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에 있는 SK서린빌딩으로 출근하는 직원들은 자신의 자리가 없어요. 그날그날 원하는 자리에 앉아 일할 수 있지요. 하나의 공유 오피스 체제가 되어버린 SK서린 빌딩은 혁신을 꿈꾸는 최태원 회장의 바람이 담겨있는 공간이에요.
조선 태조가 한양 천도에 나선 1394년 이래, 종로는 오늘에 이르도록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계획된 거리로 그 명성을 잇고 있다. 하지만 오래도록 상업과 물류, 문화의 중심지 노릇을 톡톡히 했던 종로의 위상은 예전만 못하다. 강남권 부흥과 더불어 쇠락의 길에 놓인 구도심 신세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다만 근래 들어 해묵은 종로의 풍광에도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낡고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새로 들어선 고층빌딩들이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고, 도심지 재개발도 활발히 이뤄지면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특유의 멋스러움을 다시 찾고 있다. 뒷골목에서 풍기던 쾨쾨하고 끈적한 기운은 이제 더는 종로의 풍경이 아니다.
종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는 SK서린빌딩은 인근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다. 지난 1999년 완공한 이 빌딩은 20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SK그룹의 지주사인 ㈜SK를 비롯해 SK이노베이션, SK에너지,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소속 임직원들이 종로 서린사옥에서 일하고 있다.
SK서린사옥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요즘의 종로를 상징적으로 압축해놓은 곳이기도 하다. SK그룹은 대대적인 사옥 리노베이션을 단행해 지난 4월 1일부터 완전한 공유 오피스 체제로 전환했다.
회사와 조직 구분 없는 자율 좌석
정준영 SK이노베이션 과장의 출근길은 사내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체크인이 시작이다. 사내 앱 ‘온스페이스’에 접속해 그날 일할 자리를 선택하는 작업이다. 출근 30분 전부터 좌석을 정한 후 사원증을 출입구에 대는 순간, 해당 좌석의 전자명패에 예약자 이름이 자동으로 뜬다.
지정석이 사라지면서 개인 짐을 최대한 줄이는 일이 숙제로 떠올랐다. 층별로 사물함을 넉넉히 확보한 이유다. 공유 오피스로 바뀐 이후 서린사옥에서 근무하는 SK 임직원들은 책이나 서류, 노트북 등 웬만한 개인 물품을 지정석 대신 사물함에 보관한다.
SK의 오피스 리노베이션은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기 위해 단행됐다. 최태원 SK 회장은 이미 지난해 신년사에서 “근무시간의 80% 이상을 칸막이에서 혼자 일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변화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최 회장의 결단으로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된 리노베이션이 공유 오피스 형태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실제로 SK이노베이션, SK에너지,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소속 임직원들은 사옥 14~19층에서 소속 회사나 부서 간 구분 없이 자율 좌석제를 시행하고 있다. 나와 전혀 다른 업무를 하는 회사나 조직원과 한 공간에서 근무함으로써 소통 기회를 넓히자는 의도다. 틀에 박힌 공간에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는 직원들의 의견도 공유 오피스 설계에 반영됐다.
SK는 단순히 공간을 함께 쓰는 개념에서 벗어나 국내 대기업에선 보기 드문 혁신 오피스를 실현했다. 공유 오피스는 크게 근무 공간인 워킹존(working zone)과 복지와 휴식·건강관리 등을 위한 공용 공간인 퍼블 릭존(public zone)으로 나뉜다. 워킹존은 다시 개별 근무 공간인 포커스존과 전체 입주사의 공유·협업 공간인 라운지로 구분된다.
모니터와 책걸상 등이 놓인 포커스존은 통상적인 사무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세심한 공간 활용이 돋보인다. 밖에서 들여다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파티션으로 둘러싼 독립 구역이 있는가 하면,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넓은 책상도 있다. 창밖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엔 서서 일할 수 있도록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모션데스크가 설치돼 있다. 업무 특성에 따라 싱글 모니터, 듀얼 모니터를 선택할 수 있고, 곳곳에 설치한 폰룸에서는 통화나 간단한 미팅이 이뤄진다.
포커스존의 하이라이트는 개방형 공간인 라운지다. 사무실이라기보다 트렌디한 카페에 가깝다. 이곳에도 공유형 데스크를 비롯해 카페형 의자, 푹신한 소파 등이 마련돼 있어 자유로운 업무와 미팅이 가능하다. 포커스존 각 층에는 요기하고 휴식할 수 있게 시리얼과 우유뿐 아니라 토스트기, 커피머신 같은 식음료 시설도 배치돼 있다. 라운지 곳곳에서 스탠딩 미팅을 하는 임직원들의 모습은 웬만한 혁신 스타트업에 견줘도 어색하지 않다.
독서와 VR 게임에 맥주 한잔까지
20~22층에 마련한 퍼블릭존은 입주사의 조직, 회사 간 교류와 소통, 협업의 효율을 높이고 임직원들의 복지와 건강관리를 위한 공용 공간이다. 층별로 각각 ‘사색과 힐링’, ‘교류와 소통’, ‘건강과 재충전’이라는 테마로 꾸몄다. 20층에 들어서면 탁 트인 개방형 도서관이 시야를 극대화한다. 편안함을 주는 다양한 공간에서 독서와 사색을 즐길 수 있다.
21층과 연결된 ‘사색의 계단’은 두 층을 연결한 거대한 계단식 구조물로, 미디어월에서 나오는 영상을 감상하거나 독서를 하며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개방형 서재 ‘아울림(Owl林)’은 잠시 업무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히거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다. ‘마루’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다도를 즐기거나 체스 같은 보드게임을 할 수 있다.
마치 야외를 연상케 하는 ‘View point’는 환하게 트인 창밖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는 사색 장소다. ‘울림’에는 올드팝, 클래식, 가요 등 다양한 레코드판(LP)과 턴테이블이 마련돼 있어 음악을 감상하며 힐링할 수 있다.
21층은 가상현실(VR) 게임, 요리, 보드게임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도록 구성됐다. 직원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길 수 있는 파티룸에는 완벽한 파티를 위한 블루투스 스피커, 마이크와 파티용 소품이 구비되어 있다. 편안한 가정집 주방 콘셉트로 꾸민 다이닝키친에선 동료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다양한 모임을 진행할 수 있다.
무더운 여름을 나는 임직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생맥주 디스펜서가 마련된 ‘Free beer Corner’와 카페다. 냉장고에 비치된 차가운 맥주잔을 디스펜서 위에 올려놓으면 고급 생맥주가 자동으로 채워진다. 실제로 점심시간에 맥주 한잔으로 재충전에 나선 직원들의 모습을 보는 일이 어렵지 않다. 22층에 마련된 대형 피트니스센터에선 전문적인 단체운동(GX)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북악산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36층 옥상에는 정원을 마련하여 자연 속 휴식을 맛볼 수 있다.
카페에서 만난 한 직원은 “아이가 있는 직원들은 주말에도 회사를 찾아 자녀들과 함께 게임과 독서를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며 달라진 사내 문화를 자랑했다.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사진 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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