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월간중앙

인터넷 여론, 괜찮을까? 누구나 의사결정에 참여하지만, 주인은 소수!

요새는 여론조사 기관의 여론조사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졌지요. 대신 인터넷 여론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21세기의 여론 형성과 그 정의에 대해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어요.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는 2018년 8월 22일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한 국민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국민 500명을 조사했고, 응답률은 6.2%가 나왔고,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는 ±4.4%포인트였다. 결과는 기본방향유지(55.9%)가 전면 폐지(33.4%)를 압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결과를 놓고, 자유한국당은 “국민이 납득하지 않는 조사 방식”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설문 내용이 논란의 쟁점이었다. ‘소득주도성장은 ▷의료·주거·교육·통신 등 가계지출 경감 ▷최저임금의 단계적 인상과 영세상공인 지원 ▷아동수당·기초연금·치매국가책임제 등 사회안전망 확충을 통해, 소득을 높이고 성장을 추진하는 것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소득주도성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이렇게 묻는데 전면 폐지로 응답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시시비비를 떠나서 여론조사로 여론을 추출하는 20세기적 방식이 이제 권위 상실에 직면했음을 드러낸다. 이를 두고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예전에 없던 방식으로 21세기의 여론이 형성되고 있으니 이제 여론의 개념 자체를 재설정할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n분의 1’이 통하지 않는 인터넷 여론

여론의 기원은 어떻게 봐야 할까?


“여론이 새로운 사회적 현상으로 등장해서 권력의 원천이 된다는 인식이 생긴 것에서 근대정치가 출발한다. 과거 종교가 갖고 있던 권력을 여론이 대체했다. 여론은 20세기 이후 숫자 형태로 측정할 수 있는 여론조사가 등장하며 자리를 잡는다.”

여론이란 개념은 시대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을 듯하다.

“초기의 ‘여론’은 시민 계급이 공론장에 모여서 토론하고, 팜플렛과 뉴스가 거리를 떠도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모여 전쟁, 왕정 등에 대한 의견을 형성했다. 이것은 옛날이야기이고, 우리 인식 속의 여론은 한 사람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이를 수량화할 수 있는 ‘여론조사’다. 소위 말해 정치적 제도의 일부다.”

개념으로서의 ‘여론’을 두고, 초기엔 평가가 엇갈렸을 것 같다.

“([군중심리]를 쓴) 구스타프 르 봉은 ‘여론은 군중에 불과하다. 이들의 의견은 감정의 집합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국론이란 말도 생겼다. 즉 여론이 아니란 것이다. 그러나 여론이란 개념에 관한 찬반양론은 20세기 중반 이후 여론조사 기법이 발달하며 대체됐다. 여론조사 결과가 예측력을 갖기 시작하자 여론에 대한 개념논쟁은 끝났다. 공중(公衆)이 공식적으로 표명한 의견의 집합체가 여론이 됐다. 여기서의 여론은 ‘표명된 의견’이다.”

침묵하는 다수를 여론조사가 포착하지 못한 채, 여론인양 전파될 수 있다.

“모든 시민이 n분의 1의 목소리를 갖는 것이 부당하다는 엘리트주의자가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의견을 표명하지 않은 사람이 많음에도 억지로 끌어낸 것이 어떻게 여론이냐는 반론도 존재한다. 가령 여론조사는 문재인 대통령 지지가 50% 이상이라고 하는데 유튜브에서 문 대통령을 비판하는 영상들을 보고 ‘이게 무슨 말이냐, 조작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존재할 수 있다.

전에는 광장에서 바리케이드 앞에 모인 사람 수가 힘이었다. 누군가 선동하고, 누군가들이 모였다. 러시아혁명이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20세기엔 가만히 있어도 여론조사 업체가 전화를 걸어온다. 이때 찬성,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이 힘이다. 1인 1표제 시스템에서 모두의 의견이 (측정 시) 동일하게 취급됐다. 그런데 21세기 인터넷이 보편화한 다음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왔다.”

 

리프만의 엘리트주의 vs 듀이의 커뮤니케이션

어떻게 다른가?

