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앞두고 대기업의 ‘인사 재편’ 작업이 이뤄졌다. 각 기업의 임원 인사를 보면 새로운 1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안정을 꾀하는지, 새로운 변화를 꾀하는지에 따라 해당 기업은 물론, 파트너·협력사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는 2019년, 대한민국 경제를 대표하는 5대 그룹의 인사 방향을 살펴보면 한국 경제의 2019년 청사진도 함께 볼 수 있다.
삼성과 LG는 나란히 안정을 택하면서 부분적인 교체를 진행했다. 전자업계를 중심으로 한 양강(兩强)은 중국 브랜드의 부상에 따른 위기에 대응하는 ‘전시 상황’에서 ‘전투 중 장수를 교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운 셈이다.
물론 부분적인 변화는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했다. LG의 경우 LG화학에 3M 출신의 신학철 부회장을 영입하며 화학업계 1위 탈환을 넘어 차세대 소재 분야 경쟁력 강화를 꾀하는 인사를 보여줬다. 2차 전지(배터리)를 비롯해 디스플레이용 정보전자 소재 등 비(非)석유화학 분야 사업의 성장이 그의 손에 달렸다. 특히 전기자동차 시장이 점차 확대되고, 스마트폰이나 TV 등 전자 기기의 디스플레이 기술에 새로운 혁신이 오고 있어 변화가 예상된다.
이외에 글로벌 컨설팅 법인 베인앤드컴퍼니 출신 홍범식 사장(LG 경영전략팀장) 영입은 LG그룹의 ‘컨설턴트 애호 경향’을, 한국타이어 연구개발 본부장 출신인 김형남 부사장(LG 자동차부품 팀장)과 보쉬코리아 영업총괄을 맡던 은석현 전무(LG전자 VS사업본부) 영입은 자동차용 전장(전자장치) 분야 강화 기조를 보여줬다.
삼성의 경우 삼성전자에서 네트워크사업부 수장을 김영기 사장에서 전경훈 부사장으로 바꾸며 5세대(5G) 이동통신 시대 개막을 맞아 분위기 쇄신에 나섰다. 전임 김 사장이 기존 LTE(롱텀에볼루션) 시장에서 인도 거래선 확보 등 기반을 다졌다면, 전 부사장은 이제 이를 토대로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입지를 확대해야 한다.
두 그룹은 이들 인사 외에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았다. 삼성은 삼성전자 DS부문 대표인(반도체 등 부품 사업 담당) 김기남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켰으나, 이는 앞서 권오현 회장처럼 반도체가 삼성전자의 가장 큰 근간이라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라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임원 승진자 규모는 158명으로 전년도보다 30% 가까이 줄었다. 보험·카드 등 금융계열사의 경우에도 일부 수장 교체가 있을 것이라던 전망을 일축하고 전원 유임을 발표했다. 삼성증권은 갑작스런 배당 오류 사태로 구성훈 대표가 금융당국으로부터 직무정지 징계를 받으면서 장석훈 대표로 급하게 교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삼성-LG, 폭풍 앞둔 ‘전략적 고요함’
LG도 권영수·하현회 등 기존 부회장단 5인을 유임시키며 역시 안정을 꾀했다. 다만 LG유플러스 대표였던 권영수 부회장이 지주사인 ㈜LG로, 지주사에 있던 하현회 부회장이 LG유플러스 대표로 서로 자리를 맞바꿔 간 점에서 구광모 회장이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 의미 있는 대목이다.
15분기 연속 적자인 LG전자 스마트폰 사업(MC사업본부) 수장도 결국 내부에서 조정하는 수준으로 매듭지었다. LG이노텍의 정철동 대표 선임은 기존 LG디스플레이 출신의 임명 기조를 그대로 이어간 것이다. 그룹 전체 임원 승진규모는 134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두 그룹은 앞서 언급한 바에서도 보듯 총수 세대교체가 이제 시작 단계인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과 구광모(LG 회장) 두 사람의 경영권 안정을 위해 조직을 일단 차분하게 하면서 최소한의 자극만 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상속과 승계 과정에서 다소 잡음이 일어난 상황과 주력사업이 중국의 거센 추격 속에 한창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변화를 최소화했다. 적어도 내년까지는 치열한 전장(戰場)이 될 각종 사업부서에 내부적인 충격을 덜어주며 외부와의 경쟁에 고삐를 늦추지 말라는 메시지인 셈이다.
이와 달리 현대차와 SK, 롯데는 ‘격변’급 인사 규모를 보였다. 현재 총수의 승계 작업을 상당 부분 진행했고, 법적인 리스크도 상당 부분 덜어냈거나 해소했다. 이제는 새로운 총수 체제를 확고하게 굳히면서, 동시에 급변하는 사업분야 특성을 고려한 인물 교체가 이뤄졌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내수시장은 물론 중국 등 해외에서도 부진하며 실적 악화를 겪었지만, 임원 승진자는 10% 늘렸다.
