 떠날 시점을 정해놓고 뛰면 매 경기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그만두게 된다면 정말 비참할 것 같았다. 오랫동안 나는 박수칠 때 떠나려고, 아름다운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남몰래 생각해 왔다.”

 

주변의 만류가 거셌지만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2017시즌이 끝난 뒤 미련 없이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러자 삼성 구단뿐만 아니라 KBO리그 모든 구단은 시즌 마지막 홈경기에서 은퇴투어를 열어주며 레전드의 퇴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마지막 시즌에도 타율 0.280에 24홈런 87타점을 기록했으니 초라하지 않은 뒷모습으로 팬들과 작별할 수 있었다.

 

“각 구단이 스프링캠프를 가는 기간에 캠프에 가지 않고 시즌 때도 야구장으로 출근하지 않으니 이제 은퇴를 조금씩 실감합니다. 선수 때는 운동을 하고 싶어도 하고, 하기 싫어도 하고, 시간이 없어도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운동을 좀 하고 싶어도 잘 안 됩니다. 이제 야구 안 해도 되니까. 그래서 몸이 약해졌는지 선수 시절엔 걸려 본 적도 거의 없는 감기까지 걸리네요.”

 

이승엽 은퇴식 장면


 

▎지난해 10월 대구 삼성 라이온스 파크에서 열린 은퇴식 도중 생전 어머니의 영상이 나오자 이승엽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

 

은퇴하면 한껏 여유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요즘도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단다. KBO 홍보대사로서, 야구장학재단 이사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광고모델 제의가 들어오기도 하고, 강연 부탁이 들어오기도 한다. 언론 인터뷰 요청도 쇄도한다. 스케줄을 조정해 일부는 거절해야 할 만큼 빡빡한 일정이다. 요즘 그의 마음이 더욱 바쁜 것은 4월 8일 공식적으로 닻을 올린 ‘이승엽 야구장학재단’ 때문이다.

 

“우선은 당분간 재단에 몰입해야 합니다. 기반을 탄탄하게 하고, 안정시켜 놓은 다음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도 지인을 통해 제 팬이었다고 하면서 재단에 1000만원을 기부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너무나 큰돈인데, 깜짝 놀랐어요. 속으로 ‘정말 재단 일을 열심히 해야겠구나’ 다짐했어요. 이런 관심을 가져 주시는 분이 계시니 대충대충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그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으로 야구재단을 만들 꿈을 간직했다. 20대 나이에 이미 부와 명성을 쌓기 시작하면서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수 시절엔 야구에 집중해야 했다. 프리에이전트(FA) 계약금을 받으면서 그는 일정 부분을 떼어내 종잣돈으로 마련해 둔 뒤 은퇴 후 곧바로 재단을 출범시켰다. 가슴속에 품었던 의미 있는 일의 시작,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의 실천이다.

 

“어릴 때부터 많이 봐왔어요. 초등학교 시절이나 중학교 시절에, 친구들이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야구회비도 잘 못 내면서 결국 좋아하는 야구를 그만두는 모습을요. 회비를 못 내면 주변에서도 다 알거든요. 그러면 그 친구가 마음 놓고 야구를 못 하죠. 지금도 그런 아이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이승엽은 은퇴 후 지난해 11월 열린 ‘박찬호 장학회 20주년 행사’에 참석한 바 있다. ‘코리안특급’ 박찬호와 ‘국민타자’ 이승엽은 한국 야구사를 빛낸 투타의 기둥으로 오래전부터 절친으로 지내는 사이다. 2011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박찬호 장학회 행사에서 이승엽은 다시 한 번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박찬호 장학금을 받은 선수들의 영상이 나오는데 그중에는 이승엽 자신과 지난시즌 그라운드에서 함께 뛰었던 현역 선수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 새삼 놀랐다. 서건창(넥센)·구자욱(삼성) 등이 그들이다.