“21세기의 여론은 균질하지 않다. 20세기까지 (여론조사에서의) 1인 1표제란 이상에 근거해서 모든 사람이 발언했다. 표명된 사람만이 여론이 됐기 때문에 무응답은 빼고, 계산했다. 평면적이고 2차원적인 측정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상의 어느 공간에 가면 (사회의 평균적 의견과 배치되는) 비대칭적 의견이 모여 있다.”

여론 형성의 매커니즘이 훨씬 복잡해졌다는 뜻인가?

“인터넷 여론은 양극화가 아니라 다극화에 가깝다. 다극화 중에서도 어떤 진영은 사람 숫자는 적은데 너무 똘똘 뭉쳐서 너무 강하게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연하게 이 공간에 들른 (가치중립적) 사람은 ‘난리가 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가치중립적 인간이) 휘둘리기도 한다.”

그나마 포털은 중앙통제 시스템이지만 소셜미디어나 유튜브는 아니라 소수의견의 과잉 대표라 더 제어하기 어렵다.

“인터넷 여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가시성(可視性)’이다. 누구나 볼 수 있고, 확인되기 때문에 극단적 세력일수록 가시성이 높아진다는 것이 요점이다. 20세기 여론조사 식, 1인 1표제에서 의견의 강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무리 강하게 이야기해봤자 1표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에서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보다 훨씬 강하게 의견 표명을 한다. 한 사람이 엄청 많은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사람이 만든 무언가를 다수가 하루 종일 보고 살아갈 수 있다.”

댓글도 그런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댓글을 올리는 사람과 공감을 누르는 사람은 이념과 취향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이익공동체일 수도 있다. 인터넷 여론은 훨씬 입체적이고 분화되어 있다. 적은 수의 사람도 많은 메시지를 생산하고 소비함으로써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1인 1표로 여론을 측정하는 것은 잘못됐고, 바리케이드 앞에서 크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진짜 여론이라고 주장한 학설이 있었지만 언제나 소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주장이 되살아났다고 볼 수 있다.

인터넷 세상의 바리케이드 앞에서 진을 치고, 끊임없이 메시지를 생산, 전파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런 사람들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니 다들 당황해한다. 그래서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뭔가에 휘둘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0세기 월터 리프만과 존 듀이의 논쟁은 21세기 여론 환경에 관해 말할 때도 유효한 듯하다.

“리프만은 여론 형성이 실체도, 내용도 때론 없음에도 이것이 민주주의의 의견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여론을 두고 ‘유령 공중(公衆)’이라고 했다. ‘여론’에 대한 불신에서 싱크탱크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브루킹스, 헤리티지 연구소처럼 지식인들의 정보 교류의 제도화를 주장했다.

반면 존 듀이는 조건이 잘 갖춰지면 (여론을 통해 사람들은)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로 향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무지한 ‘유령 공중’이 안 되려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사회적 전망을 담고 있다. ‘정치적 엘리트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교환하자’는 것이 리프만주의자라면 대중이 소통하고 서로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 듀이 쪽의 생각이다. 20세기 초의 이 논쟁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듀이의 생각은 포털, 위키백과, 소셜미디어가 생겨난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탁견이다. 그럼에도 이상적이다.

“(인터넷 여론 환경 역시) 누구나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은 갖춰져 있지만 (여론 형성의) 주인이 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AI가 차라리 공정하다고?

인터넷에서 여론의 왜곡, 조작의 개연성이 올라간다면 이것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기존 저널리즘일 수 있다. 그렇다면 저널리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인가?

“민주주의가 약화하면 저널리즘이 약화된다. 둘은 상보적이다. 해당 사회의 민주주의 시스템의 수준에서 언론도 만들어진다. 다만 우리나라는 저널리즘이 먼저 위기에 처했다.”

지금의 인터넷 여론 환경을 두고 민주주의에 대한 글로벌적 위기란 말도 들었다.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리프만적 생각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쪽보다는 세상이 변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19세기엔 바리케이트 앞에 몇 명이 나왔는가가 권력이었다. 20세기엔 여론조사 전화가 왔을 때 응답하는 것이 권력이었다. 21세기는 새로운 형태의 입체적 여론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이 문제라고 20세기로 되돌릴 순 없다. 모두가 떠드는 세상이 왔다.”

