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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빛을 잃어가는 홍콩, 중국과 현 상황은?

현재 홍콩은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는 지역이에요. 송환법이라고 불리는 범죄인 인도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지요. 반중감정이 점점 커져가는 많은 홍콩인들은 해외 이주와 이민을 생각하고 있다고 해요.

 

 

"송환법 반대 시위를 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 송환법의 철회와 시위자 석방 그리고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를 촉구한다. 나의 목숨으로 200만 홍콩 시민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끝까지 싸우자.” 올해 6월 29일 홍콩에서 홍콩교육대학 2학년 뤄샤오옌(22·여)이 범죄인 인도법(일명 송환법) 개정에 반대하며 거주하던 아파트 24층에서 투신자살하면서 벽면에 남긴 유서 내용이다.

홍콩에서 송환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된 가운데 청년들의 자살이 잇따랐다. 홍콩 언론에 따르면 최소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이 자살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들의 자살 이유는 2016년 홍콩판 아카데미 영화상이라고 불리는 금상장(金像奬)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으로 선정됐던 독립 영화 [10년(十年)]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중국의 통제가 강화된 ‘2025년의 홍콩’을 묘사한 다섯 개의 단편으로 이뤄진 옴니버스 작품이다. 흑사회(폭력조직)를 정치에 개입시켜 홍콩에 국가안전법 도입을 도모하는 중국의 고위 관리, 보통화(普通話, 중국 표준어) 사용 의무화로 고초를 겪는 홍콩의 택시기사, 홍콩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돼 단식투쟁하다 숨지는 청년운동가, 중국식 교육을 받아 홍위병처럼 어른들을 감시하는 홍콩 어린이 등을 소재로 다뤘다.

 

50만 홍콩달러(약 7000만 원)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많은 홍콩 시민들이 관람해 600만 홍콩달러(약 8억4000만 원)의 흥행실적까지 올렸다. 홍콩 시민들이 이 영화에 공감했던 것은 홍콩의 정체성이 갈수록 사라지면서 느끼는 절망감과 중국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홍콩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는 송환법 개정 반대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 정부가 강압적으로 추진해온 ‘홍콩의 중국화 정책’에 대한 홍콩 시민들의 불만이 자리 잡고 있다. 홍콩 정부의 수장인 캐리 람 행정 장관은 올해 3월 29일 송환법 개정안을 마련해 입법회에 상정했다.

 

명분은 지난해 대만에서 여자 친구를 살해한 뒤 홍콩으로 도주한 20대 홍콩 청년을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지 않은 대만으로 송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영국법의 속지주의를 따르고 있는 홍콩은 타국에서 발생한 죄를 처벌하지 않는다. 또한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 범죄자를 인도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람 장관은 중국을 포함해 대만, 마카오 등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사안별로 범죄인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송환법 개정을 주장했다. 중국의 꼭두각시라는 말을 들어온 람 장관이 송환법을 개정하려는 것은 중국 정부가 홍콩의 독립적인 사법체계를 무너뜨리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시진핑 취임 이후 일국양제 흔들

 

홍콩 시민들은 송환법 개정에 반대하면서 6월 9일과 16일 무려 100만여 명과 200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대규모 행진과 시위를 벌였다.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데 이 법을 악용할 수 있다며 개정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었다. 홍콩의 민주주의와 법치를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람 장관은 송환법 개정을 무기 연기한다고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 시민들은 7월 1일과 7일, 55만여 명과 23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송환법 완전 철회와 람 장관 사퇴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이어갔다. 7월 1일은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날이다. 그런데 일부 시위대가 이날 홍콩의 의회인 입법회 건물(의사당)을 점거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들은 유리 출입문을 부수고 의사당으로 들어가 내부 시설물을 파괴하고, 의사당 중앙에 걸린 홍콩 특별행정구(홍콩 정부) 상징물에 검은 스프레이를 뿌린 뒤 연단에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 국기를 내걸었다.

 

이날 벌어진 입법회 점거 시위는 중국의 통치에 대한 사실상의 전면 도전이었다. 1000여 명으로 추정되는 시위대는 대부분 10대 중반에서 20대의 청년들이었다. 람 장관이 이미 송환법 개정 무기 연기를 밝히면서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지만 이들은 오히려 더욱 분노했고 결국 입법회 점거라는 과격 시위를 벌였다. 결국 람 장관은 7월 9일 기자회견을 통해 송환법 철회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역대 행정장관 모두 中 낙점한 친중파

 

