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괴짜 감독인 양익준 감독이 영화계의 여왕 '강수연'을 만났다. 필연적으로 독특할 수밖에 없는 그만의 비튼 시선에서 ‘문제적 인물’을 향한 지독한 내면 탐구가 시작된다. 첫 번째 상대는 한국 여배우로서 처음으로 월드스타의 반열에 오른 강수연이다.
외강내유(外剛內柔)’의 면모를 드러낸 강수연이 당신에게 건네는 애정 어린 충고, 그리고 영화인으로서의 속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국 여배우 '강수연'을 말하면 어떤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요? 아마도 임권택 감독님 영화 <씨받이>가 생각 날수도 있을 텐데요. 20년에 가까운 배우생활을 하며 그녀를 영화 <똥파리>로 유명한 감독 양익준씨가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우리 문화계의 문제적 인물들을 탐구해보자는 기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작된 새로운 프로젝트! 지금 만나봅니다.
영화는 역사를 반영하고, 그 역사는 인간의 내면에 기인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제 불혹을 갓 넘긴 천재 괴짜 감독의 영화적 고뇌도 자연히 인간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 감독이 첫 번째로 선택한 인물은 영화배우 강수연이다. 그는 20대 초반 영화 <씨받이>(1987년·베니스 영화제)와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년·모스크바 영화제)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국제 영화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주인공이다. 이제 데뷔 40년 차의 한국영화계의 ‘대들보’로 거듭난 강수연은 최근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면서 그 책임을 다하고 있다.
한국 영화계 괴짜 감독 양익준의 시선으로 들여다본 여왕의 내면 속으로 초대한다.
결정하면 바로 해. 그것도 방법이야
양익준(이하 ‘양’): 어제 선배님께 연락해 인터뷰 요청 드렸잖아요? “7월 23일부터 8월 3일 중에 편하신 날짜 선택해 주시면 좋겠다고.” 근데 제 말이 끝나자마자 “23일 2시가 좋아”라고 하셔서 진짜 깜짝 놀랐어요.(웃음)
강수연(이하 ‘강’): ‘할 거냐, 안 할 거냐’ 결정하게 되면 곧바로 하는 것도 방법이야.
양: 굵고 빠른 선택을 하신다는 점이 훌륭하신 부분이라 생각돼요. 근데 젊은 사람들은 아직 삶의 연혁이 짧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기 어렵잖아요. 선택을 도와주는 삶의 주머니가 아직 덜 여물어서.
강: 자기결정에 대한 책임을 질 용기가 있으면 돼.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에서 실패를 수도 없이 많이 하지. 70% 이상이 실패일 거야. 근데 그 때는 빨리 인정해야 해. 빨리 무릎 꿇어. 그 실패를 인정하는 용기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거야.
양: 그런 책임에 대한 용기를 언제부터 갖게 되셨나요?
강: 수많은 실패를 하다가. ‘이게 아니기도 하구나’라는 후회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까…. 근데 기자님한테 얘기해줬어? 내가 1분 만에 콜 했다고?(웃음)
양: 선배님은 10대 이전부터 보통의 그 나이대가 겪기 힘든 어찌 보면 성인의 영역, 그것도 유명한 배우로써의 시간들을 겪으셨잖아요. 예전에 제가 공황장애 때문에 힘들다고 칭얼거릴 때(웃음) 선배님이 ‘야, 그거 난 이미 10대 때 다 겪었어’라고 말씀하셨죠?(모두 웃음)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상황을 이미 10대 때 다 겪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강: 미치지. 왜냐면 그 당시엔 아직 정확한 자아도 없고 게다가 사춘기에…. 완전히 미치지 그때는. 근데 겪고 나면 별것 아니야.
양: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이 지금 굉장히 많잖아요.
강: 아, 너무 많지. 얘기들을 안 해서 그렇지. 배우들 중에도 많고.
