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는 이제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어요. 원로화가 하종현 화백은 40년이 넘게 화단을 이끌어 왔지요. 84세라는 나이에도 발전과 성장을 멈추지 않는 그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들어보았어요.

 

최근 세계 화단에서 ‘단색화’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모노크롬 회화의 일종’이 아니라, 그냥 ‘단색화(Dansaekhwa)’인 것이다. 단색화를 앞장서 이끌어가는 일군의 작가군 사이에 하종현(84)이라는 이름이 있다. 1960년대 추상회화를 시작해 여러 가지 실험적 작업을 해오다 1974년부터 현재의 스타일을 굳혀온 화단의 원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고여 있지 않고 꿈틀댄다. 부산의 복합문화공간 F1963 안에 지난해 문을 연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시작된 ‘Ha Chong-Hyun’(5월 29일~7월 28일)전은 그의 변신을 느껴볼 수 있는 자리다.

 

 

하종현 화백은 경남 산청 출신이다. 1935년생인 그는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와 먹고살기 위해 숱한 고생을 겪었노라고 말문을 열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고 2015년 국제갤러리에서 대형 개인전이 이어졌지만, 부산에서 여는 첫 개인전은 어릴 적 그 해 6월의 생각이 떠올라 더 감개무량한 듯했다. “용케 살아남았죠. 새벽에 자갈치 시장에 가서 온갖 허드렛일 하고, 외사촌이 있는 동래온천장에서도 일하고…. 고통이 나를 키웠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홍익대 미대에 진학했지만, 가난은 그를 꼭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물감 구하기도 어렵고, 캔버스 사기도 힘들고,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런 내가 남들을 이길 수 있나, 다른 사람의 인생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하나, 그럼 어디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나 등등. 그래서 그냥 다 버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데생부터 다. 그러고는 제게 끝없이 질문을 던졌죠. ‘회화가 뭐냐’라는.”

1962년부터 68년까지는 즉흥적인 추상예술 경향인 앵포르멜 스타일에 몰두했다. 이후에는 전위적 미술가 그룹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하고 석고·신문지·각목·로프·나무상자 등을 미술에 접목하려 했다. 밀가루·신문· 용수철·철조망 등 비미술적이고 비전통적 매체도 고민의 대상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그가 꽂힌 것은 전쟁 이후 미군 군량미를 담아 보내던 마대였다. 성긴 마대의 앞뒷면을 모두 활용해보자는 파격적인 아이디어가 결합하며 자신만의 스타일로 굳어진 ‘접합(Conjunction)’ 시리즈가 시작된 것이 1974년이었다.

방법은 이렇다. 올이 굵은 마포의 뒷면에 물감을 두껍게 바른다. 그리고 물감을 죽 밀어내면 앞쪽으로 걸쭉한 물감액이 배어 나온다. 이름하여 배압법(背押法)이다. 이것을 다시 나이프나 붓, 나무 주걱을 이용해 문대면 의도하지 않은, 혹은 의도치 못한 색이 만들어진다.

“올의 굵기가 다 다르고 또 힘을 주는 세기에 따라 물감이 아주 자유로운 형태로 나와요. 생김새가 다 달라. 도자기 만들 때 열을 가하는 것에 따라 도공이 미처 알지 못한 모양이 나오듯, 색깔도 어떤 놈이 나올지 모르죠. 엉뚱한 색이 나올 수 있고. 그런 것을 억제하면 재미가 없어져. 우리 사는 것도 마찬가지죠. 똑같은 얼굴 있나요. 그냥 나오는 대로, 생긴 대로 살아가는 거죠.”

그 우연성을 배가해주는 기법이 ‘그을림(smoke)’이다. 2015년 국제갤러리 전시부터 선보였다. 횃불처럼 나무 막대기에 천을 두르고 휘발유를 부은 다음 불을 붙이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이 연기를 캔버스 앞면에 밀려나온 물감이 마르기 전에 씌우는 방식이다. 일종의 ‘훈제’다.

 

작가는 “그을린 물감을 앞쪽에서 펴 바르거나 밀어내면 예상하지 못한 묘한 색채가 나타나는데, 시간의 깊이를 압축해 담아내는 과정에서 불의 힘을 빌렸다”라고 설명한다. 자연이 주는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그가 구현해온 작품의 색은 ‘단색화’ 즉 ‘모노톤’이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우리 문화를 색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말한다. 작가의 용어에 따르면 ‘된장 같은 색’, ‘한지 같은 색’, ‘백자 같은 색’이다. 전문용어로는 무채색이다. 하 화백은 자신의 그림을 사 간 고객들이 “당신의 그림은 (현대 작품이지만) 기와집에 걸어놓아도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줘서 보람 있고 자랑스러웠다고 털어놓았다.