승진자 대부분이 미래 자동차산업 담당인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전체 승진자 중 연구개발·기술 분야 승진자(146명) 비중이 42.1%로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40% 이상을 기록했다. 동시에 영업·마케팅 승진자도 전년 대비 50% 이상 늘어난 89명으로 브랜드 경쟁력과 판매 역량 강화를 꾀했다.
이 밖에 첫 외국인 연구개발(R&D) 총책임자 알버트 비어만 사장의 이동도 흥미롭다. 30여 년 동안 독일 BMW에서 고성능 차종인 M 시리즈 개발을 주도해 왔고, 현대차 합류 이후 N 시리즈·G70(제네시스)·스팅어(기아차) 등 새로운 카테고리를 개척하는 그의 손길이 이제 현대차의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괄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마찬가지로 외부(삼성전자) 출신인 지영조 전략기술본부장의 사장 승진도 역시 주목할 요소다.
다만 그룹 내 계열사간 이동이 이뤄진 점은 기존 현대차그룹의 원칙인 ‘한 곳에 오래 두지 않는다’는 기조와 맞물린다. 정진행 사장이 부회장 승진과 함께 현대건설로 이동했고, 우유철 현대제철 부회장이 현대로템 부회장으로, 박정국 현대케피코 사장이 현대모비스로, 문대흥 현대파워텍 사장이 현대오트론으로 각각 이동하며 계열사 대표가 일제히 바뀌었다.
정진행 부회장의 경우 그룹의 숙원사업이 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일대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개발 작업을 주도할 것으로 보인다. 관계당국의 인허가 문제 등으로 표류하고 있는 사업에 물꼬를 트고 완성해야 한다는 의중이 담겼다는 해석이 나온다.
SK는 신임 대표(CEO) 4명을 배출하는 등 비교적 큰 폭의 변화를 줬다. 장수 CEO였던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에 이어 이석희 사업총괄이 새로 CEO를 맡은 것을 비롯해 SK건설(안재현 대표), SK가스(윤병석 대표), SK종합화학(나경수 대표)도 새로운 수장을 맞이했다.
SK그룹은 세대교체 및 변화·혁신 가속화를 위해 전문성과 경영능력을 갖춘 50대 초·중반의 신임 CEO를 대거 발탁했다고 설명했다. 신임 임원의 평균연령은 48세로 계속 ‘젊어지는’ 기조를 유지했고, 승진 규모는 예년 수준을 유지했다. 새로운 승진 잔치보다는 수장 교체를 통한 분위기 변화를 모색한다.
다만 하나 지켜볼 대목은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의 행보다. SK그룹의 인수합병(M&A) 작업 총지휘를 비롯해 그룹의 굵직한 현안을 주도해온 인물로, 계속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이번 인사와 조직개편에서 박 사장은 자회사인 SK브로드밴드의 대표이사까지 겸임한다.
SK텔레콤의 중간지주사 준비 작업의 신호탄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무선통신(SK텔레콤)과 유선통신(SK브로드밴드), 여기에 보안(ADT캡스-SK인포섹)의 결합을 통해 다가오는 5G 시대 융·복합 시너지 효과를 모색하려는 차원의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롯데 역시 큰 폭의 변화가 있었다. 그룹의 양대 축인 화학과 식품사업부(BU)장을 교체한 것부터 시작해 롯데케미칼·롯데푸드·롯데쇼핑·롯데하이마트·롯데렌탈 등 계열사 대표가 대거 바뀌었다.
우선 그룹 내 계열사를 부문별로 총괄하는 BU장의 변화를 보면 신격호 회장 시절 롯데를 대표해온 허수영 화학 BU장, 이재혁 식품 BU장, 소진세 사회공헌위원장 등이 자리에서 떠났다.
새로 화학부문 BU장에 오른 김교현 사장은 LC타이탄 대표를 맡아 실적 개선을 이끌어오고, 2007년부터 롯데케미칼 대표로서 실적을 입증해왔다. 식품 BU장을 맡은 이영호 사장도 롯데칠성음료로 입사한 뒤 2012년부터 롯데푸드 대표를 맡아 역시 성장을 주도해왔다.
세대교체는 비교적 완만하게
세대교체 흐름은 비교적 완만하게 나타났다. 조직을 흔들기보다는 연착륙을 통해 새로운 총수가 점점 자기 색깔을 드러낼 수 있도록 차분한 변화를 추구한다.
삼성그룹은 올해 인사에서 뚜렷한 세대교체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이미 앞서 지난 2017년 대표이사 3인방을 권오형·윤부근·신종균 체제에서 김기남·김현석·고동진 체제로 바꿨고, 이마저도 자연스러운 입장과 퇴장이었다는 점으로 평가된 만큼 역시 큰 폭의 급격한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현대차그룹은 일부 세대교체가 있었다. 다만 이미 정진행 부회장 등이 색깔을 내고 있었고, 비어만 사장을 비롯해 디자인 최고 총괄자(CDO) 토마스 쉬미에라 부사장, 상품전략 본부장 루크 동커볼케 부사장 등 2015년 입사한 외국인 임원들도 상당한 입지를 보장받은 채 조직 변화를 이끌어왔기 때문에 아주 급격한 변화는 아니라고 풀이할 수 있다.