양: 요즘은 매체를 통해 배우가 자신의 상태를 많이 드러내서 그렇지. 이전에는 오해도 많이 샀을 것 같아요.
강: 예전에는 정신병이라고 그랬지. 그래서 일부러 얘기들을 안 한 거지.
난 강한 사람이 아니야
양: 제가 한참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일 때 선배님이 대학병원 예약해주시고 꼭 진료받으라며 압력행사까지 하셨잖아요.(웃음) 손목 팍 끌고 직접 데리고 가듯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강: 야! 무슨 초등학생이니? 병원을 손목 끌고 가게? 가. 병원 가면 고쳐져.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몰라?
양: (웃음) 나이를 먹어가며 때때로 혼내주는 사람이 그리워요. 어제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봤는데 그 작품에 출연하는 조재현 씨가 지금의 저마냥 선배님께 타박을 받던데요?(웃음) 근데 영화 너무 좋았어요.
강: 아, 그 영화 잘 만들었어. 그게 임상수 감독의 첫 번째 영화잖아.
양: 당시 그렇게 솔직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아요. 쓸법하지 않은 아주 거친 핸드헬드(카메라를 들고 찍는 방법)로 배우들을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게 하려 했던 것 같아요. 거친 촬영법이었는데 그 거친 방식이 배우들의 말투나 행동을 더욱 사실적으로 만들어 주더군요. 당시(1998년)가 지금보다 성적인 이야기나 농담이 훨씬 더 활발하던 시절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성’의 공개적인 표현에 상당히 보수적이었죠.
강: 그렇지. 임 감독은 데뷔 준비 중이었고 유명한 감독이 아니었잖아. 시나리오를 그 감독이 직접 썼거든. 이 발칙한 시나리오가 나한테 들어왔어. 당시의 통념을 벗어난 영화라 캐스팅하는 게 많이 힘들었던 거 같은데. 정말로 나 그 시나리오 읽자마자 그 자리에서 ‘이걸 왜 안 해? 해! 이렇게 재밌는데’ 그랬잖아.(웃음) 근데 주변에서는 걱정스러워했지. 이야기가 (성적으로) 너무 노골적인 것 같으니까.
양: 그때 그런 영화가 기획됐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잖아요. 최근 이 영화를 본 분들이 ‘아니, 이게 90년대에 만들어진 영화란 말이야?’ 하고 놀라는 반응이더라고요.
강: 시나리오를 진짜 잘 썼어. 그거 읽고 ‘배우들이 왜 이걸 다 안 한다는 거지?’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생각과는 다르게 여배우 캐스팅이 안 되는 거야. 너무 노출도 심하고 야하고, 그러한 표현자체를 많이 가릴 때였으니까.
양: 사실 작품에서의 성적인 표현이나 노출에 대한 부분이 이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다고는 하지만 <처녀들의 저녁식사>만큼 솔직한 표현의 현대 영화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성적 담론을 일상으로 끌어와 불편하고 특별할 수도 있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한 느낌이에요. 저도 최근 임상수 감독님 영화에 출연했어요. <나의 절친 악당들>이라는 영화에서 아프리카계 불법 환전소 사장으로요.(웃음)
강: 아, 그랬어? 양 감독 그런 비주얼은 아마도 본인이 본인을 캐스팅한다고 해도 그러한 역할을 줄 수밖에 없을 거야.(웃음) 내가 청순가련한 역에 캐스팅 안 되듯이 그대도 그런 캐릭터가 딱이야.
난 배우이면서 순수한 관객이기도 해
강: 나 안 강해. 강하지 않는데….
양: 미디어가 선배님을 그렇게 캐릭터화시킨 게 좀 있죠.
강: 그러니까. 지금 이미지는 미디어라든가, 영화에서 맡았던 캐릭터들로 인해 만들어진 거지. 사실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야.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역할들이 그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들이었잖아. 일상적인 모습으로 시대를 대변하기는 어려웠어. 자연히 색깔이나 성격이 강할 수밖에는 없었거든. 내가 연기해왔던 진하고 강한 캐릭터 때문에 지금의 강한 강수연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거지, 스스로를 한 번도 강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양: ‘강수연’ 하면 강단 있고 세고 월드스타고 그런 이미지가 사실 좀 강했죠.