 

최근에 희소식도 날아들어 힘이 더욱 난다. 박찬호가 재단에 1억원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전해왔기 때문이다. 기부금은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박찬호를 대신해 그의 매니지먼트사인 Team61 정태호 대표이사가 이승엽 야구장학재단에 전달했다. 이승엽이 박찬호 장학회 행사에 참석하고, 박찬호가 이승엽 장학재단 행사에 기부하는 모습에 팬들은 물론 야구계 전체가 반가워한다.

 

흡사 세계 최고 부자이자 기부왕으로 꼽히는 워런 버핏(버크셔 해서웨이 회장)과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가 서로의 재단에 거액의 기부금을 주고받는 것 같은 장면이 우리 야구계에서도 연출된 것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야구 레전드들이 서로의 재단에 도움을 주고받고, 풀뿌리 야구 발전을 위해 앞장서는 모습은 야구계에 좋은 본보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승엽은 자신의 야구장학재단의 도움을 받은 선수가 좋은 선수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게 또 하나의 목표이자 꿈이 됐다.


 

MVP에 선정된 이승엽 선수

 

▎2. 이승엽은 국내 복귀 첫해였던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MVP에 선정됐다. 한국시리즈 후 동료들에게 샴페인 세례를 받고 있는 이승엽. / 3. 요미우리 이승엽과 주니치 타이론 우즈가 2006년 센트럴리그 맞대결 도중 1루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둘은 국내에서 뛸 때도 홈런왕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 4. 경북고 시절의 이승엽. 투수로 삼성에 입단했으나 팔꿈치 부상 탓에 타자로 전향했다. 이승엽의 재질을 한눈에 알아봤던 백인천 감독은 박승호 타격코치를 ‘전담 교사’로 붙였다.

 

 

이승엽의 금과옥조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물론 전국에 수백 개의 야구팀이 있는데 제 손길이 다 갈 수는 없겠죠. 그러나 저의 조그마한 정성이 그 선수들에게 전해지면 힘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린 친구들의 꿈이 타의에 의해 깨지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금전적인 부분도 도움이 될 수 있고, 저의 코멘트 하나, 코치 하나가 필요한 친구도 있겠죠. 야구 장비가 필요한 선수도 있을 거고요. 조금씩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혼자의 힘만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동참을 해주시면 앞으로 좋은 프로야구 선수들이 더 많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모든 선수가 프로에 갈 수는 없겠지만, 장학재단의 도움을 받은 어린 친구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건강한 마음을 갖추고 커준다면 보람이 있을 것 같아요. 그냥 순수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는 자서전 수익금 전액을 야구재단에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재단을 통해 들어오는 강연과 광고 수입 역시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했다. 올해는 야구교실, 야구캠프, 장학금 전달 정도의 행사를 열 계획이다. 첫해인 만큼 큰 행사를 열기보다는 내실을 다지면서 범위를 넓혀갈 생각이다.

 

‘국민타자’로 떠오른 이승엽은 프로야구 선수 중 가장 체격이 큰 선수도 아니었고, 가장 힘이 센 선수도 아니었다. 프로에서 수술만 세 차례(1995년 입단 당시 팔꿈치 수술, 일본 프로야구 시절 2006년 무릎과 2007년 손가락 수술) 받는 어려움도 겪었다. 팔꿈치 수술 후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하고, 무릎과 손가락 수술 후엔 그 후유증으로 부진을 겪다 2군으로 떨어지는 우여곡절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선수 생활은 성공적이었다. 한국 야구사에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위대한 홈런왕 전설을 만들었다.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스스로도 “몇 가지로 요약하기는 어렵다”고 했지만 그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삶의 철칙으로 지켜온 행동은 교훈이 될 수 있다.