거스를 수 없다는 데엔 동의한다. 단 이대로 가면 여론도 화폐·주식·석유처럼 시장의 자원처럼 취급될 수 있다. 그러면 일부 작정한 세력에 의한 여론의 독점화가 우려된다.

“그렇다. 관심이, 클릭이 자원처럼 작동하고 있다. 정치적·금전적 이익을 위해 일종의 사업모형을 구축할 수 있다. 명백한 비즈니스 모델로 형성되고 있다. 확실히 그 단계다.”

드루킹 등 일련의 댓글조작 사건들은 도덕적 판단을 배제하고, 여론을 비용 대비 효용의 상품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충분히 할 만한 사업 같다.

“그렇다. 인터넷 여론이 명백하게 권력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뻔히 보이는데 거스를 수 없다고 마냥 좌시해도 되겠나?

“전통적 엘리트는 관리가 안 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슬프고 두렵다. 그러나 관리의 화신인 정치적 엘리트의 걱정과는 무관하게 세상은 이미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새로운 플랫폼이 인터넷에 들어왔다고, 이를 규제해봤자 되지도 않는다. 많은 논의를 거쳐 해봤자 또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해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롭게 고민해서 인터넷 공간에 관한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하다. 이런 디자인을 아는 사람이(페이스북을 창업한) 저커버그처럼 21세기의 엄청난 부자가 된다.”

새로운 디자인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나?

“천재적 사람. 예컨대 스티브 잡스가 앱 스토어를 만든 것처럼. 저커버그가 소셜미디어를 시스템화한 것처럼. 결국 지혜와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 해낸다.”

 

“공론장의 퇴출은 대중이 결정한다”


그렇다면 결국 다수가 참여하는 인터넷 세상도 소수가 시스템을 설계할 수밖에 없는 원리일까?

“재작년에 버클리대학에서 박사과정 학생과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다.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적들이 등장했으니, 알고리즘이 통치해야 한다고 믿는 기계주의자들이 생겼다’고 했다. 인간은 탐욕으로 인해서 (인터넷 여론을 왜곡, 오염시킬 것이니) AI의 지배가 차라리 낫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요점은 인간의 실수에 있다. 21세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인간이 미쳐서 일하면 역사적인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가령 역사에서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다. (일부가 극단화된 탓에) 반대도 듣지만 그 덕분에 조금이라도 여권이 좋아지고 있다. (소수의 천재가 디자인을 설계해도) 그 디자인이 소수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상호작용 속에 실제로 움직이는 주체는 대중일 수 있다.”


인터넷 공간의 자정작용을 믿는가?

“소수의 인터넷 선동가들, 이런 사람들이 문제인데 이들을 걸러낼 방법을 아직 못 찾고 있다. 그들을 만들어내는 것도 대중이고, 이들을 내쫓는 것도 대중이 될 수밖에 없다. 인터넷에서 권력을 주는 것도 대중, 뺏는 것도 대중이다.”

대중이 어떻게 판단하면 될까?

“대중이 (어떤 의견을) 선택하고 버린다는 사실을 알면, 관료나 언론은 대중이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상호작용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줘야 한다. 그래서 전통 언론이 음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불러내서 대결의 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관용과 불관용의 관점으로 접근하다면 불관용할 수밖에 없는 인터넷상의 혐오의견까지도 공론화의 장으로 불러내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다. 처벌할 수도 없고, 처벌해서도 안 된다. 혐오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공론장에 나와서 10분만 잘난 체하고 떠들면 얼마나 바보같이 보일까. 공론장에서의 퇴출은 대중이 결정하는 것이다.”

 

글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녹취 정리 신재현 인턴기자

 

월간중앙 더 보기

국내 최대 황금 제련소에 가다!

마일리지 소멸? 걱정 NO, 맘 편하게 항공권 예매하는 방법

전 한국경제학회장이 말하는 장기불황 한국경제의 앞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