이들이 분노한 것은 덩샤오핑이 약속한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시진핑 국가주석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청나라가 제1차 아편전쟁(1840~1842년)에서 패배해 난징 조약을 맺고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 것을 치욕의 역사라고 생각해왔다. 때문에 덩샤오핑은 홍콩을 되찾기 위해 1982년 9월부터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끈질기게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대처 총리는 홍콩에 구축해 놓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가 붕괴될 것을 우려해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하기를 꺼렸다. 이를 간파한 덩은 홍콩에 이른바 ‘일국양제’라는 세계 역사상 초유의 제도를 50년간 보장한다고 밝혔다. 일국양제는 하나의 국가에 2개 체제, 다시 말해 국가는 사회주의 체제의 중국이지만 홍콩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따른 각종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덩은 또 홍콩은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들이 통치한다는 ‘항인치항(港人治港)’과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고도자치(高度自治)’도 약속했다. 양국은 1984년 12월 19일 홍콩 주권 반환 협정(영·중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홍콩의 주권은 1997년 7월 1일 영국에서 중국으로 이양됐고, 중국은 홍콩특별행정구를 설치했다. 대처는 훗날 덩의 일국양제 구상은 천재적 발상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홍콩의 주권을 반환받은 초창기, 중국은 홍콩 정부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했다. 영국과 캐나다 등으로 이민 갔던 홍콩인들이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는 등 주권반환 10주년이었던 2007년만 해도 일국양제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 취임 이후 중국 정부는 홍콩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시 주석은 홍콩을 중국으로 완전히 귀속하려고 2014년 6월 10일 ‘홍콩특별행정구의 일국양제 실천’이란 제목의 백서를 발표하면서 덩의 약속을 깨고 새로운 일국양제 원칙을 제시했다. 이 백서에는 “홍콩의 관할권은 중앙(중국) 정부가 전면적으로 보유한다. 일국양제의 ‘양제’와 ‘일국’을 동등한 가치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양제’는 ‘일국’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갔다. 특히 시 주석은 “양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병행할 수 있다는 경제체제의 원칙을 가리킨 것일 뿐, 정치체제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체제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백서는 또 “홍콩 정부의 고도자치의 유일한 원천은 중앙(중국)이 부여한 것”이라면서 “중앙이 권력을 부여한 만큼만 자치권을 부여한다”고 규정했다. 다시 말해 홍콩 정부의 고도자치는 중국 정부가 부여한 권력 내에서라는 것이다. 백서는 이와 함께 “애국인사가 홍콩을 통치한다”고 천명했다.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의 범위를 축소시켜서 애국인사인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라는 구체적인 범위를 정한 것이다. 애국인사는 친중파를 말한다. 백서는 “법관 등도 애국인사로 임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시 주석의 의도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체제를 홍콩에 도입해 ‘홍콩의 중국화’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홍콩의 민주주의 체제를 2047년까지 그대로 유지시킬 경우 대만과의 통일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티베트와 위구르 등 소수민족들의 독립과 자치권 요구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티베트의 정신적인 지도자 달라이 라마 14세는 그동안 홍콩처럼 티베트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해 줄 것을 촉구해왔다. 신장 위구르 지역에선 동투르크이슬람 운동(ETIM) 등 과격 세력들이 무장 투쟁을 통해 분리 독립운동을 벌여왔다. 게다가 시 주석은 홍콩의 민주주의 체제에 영향을 받은 중국의 민주화 세력이 서구식 민주주의 개혁을 요구할 경우 자칫하면 공산당의 일당 독재체제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해왔다.

이에 반발한 홍콩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2014년 9월 28일부터 79일간 행정장관 직선제 도입 약속을 지키라며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우산 혁명’이었다. 이들은 도심을 점거한 채 시위를 벌였지만, 중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홍콩 정부는 이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당시 시위는 같은 해 8월 31일 중국의 의회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발표한 2017년 홍콩 정부의 수장인 행정장관 선거안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중국과 영국은 반환협정에서 2017년 홍콩 시민들의 직접 선거로 행정장관을 선출하기로 합의했었다. 하지만 전인대는 행정장관 선거 입후보자는 반드시 선거위원회의 과반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결정해 직접선거를 봉쇄했다. 선거위원 1200명은 대부분 친중파 인사들이다.

 

전인대의 이런 결정은 시 주석의 ‘신일국양제’에 따라 홍콩에 대한 중국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의도였다. 결국 행정장관 직선제 약속을 지키라며 벌였던 민주화 시위는 실패했고, 행정장관이 중국 정부의 입맛에 맞는 인사가 될 수밖에 없게 됐다. 실제로 초대 둥젠화부터 현재 람까지 홍콩특별행정구의 역대 행정장관은 예외 없이 간접선거로 선출된 친중파 인사들이다.