LG그룹의 경우 LG상사는 윤춘성 부사장을 대표이사로 내정했는데, 기존 송치호 대표가 만 60세로 정년퇴임한 데 따른 교체였다. 부회장단 유임도 역시 그런 기조를 보여준다.
다만 ‘인화(人和)의 LG’가 아닌 ‘1등 LG’를 추구하겠다는 방향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더 짙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LG화학 신학철 부회장 영입이 대표적이다. 올해 신 부회장의 성과와 맞물려 이후 외부 영입과 같은 파격적인 조치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SK그룹은 SK하이닉스 대표 변경과 함께 SK텔레콤의 중간지주사 재편 과정을 볼 필요가 있다. SK그룹은 이미 사촌 간에 계열을 각자 끌고 가면서 동시에 느슨한 연합체를 유지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창업주인 고(故) 최종건 회장의 자녀(고 최윤원·최신원·최창원)와 2대 회장인 고 최종현 회장의 자녀(최태원·최재원)간에 각기 SK네트웍스, SK디스커버리, SK㈜-SK텔레콤 중심으로 뭉치는 각자의 지배구조가 있다.
이 중 특히 SK텔레콤의 중간지주사 전환 작업은 최태원-최재원 체제의 가장 큰 핵심 고리가 될 요소로, 지배력 강화와 함께 신사업 추진을 위한 그룹 영역 확장의 기틀이 될 작업이다. 이를 총괄할 박정호 사장의 행보에 따라 인사 이동이 추가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롯데그룹의 BU장 교체도 역시 기존 핵심 계열사 대표의 승진 임명에 따라 한편으로는 안정을 꾀하면서도, 이제는 새로운 세대가 주축이 된다는 점을 조직 안팎에 제시하면서 변화도 동시에 꾀하는 행보라 할 수 있다.
또 중국에서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관련 외교 갈등 과정에서 피해를 본 유통사업의 손실 여파를 털어내면서, 시너지효과를 내지 못한 금융사업(롯데카드·롯데손해보험)을 정리하는 등 그룹의 체질 개선을 위한 정비와 연계한 움직임도 볼 수 있다.
이런 흐름 속에 부회장을 포함한 사장단 평균 연령은 전반적으로 낮아졌다. 현대차그룹은 61.1세에서 57.9세로, SK그룹도 전반적으로 3~5세가량 평균이 내려갔다. 물론 연령이 낮다고 무조건 혁신적인 것은 아니지만, 기존 흐름 대신 변화를 택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도가 감지되는 징후로 풀이할 수 있다.
융합과 복합 의지 두드러져
융합과 복합의 의지도 역시 읽힌다. 현대차는 연구개발본부 내에 있던 미래차 융·복합 부문을 분리해 전략기술본부를 설립하고 지영조 사장을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미래 모빌리티·로봇·인공지능(AI) 등 첨단 미래기술 전략 수립과 투자 결정 같은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다. 삼성과 LG는 큰 폭의 변화를 주지 않았으나 이미 이전 인사 및 조직개편에서 해당 부분에 대한 정비를 마쳐 이를 다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SK그룹의 경우 최태원 회장이 직접 외치는 ‘애자일’(Agile, 민첩한 조직문화)과 사회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개편을 진행했다. 결재 구조의 축소와 단순화, 큰 단위의 ‘팀’으로 움직이는 대팀제, 정해진 자리가 아닌 자유롭게 착석하는 공유오피스 형태 좌석 운영 등을 통해 혁신적인 기업문화 창출을 꾀한다는 방침이다.
결국 이번 인사의 키워드로 꼽을 만한 사항은 ‘5G’라고 할 수 있다. 통신망에 모든 것을 연결해 모든 것을 융·복합시키는 5G의 변화처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면서 빠른 변화를 만들어내겠다는 점이 5대 그룹의 인사가 지향하는 지점인 셈이다.
5대 그룹의 인사는 두렵지만 맞서야 하는 격변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변수도 매우 많이 산재하고, 특히 인수합병(M&A) 시도와 성공·실패 여부, 성공 시 뒤따르는 조직 통합·융화 문제 등 각종 요소가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다.
삼성은 대규모 M&A를 몇 년째 멈추고 있고, LG는 최근 인수한 팜한농과 ZKW 같은 업체와의 시너지효과를 본격화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현대차는 꾸준히 유럽 완성차 업체 M&A 인수 후보군에 거론되고, SK와 롯데도 역시 새로운 M&A 대상을 찾고 있지만 시장 상황은 만만치 않다.
이런 환경에서 이번 인사는 기존 분야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빅블러(Big Blur)’의 시대에 생존을 확보하고 나아가 성장을 이뤄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도모하는 고민의 산물로 나왔을 것이다. 이제 그 산물이 성과로 이어지고 성공으로 나타날지 지켜볼 일이다.
이재운 이데일리 기자 jwlee@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