 

우선 ‘이승엽’ 하면 떠올려지는 말이 ‘진정한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이다. 그의 좌우명이다. 사실 이 말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다. 1995년 경북고 졸업 후 삼성에 입단했을 때 이정훈(현 한화 스카우트 팀장) 선배가 준 선물이었다. 1987년 빙그레에 입단해 신인왕에 올랐던 ‘악바리’ 이정훈은 1991년과 1992년 타격왕에 오를 만큼 최고의 교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1994시즌 후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이승엽과 같은 유니폼을 입게 됐다. 이정훈은 당시 “승엽아, 오늘 안타 두 개 때렸다고 좋아하면 내일 경기에서 5타수 무안타 나온다. 안타 친 건 빨리 잊고 열심히 훈련해라”고 조언했다. 전성기가 지난 이정훈은 그러면서 “나는 몸도 아프고 하니 이제 이건 네가 써라”라며 자신의 좌우명을 이승엽에게 건넸다.

 

“과연 ‘진정한 노력’이 무엇일까 깊이 생각해봤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다 노력을 하죠. 그중에 진정한 노력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답은 간단했습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가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그는 은퇴하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어기지 않은 훈련 습관을 만들었다. 바로 ‘오늘 할 일은 내일로 미루지 말자’ ‘내일 할 일을 오늘 하자’였다.


 

 

물방울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에 구멍이 생긴다


 

“남들은 보통 기본기부터 시작하죠. 1번이 쉽고 10번까지 뒤로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치면 저는 10번부터 시작해요. 쉬운 것부터가 아니라 어려운 것부터 하자는 주의죠. 어려운 걸 먼저 해 놓으면 나중에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열흘 동안 매일 스윙 100개씩 하면 1000개잖아요. 오늘 만약 30개 하면 내일 170개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일이 너무 힘들어지죠. 그 대신 오늘 100개를 하고 나서 힘들지만 30개만 더하면 내일 70개만 하면 됩니다. 만약 130개씩 할 만해서 매일 그렇게 하면 열흘 동안 300개를 더 하게 되는 것이죠. 저는 선수 시절 운동만큼은 남들보다 조금은 부지런했다고 생각해요. 힘들어도 오늘 해야 내일 편해지죠. 내일이 되면 또 같은 상황이 됩니다. 어제 많이 했다고 오늘 적게 하지는 않죠. 그러면서 남들보다 훈련량을 더 늘렸던 것 같습니다.”

 

타고난 재능에 훈련벌레. 그는 슬럼프가 와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훈련에 매진했다. 남들은 “때론 야구를 아예 잊는 것도 필요하다”며 휴식을 권유했지만 그는 미련할 정도로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 ‘진정한 노력’의 실체를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슬럼프가 왔을 때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친 듯이 훈련하는 것. 하나는 운동을 안 하고 마음을 편하게 갖는 것. 뭐가 좋을까? 쉽게 판단할 수는 없어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니까요. 만약 운동을 안 하고 영화 보고 친구들하고 놀면 몸은 정말 편하겠죠. 그러나 머리가 굉장히 힘들지 않을까요? 놀면서도 ‘오늘 훈련하지 않았는데 내일 잘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에 불편해질 것 같아요. 반대로 미친 듯이 훈련하면 몸은 굉장히 힘들지만 마음은 편할 수 있어요. 그러면 잠도 잘 오고. 강연에 가서도 저는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후배들에게 권하지는 않아요. 나는 그렇게 했었다고 말만 할 뿐이죠. 심지어 제 큰아들도 의견이 다르더라고요. 아들이지만 그건 존중해요.”