이후 중국 정부는 또 각종 정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입법부와 사법부, 언론에 대한 통제도 강화해왔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2015년 말 홍콩에서 중국 권력층을 비판하는 책을 출판·판매하던 서점상 5명을 중국 본토 등으로 강제 연행한 사건을 들 수 있다. 홍콩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중국에 찍히면 하루아침에 본토로 끌려갈 수 있다는 충격적인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전인대는 또 헌법격인 홍콩 기본법에 대한 해석을 통해 홍콩 독립을 지지하는 인사들의 공직 임용을 원천 불허하는 규정을 채택하기도 했다. 중국의 입장은 전인대가 홍콩기본법에 대한 해석권을 갖는 것은 홍콩의 사법주권 침해가 아니라 중국의 사회주의체제에선 당연한 절차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홍콩의 의회격인 입법회는 친독립파 의원 2명의 자격을 박탈했다. 우산 혁명을 이끌었던 지도부는 공공소란죄 등으로 징역형이 선고됐고, 독립을 주장했던 홍콩민족당은 강제로 해산됐다.

 

이처럼 홍콩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대폭 후퇴하면서 홍콩 시민들의 반중 정서는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어렸을 적부터 서구식 교육을 받아온 홍콩의 젊은 층은 중국 정부의 통제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 왔다. 이들이 시 주석의 신일국양제에 ‘결사항전’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주권 반환 이후 경제적 종속 가속화

 

경제적 불평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젊은 층의 분노와 좌절을 더욱 골 깊게 만들었다. 1997년 영국이 홍콩의 주권을 반환할 당시 중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홍콩의 GDP는 18.4%였다. 하지만 홍콩 경제는 현재 중국 경제에 완전히 역전됐다. 1997년 당시 홍콩 증시에서 시가총액 기준으로 20%를 밑돌던 중국 기업들의 비중은 현재 60%에 달한다. 중국 기업들은 이미 홍콩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금융·부동산 등의 분야는 중국 기업에 완전히 장악됐다. 글로벌 금융 중심지인 홍콩 경제가 앞으로 중국에 더욱 종속될 것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특히 홍콩 전체 인구 중 빈곤층의 비율은 20.1%에 달한다. 빈곤층은 월평균 소득이 세전 가구 소득 중간 값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해당한다. 소득분배 정도를 보여주는 지니계수는 0.5를 넘어섰다. 지니계수가 0.5 이상이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중국의 GDP 대비 홍콩의 GDP는 현재 3% 미만으로 쪼그라들었다.


中, 인민해방군 투입 등 강력 대응 시사

 

홍콩의 중국화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1997년 이후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중국인들은 100만여 명에 달한다. 홍콩 전체 인구에서 중국인의 비중이 14%나 된다. 또 홍콩과 중국 본토를 연결하는 광선강(廣深港) 고속철이 지난해 개통되면서 중국인들이 대거 홍콩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 때문에 홍콩 주민들이 사용하는 광둥어 대신 중국 표준어인 만다린어가 통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홍콩으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대부분 홍콩 상류층을 장악하고 있다. 홍콩 청년층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홍콩의 인구 밀도는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 면적은 1100㎢에 불과한데 전체 인구는 740만여 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홍콩에는 19㎡(5.8평) 이하의 성냥갑 같은 초소형 아파트들이 많다. 이런 아파트를 1억분의 1이라는 뜻으로 ‘나노 아파트’라고도 부른다.

 

나노 아파트는 크기에 비해 상당히 비싸다. 19.4㎡의 아파트가 지역에 따라 786만 홍콩달러(11억 원)에서 299만 홍콩달러(4억 원)까지 거래된다. 홍콩의 젊은 층은 이런 나노 아파트를 사는 것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결국 홍콩의 암울한 미래에 분노한 일부 젊은 층은 송환법 반대 시위를 계기로 입법회 건물을 점거하는 과격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아예 중국에서 홍콩을 분리·독립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시 주석과 중국 정부는 홍콩의 시위 사태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홍콩 정부가 입법회 건물 점거를 빌미로 대거 시위대 검거에 나선 것도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시에 따른 것이다. 중국 국무원 홍콩·마카오 특별행정구 연락 판공실은 담화를 통해 “입법회 건물에서 발생한 폭력 사건에 경악하고 분노한다”면서 “홍콩 특별행정구가 심각한 위법행위를 끝까지 추적해 처벌하는 것을 굳게 지지한다”고 밝혔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홍콩 시위대가 입법회 건물을 폭력적으로 점거하고, 시설을 파손한 행위는 법치를 침범하고, 사회질서를 훼손하는 심각한 위반 행위”라면서 “중국 정부는 홍콩 정부와 경찰이 법에 따라 이번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결연히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정부는 여차하면 홍콩 시위 사태에 무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도 경고하고 있다.

