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문화와 문명을 가리키는 척도, 책. 고서점은 아름다운 책방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고서점을 가진 나라다. 어제, 오늘, 내일이 함께하는 마음의 안식처, 일본의 고서점에 가보았다.
도쿄에 위치한 진보초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초 밀집형 고서점가다. 야스쿠니 신사와 메이지 대학 사이에 위치한 이곳에는 약 160개의 고서점이 있다. 도쿄에는 진보초 외에도 분쿄쿠, 혼고우의 학술지 관련 고서점가, 와세다 대학 주변의 와세대 고서점가 등 크고 작은 고서점가들이 들어서 있다.
원래 진보초는 에도 시대 사무라이들의 숙소로 유명하다. 하지만 19세기 말 메이지 천황 체제로 들어서 월급을 줄 막부가 사라지면서, 이들은 실업자로 전락한다. 더불어 숙소나 부속 건물도 천황이나 국가 재산으로 넘어갔는데, 텅 빈 숙소는 국민 교육의 무대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 사무라이 숙소가 책방으로, 진보초 고서점의 시작
진보초 고서점은 그 같은 영고성세를 통해 등장한다. 학교가 세워지면서 주변에 책방이 필요해진 것. 새 책을 구입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즐겨 찾던 중고 서적 전문서점도 등장하면서 오늘날의 서점가가 탄생했다. 가장 오래된 고서점은 1877년 문을 연 '유히가쿠'로, 현재는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되며 창업 이래 6대손이 경영하고 있다.
진보초 한복판에 들어선 이와나미 출판사는 일본 지식인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원래 이와나미는 출판사가 아니라, 1913년 작은 고서점에서 출발했다. 책에서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의문이 생기면서 아예 책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진보초 고서점가에는 중국 관련 신간만이 아니라 고서도 엄청나다. 가격은 1천 엔대에서 수십만 엔대까지 다양하다. 고서의 대부분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1930년대 전후에 나온 것이라서, 중국 관련 서적이 즐비하다. 야마모토서점은 일본 내 중국연구가는 물론 중국인 학자도 반드시 들르는 중국 관련 고서점의 대명사다.
▒ 손에 쏙 들어가는 '신쇼'
30여개 출판사가 매달 쏟아내는 '신쇼'는 손바닥 안에 꼭 들어가는 포켓형 책으로, 대략 두세 시간에 읽기를 끝낼 수 있다. 하드커버 서적 가격의 절반 이하인 800엔대에 팔린다. 내용이 부실한 책일수록 책의 크기가 고급 하드커버로 가리려 하기 마련. 신쇼는 거품을 뺀, 120% 내용에만 충실한 책이다.
현대 일본인은 책을 집에 보관하지 않는다. 한 번 읽은 잡지는 지하철에 그대로 두고 내리며, 읽은 책은 리사이클을 통해 시장에 되파는 것에 익숙하다. 800엔짜리 신쇼는 고서점에 80엔 정도에 되팔린다. 리사이클을 통해 고서점에서 재등장하기까지는 금방이다. 유명 작가의 신쇼가 나온 지 1주일만 지나면 고서점 중고품으로 나타난다.
신쇼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 등 세상만사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일본에서 한 달에 출간되는 신쇼의 종류는 평균 100여 권이 넘는다. 진보초에 몇 년만 안 가도 다양한 주제의 새로운 신쇼를 엄청나게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신쇼는 진보초 고서점가를 찾는 대부분의 공통 관심사이기 때문에, 대부분 입구에다 아예 신쇼 진열대를 따로 설치해둔다.
▒ 고서점가와 어우러진 주변 문화
고서점가 골목 곳곳에 들어선 휴식 공간, '기사텐'도 가볼만 하다. 담배도 피우고 차도 마시는 이곳은 분위기가 고서점가의 품격에 어울린다. 커피 한 잔이 보통 찻집보다 200~300엔 비싼, 800엔 정도긴 하지만, 사이폰으로 뽑아내는 '향'에 특화하는 커피맛을 즐길 수 있다. 일본 대표 문학가의 흔적이 묻은 찻집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진보초도 빠른 속도로 외국인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변신해가고 있다. 고령화와 함께 고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보초는 관광객을 위한 공간만이 아니다. 여유를 즐기지 못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을 위한 마음의 안식처가 바로 이 진보초 같은 공간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