양: 실제로 이렇게 만나게 되면 잘 챙겨주고 올바른 이야기해주는 누나 같은데. 참, 이 인터뷰 담당하는 김포그니 기자가 왜 양익준을 좋아하시는지 함 물어봐 달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강: 영화를 잘 만드니까. 근데 만나보니까 정상은 아니더라.(웃음) 난 사실 양 감독을 만나기 전에 영화 <똥파리>를 봤거든. 그날 너무 흥분해서 같이 본 사람들이랑 맥주 마시며 밤새 얘기 나눴어. 그 이후에 모로코의 마라케시 영화제를 가게 됐잖아? 근데 공항에 무슨 노숙자가 앉아 있는 거야. 그런데 부산영화제 홍효숙 프로그래머가 그 노숙자랑 인사를 하더라고. 서로 아는 사이인가 하고 외면했는데….(웃음) 근데 갑자기 홍효숙이 나한테 ‘언니! 언니가 좋다던 똥파리’ 그래서 내가 ‘뭐 똥파리? 일루 와봐’(웃음)
양: 선배님은 유명인사셨고 게다가 영화사적으로도 영화 연보에 나올 분이라 생각했는데 그때 등산복 입고 계셨잖아요. 그런 복장으로 ‘니가 똥파리야?’ 그러며 반겨주시니까 뭔가 비현실적이었죠.(웃음)
강: 그때 내가 좋다고 만지지 않았어?
양: 성추행 하신 것 같아요. 허벅지도 만지고.(일동 웃음)
강: 좋아서. 좋아서.
양: 그때 ‘아, 똑같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좋아하는 영화의 배우를 만났을 때 이런 분도 똑같이 가슴 벅차하시는구나’라는 걸.
강: 나는 정말로 열렬한, 순수한 관객이야. 배우이면서도 영화를 미치게 좋아하는 관객이지. 감동적인 영화를 만든 사람을 만나는 건 흥분 그 자체지. 근데 양 감독 첨 봤을 땐 노숙자인줄 알았던 거고.(웃음)
양: (웃음) 덕분에 ‘아, 이 영화 만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때로는 선배님한테 제가 꽤 많이 혼나기도 했죠. 사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며 고집만 생기다 보면 어느 샌가 자신을 올바르게 혼내주는 사람이 그립잖아요. 저한테는 그게 선배님이셨어요. 그런데 같이 놀 때는 ‘아하하하’ 소녀처럼 웃으시기도 하고.(웃음) 여배우들 중에 저렇게 이를 활짝 드러내고 웃으시는 분이 얼마나 있을까.
강: 근데 좀 안타까워했던 건 조금만 더 환경을 좋게 해서 영화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거였지. 양 감독이 너무 쫓기듯이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픈 거야. 앞으로는 좋은 영화 만들어줘.
천재를 보면 열렬한 질투를 느끼지
양: 그때는 제가 혼자만의 동굴로 들어갔던 날이라.(웃음) 요즘 이상하게 영화를 잘 안 보게 되네요.
강: 영화 하는 사람이 영화를 안 보면 어떡하니?
양: 영화인인데…. 봐야죠!(웃음) 그런데 그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자비에 돌란’이라는 배우는 감독으로서도 천재적이고, 20대 초반에 칸 영화제에서 수상도 여러 번 하고 심사위원도 했었잖아요. 선배님은 그런 사람을 보면 어떠세요?