제작 과정서 나타나는 우연성 활용

 

'Conjuction 15-312'(2015), Oil on hemp cloth, 130×162㎝

 

그런 그가 얼마 전부터 색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색을 안 쓴 건 아닌데, 너무 제한된 색만 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10년쯤부터 이제 색을 좀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갔을 때 ‘넌 그동안 색도 안 쓰고 뭐했냐. 그림 더 그리고 와라’ 할 것 같아서요. 하하. 그렇다고 아무 색이나 쓸 수 있나요.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색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나만의 색깔을 만들고 있는 중이죠.”

이번 부산 전시는 그의 새로운 고민이 담긴 ‘색깔’을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자리다. 모두 15점이 나왔다. 전시장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화사한 다홍, 묵직한 군청색 작품이었다.

“다홍 작품은 단청과 한국 전통악기의 화려한 문양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하셨다고 합니다. 군청색은 고색창연한 기왓장의 느낌을 담았고요. 기왓장은 회색도 아니고 까만색도 아니고 파란색도 아니고 모두 섞인 오묘한 느낌을 주지 않나요. 이게 투톤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하나의 색입니다. 한 가지 색을 두 가지 색처럼 보이게 하는 게 선생님 작품의 맛이죠. 특히 오일이 어디까지 번지는가도 선생님의 관심사인데, 그런 액시던트가 일어나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하십니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션을 맡은 박희진 학예사의 설명을 다시 하 작가가 이어갔다. “70년대는 보통 위에서 아래로 밀어내려가며 작품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90년대 이후로는 아래서 위로 올려가며 만들고 있어요. 중력에 거스른다고나 할까. 화면 뒤에서의 저항력이나 밸런스 및 텐션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저는 70년대와 80년대 작품도 여럿 갖고 있는데, 구작에서 받는 영감도 많아요.”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정력적으로 일한다.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5시까지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보낸다. 화가였지만 그보다 작가를 내조하는 데 치중해온 부인 박미자 여사는 “마대에 문대는 주걱도 직접 만들 정도”라고 귀띔한다.


단색화 열풍의 선두주자… 세계가 그를 부른다

 

'하종현'전이 열리고 있는 국제갤러리 부산점 전시장 모습.

 

 

하지만 같은 일을 오래 하면 지루해지지 않을까. 아무리 조금씩 바꾼다고 해도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작가의 대답은 단호했다. “똑같은 작업은 없다. 그게 예술가의 길이다. 작가는 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살면서 같은 나물과 같은 밥을 먹지만 생각은 각자 다릅니다. 이렇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을 작품으로 만듭니다. 세계는 왜 단색화에 주목하는 걸까요. 분명한 답이 없을 때, 우리는 각자 자기 몫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고 그 생각만 계속한 것이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돌려놓고 보니 이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모노크롬이 아니라 단색화입니다. 이 시대 이 사람들이 개척한 것이죠.”

국제갤러리 이현숙 회장은 “선생님 작품이 최근 해외 아트페어에서 아름답다고 평가받고 있어 보람 있고 자랑스럽다”라며 “서울시립미술관장을 지낸 선생님이 후학들을 위해 만든 하종현 미술상도 우리 화단에 커다란 나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자 하 작가는 “이 회장이 뒷바라지를 너무 잘 해주셔서 지금 여한이 너무 많다. 내가 갚아야 할 일이 너무 많고, 오래 살아야 할 의무가 생겼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최근 LA, 파리, 런던, 뉴욕, 도쿄 등 해외 활동에 주력해온 하 작가는 올해가 어느 때보다 바쁘다. 6월 21일부터 미국 미시간주 크랜브룩 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의 단색화를 알리는 그룹전에 참가하고, 7월에는 중국 베이징 송 현대미술관 그룹전이 기다리고 있다.

 

또 9월 밀라노 카디 갤러리에서, 2020년 2월에는 런던 알민레쉬 갤러리에서 각각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심장이 여전히 뜨거운 작가로서는 노익장을 과시할 절호의 찬스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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