홍콩에 주둔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육·해·공 3군은 올 6월 26일 연합순찰훈련을 실시했었다. 그런데 중국 인민해방군 기관지인 [해방군보]는 일주일이나 지난 후인 7월 2일 이런 훈련 내용을 공개했다. 해군군보에 게재된 사진들을 보면 인민해방군이 대규모 시위 사태가 벌어진 홍콩 섬을 향해 총을 겨누는 모습도 들어있었다. 말 그대로 일종의 무력시위라고 볼 수 있다.

서방의 중국 전문가들은 “홍콩 시민사회에 무력 사용 가능성을 노골적으로 경고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홍콩에 주둔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병력은 6000여 명이다. 홍콩 기본법 제18조에 따르면 중국은 전쟁이나 홍콩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한 경우 홍콩에 중국 법을 적용해 인민해방군을 투입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이미 한 달여 전부터 특별대응팀을 홍콩 인근 선전에 파견해 홍콩의 대규모 시위 사태를 감시해왔다. 홍콩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남부전구가 관할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홍콩 시위 사태와 관련해 가장 강력하게 경계한 것은 ‘외세의 개입’이다. 겅 외교부 대변인은 “홍콩은 중국의 특별행정구역이고, 홍콩의 사안은 중국의 내정”이라면서 “홍콩 내정에 대한 외세 간섭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성명을 여러 차례 내놓았다. 외세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홍콩의 가치는 아직까지 엄청나다. 홍콩의 지난해 GDP는 3630억 달러(약 428조 원)로 싱가포르(3611억 달러), 말레이시아(3543억 달러), 필리핀(3308억 달러)보다 많다. 세계적인 글로벌 금융도시인 홍콩은 중국 경제에 자금을 공급하는 루트다. 홍콩은 광저우, 선전을 연결하는 주장 삼각주의 중심 지역이다. 주장 삼각주는 중국 제조업의 심장이다.

홍콩의 정치·안보 및 지정학적 가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중국 정부가 영국 정부의 일국양제 준수 요구에 강력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영국 정부가 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홍콩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와 관련해 “나는 그들 대부분은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불행히도 일부 정부는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다”며 홍콩 정부의 배후에 있는 중국 정부를 겨냥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홍콩 시위 사태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규정한 것은 중국의 체제 문제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제2의 ‘홍콩 엑소더스’ 현실화될 수도

 

하지만 시 주석으로선 ‘제2의 톈안먼 사태’를 감수하더라도 홍콩 시위 사태를 묵인할 수 없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홍콩 시위 사태가 중국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시 주석 권위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시 주석은 7년간 중국의 지도자로서 대륙 전역에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를 구축해왔지만, 정작 본토 밖의 사건과 관련된 권력은 여전히 한계가 있음이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시 주석은 또 올해 건군 70주년을 맞아 중국몽을 실현시키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선포할 계획인 만큼 홍콩 시위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통제할 필요가 있다. 영국 [가디언]이 “홍콩의 위기가 심화한다면 무엇보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중국의 지도자들이 30년 전 톈안먼 광장에서 발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폭력에 의존할 수도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시위사태로 중국 정부와 홍콩 시민들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더 이상 홍콩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홍콩 시민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자칫하면 ‘제2의 엑소더스’(대탈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지난해 이민을 떠난 홍콩인은 2만4300명으로 2012년 이후 가장 많았으며 2016년 6100명에 비해 4배나 늘었다.

 

1997년 홍콩의 주권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기 직전까지 홍콩 주민들 중 30만여 명이 캐나다·호주·미국 등으로 ‘엑소더스’했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홍콩 시민들이 고향을 떠났던 이유는 중국 정부가 일국양제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홍콩 시민들은 이제는 시 주석의 신일국양제 때문에 아예 중국인으로 살아야만 한다. 때문에 홍콩의 젊은 층 중 상당수는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홍콩 중문대학이 18~30세까지의 홍콩 주민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51%가 기회가 되면 해외 이주를 희망한다고 밝혔고, 13%는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 중국의 간섭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약화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생활수준과 삶의 질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홍콩 젊은이들이 홍콩을 탈출하려는 것이다.

 

폴 입 홍콩대 교수는 “홍콩 반환 이전 이민 간 사람들은 중국에 반환된 이후의 불확실성 때문에 이민을 선택했지만, 지금 이민을 가는 사람들은 중국 정부의 영향력 확대와 경제 악화 등의 확실성 때문에 홍콩을 떠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제2의 엑소더스가 벌어질 경우 홍콩이 중국의 일개 도시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 주석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앞으로 홍콩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할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2047년이면 홍콩은 중국에 완전히 귀속되기 때문에 ‘둥방밍주’(東方明珠, 동양의 진주)라고 불리던 홍콩은 앞으로 갈수록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빛을 잃을 듯하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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