강: 열렬한 질투를 느끼지. 왜 나는 저 나이에 저런 걸 생각 못했나,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감성을 표현할 수 있을까? 분명히 나도 저 나이에 저런 감성이 있었는데. 난 표현하고 느끼는 방법을 잘 몰랐던 것 같아. 나 영화 <똥파리> 보고도 그랬어. ‘뭐? 이게 첫 작품이래? 뭐야, 쟤.’ 바로 주변에 전화해서 ‘야! 양익준에 대해서 빨리 브리핑해봐’ 그랬지.(웃음)
양: 자비에 돌란과 저를 같은 비교선상에 놓을 순 없지만.
강: 아니야. 비교 가능해. 그 나이에 그런 감성을 표현한다는 건 엄청난 재주지. 미친 거지. 양 감독, 그때 아팠던 게 당연해. 그 나이에 그런 걸 확 터뜨렸으니 병이 나야지. 근데 외모는 아니고. 외모는 비교불가.(일동 웃음)
양: (주변에) 웃지마 조용해!(웃음) 제가 자비에 감독과 표현에 있어 비슷한 부분이 있다면 부모인 것 같아요. 그의 테마는 엄마고 전 어떻게 보면 아빠고. 그한테도 나한테도 가족 안에서 오는 것들이 영화적 모티브를 일으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영감의 저장소 역할이랄까요? 많은 데뷔작의 주요 테마가 가족이나 지인에서 기인되는데 아마도 이걸 깨야 다음 분기로 넘어갈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무의식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 같아요.
강: 그래, 극복됐으면서 뭘 그래. 다들 그러고 살아.
열심히 해, 사랑. 중요하니까
양: 나이가 들며 만나는 사람 수가 크게 늘지 않잖아요. 하지만 오랫동안 진하게 교류하는 몇몇 사람이 있죠.
강: 정말 친하고 신뢰하며 지내는 분들은 알고 지낸 지 못해도 10년, 15년은 넘은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람관계에 대한 신뢰는 상대적으로 옅을 수밖에 없지. 게다가 언제부턴가 소통에 있어서 내 자신이 대단한 기술자가 되어있더라고. 이전의 오랫동안 알고 지낸 분들과 대화하는 것과는 다른 식으로. 그런 게 싫어.
양: 기본적으로 오랜 기간 함께한 사람들이 좋죠.
강: 반면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좋다는 표현을 굉장히 해.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정도로.(웃음) 그 사람들과 오랫동안 좋은 시간들을 같이했다는 게 소중하고 감사한 거야.
양: 여렸을 적에 선배님에게 부모는 어떤 존재였어요?
강: 우리 집안은 영화랑 정말 아무 관련도 없는 평범한 집안이었어. 너무 평범한 집. 내가 집 앞 골목에서 놀다가 캐스팅됐잖아. 길거리 캐스팅의 원조가 나야.(웃음) 영화관계자가 ‘너희 집 어디니?’ 손 붙잡고 들어가서 부모님에게 허락을 구했지. 그런데 반대하셨어. 왜냐면 나도 집에서 귀한 딸이었을 거 아냐. 자식 고생시키는 일을 허락하기가 싫으셨던 거지. 얌전히 시집가는 걸 바라셨던 세대고. 엄청나게 반대하셨지. 그렇게 (연기를) 못하게 하시다가 고등학교 2~3학년 때쯤에 ‘얘는 이거 해야 하는구나’하고 인정하셨지.
양: 직접적으로 뭔가 지원을 해주신 건 아니더라도 부모님들에게 느낀 부분이 있지 않았어요? 딸의 일을 마음으로 응원해줬다거나 하는.
강: 나는 정말 우리 아버지의 열렬한 사랑을 받으면서 컸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고,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고 키우셨으니까. 근데 돌아가셨잖아, 작년에….
양: 네…. 사랑이라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강: 그러니까 열심히 해, 사랑. 중요하니까.
아버지와 같은 임권택 감독님과 한국 영화배우, 예술가로써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의 '강수연' 그녀 야이기는 중앙시사매거진 월간중앙 09호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영화감독 양익준의 내면 탐구의 시작 '문제적 인터뷰' 두 번째는 누구를 만나게 될지 사뭇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