 

그는 “성공에 지름길은 없다”고 했다. 그래서 현역 시절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가장 먼저 야구장에 출근했고, 하루도 자신이 정한 훈련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수적천석(水滴穿石).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돌에 구멍이 생긴다는 말이다. 이승엽은 타고난 재능보다 땀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이승엽은 은퇴 후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목표였다. 1999년 앙드레김 패션쇼에서 만난 인연으로 결혼한 아내 이송정(36)씨는 ‘국민타자’인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만 했다. 21세의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온 뒤 자신의 꿈까지 포기해 이승엽은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큰아들 은혁은 중학교 2학년이며, 둘째 아들 은준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승엽은 은퇴 후에도 생각보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야구선수 때보다 더 바빠진 것 같아요. 생각과는 다르네요. 그래서 아침에는 웬만하면 애들을 등교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는 야구선수로서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섰지만 가족 얘기만 나오면 고개를 숙인다. 야구에만 전념하느라 가족 구성원으로서는 제 몫을 못 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07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지난해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은퇴식을 할 때 어머니 사진이 전광판에 뜨는 순간 그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이유다.

 

“자서전에도 썼지만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나 크다는 걸 돌아가시고 나서 알았죠. 엄마에게 받기만 했지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어요. 그게 후회되는 거죠. 뇌종양으로 돌아가셨는데, 예전부터 머리가 아프다면서 약국에 가서 약 지어 드신 게 전부였어요. 그때 병원에 가서 검사라도 했더라면…. 그게 너무나 안타깝고 지금도 후회가 됩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왼팔에 반깁스를 하면서 지금도 팔이 굽어 있습니다. 당시엔 스포츠의학이 요즘 같지 않아서 물리치료도 하지 않았죠. 그래서 경기 때는 진통제 안 먹고 뛴 적이 없었어요. 투수로서 공을 던져야 하기 때문에. 팔이 굽어 있다 보니 엄마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찜질을 해줬어요. 한 번도 빠짐없이. 그런데 난 그때도 엄마에게 귀찮다고 ‘하지 마라’고 했어요…. 은퇴 후 요즘엔 가끔씩 기분 안 좋을 때 엄마 산소에 혼자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척추 협착증도 생기고 뇌졸중도 있어서 세 번이나 쓰러지셨어요.”

 

 

이승엽 야구장학재단

 

▎이승엽이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마친 뒤 ‘이승엽 야구장학재단’ 현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은 야구를 비교하면서 두루 경험하는 시기”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그의 점수는 얼마나 될까? 스스로에게 점수를 매겨 보라 했더니 겸연쩍은 웃음부터 짓는다.

 

“아들 이승엽은 50점도 안 됩니다. 경상도 남자이고 표현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요즘엔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어서 ‘건강이 최곱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고 말하지만 선수 시절엔 전혀 그런 말도 못했어요. 남편으로서는 그래도 음…, 60~70점 정도 되지 않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와이프가 생각할 때는 아마 20~30점 정도 생각하겠죠. 아들들에게도 나 스스로는 90점, 100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객관적으로 보면 두 아들에게도 70~80점은 될 것 같네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아이들하고 시간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저녁에는 웬만하면 가족과 식사를 하려고 해요. 예전엔 내가 경기 마치고 집에 가면 두 아들은 거의 자고 있었죠. 엄마는 혼자 두 아들을 키우다 보니 소리 지르고 화내고 그러거든요. 악역은 엄마가 하고, 아빠는 아들 좋아하니까 요즘 아들이 너무 아빠만 찾아요.”(웃음)

 

이승엽의 부친 이춘광(75)씨는 아들에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며 늘 겸손하라고 가르쳤다. 특히 “야구를 못하는 선배들에게 더 잘하라”고 일렀다. ‘이승엽’ 하면 늘 ‘겸손’이 연관 지어지는 것은 이런 아버지의 교육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승엽은 현역 말년에 홈런을 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라운드를 돌았다. 홈런을 맞은 어린 후배 투수의 기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홈런 세리머니도 자제했다. 남을 배려하는 자세와 마음가짐. 그는 선배와 후배, 야구인과 비(非)야구인을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존경을 받아왔다. 그렇다면 이승엽은 두 아들을 키우면서 어떤 부분을 강조할까.

 

“저희 아버지는 매우 엄격하셨어요. 무서웠죠. 그러나 저는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저는 다른 아버지상을 그렸어요. 때론 친구 같고, 때론 형 같은 아빠 말이죠. 아들한테 강조하는 것도 조금은 달라요. 저는 그저 ‘결과에 신경 쓰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마라. 최선을 다한다고 반드시 잘되는 건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고 안 되면 후회는 안 한다’는 말을 자주 하죠.”

 

이승엽은 선수 시절 야구장에서는 용맹한 ‘라이언킹’이었지만, 그라운드를 벗어나면 다소 숙맥이었다. 내성적이었고, 부끄러움도 많이 탔고, 소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니폼을 벗은 이승엽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목소리가 더 커졌고, 성격도 활발해졌다. 그 역시 이런 의견에 동의했다.

 

“예전엔 어디 가더라도 숨고 싶고,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았어요. 무조건 사람 없는데, 구석진 곳을 찾았죠. 음식점도 맛있는 곳보다 조용한 곳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척 하는 게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사람들이 아는 척 하면 반갑게 받아주고 그래요. 낯짝이 두꺼워졌다고 해야 하나?(웃음) 주변 사람들도 그래서 그런지 요즘 저를 보면 ‘편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해요. 의외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엔 야구할 때 빼고는 소심하고 혼자 있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성격이 굉장히 외향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은퇴 후 그는 크고 작은 행사에 많이 다닌다. 자칫 재단 운영을 잘못할 경우 비난의 화살이 곧바로 날아들 수 있기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재단과 관련한 공부도 많이 한다. 강연은 스스로 절제한다. 강연에서는 무슨 얘기를 주로 할까.

 

“조금 부담스럽죠. 주위에서는 ‘넌 전문 강사도 아닌데 강연을 퍼펙트하게 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너의 진솔한 이야기, 너의 경험을 듣고 싶은 거다’라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강연을 해도 조금 죄송해요. 요즘엔 좀 방법을 바꿔서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진행해요. 운동선수 때 질문 받으면 대답은 잘했으니까요. 강연 주제는 대부분 어떻게 야구를 시작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경기를 준비하고, 어떤 생각으로 경기에 임하는지 등등. 분야는 다르지만 운동이나 사회나 최고에 오르기 위해서는 비슷한 점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 이야기가 많은 분에게 힌트가 된다면 의미가 있겠죠. 저도 23년간 줄곧 성공만 한 것도 아니고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런 걸 말씀드리면 듣는 분들도 자신에게 맞는 부분을 취사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운동선수들은 대부분 은퇴 후 지도자의 삶을 살지만 그는 일단 바깥으로 나왔다.

 

“지금은 야구장학재단 일과 KBO 홍보대사로서 KBO리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야구장에 가서 구경을 많이 하고 싶어요. 아무래도 해온 게 야구이기 때문에 야구가 좋죠. 그래서 야구를 떠나고 싶지 않아요. 언젠가는 야구계로 복귀한다는 것은 100%입니다. 지도자가 될지, 해설자가 될지, 유니폼을 입을지, 양복을 입을지 모르지만 한 번쯤은 현장에 복귀하고 싶어요. 물론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엮여서 함께 뒹굴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하고 싶다고 되는 건 아니겠죠. 아직 시기도 알 수 없고요. 다만 지금은 야구선수 때 보는 야구와 밖에서 보는 야구를 비교해보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박지성처럼 행정가로도 갈 수 있느냐’라고 묻자 그는 “모든 가능성은 다 열려 있다”고 했다. ‘먼 훗날 팬들이 이승엽을 어떻게 기억하면 좋겠느냐’는 물음에는 “최선을 다했던 선수, 모범이 되는 선수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다시 태어나도 또 야구를 하겠느냐’ 질문에 “당연하다. 야구를 안 했으면 이런 자서전이 나오고, 이런 인터뷰도 할 수 있겠는가”라며 활짝 웃었다.


 

ⓒ 이재국 MBC스포츠 ‘야구중심’ 전문패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