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남만·서융·북적은 오랑캐를 뜻하는 중국어예요. 중국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고들 하지요. 하지만 만리장성은 다름의 충돌을 조절한 경계였지, 불통의 장벽이 아니었다고 해요. 그리고 이러한 만리장성에는 대립하며 함께 발전한 동북아 역사 코드 담겨있어요.
한자·유교 문명권에서는 온 세상을 ‘천하’로 봤다. 우리 조상들도 천여 년 동안 ‘천하’를 의식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백여 년 전에 천하가 무너져 버렸다. 굴기하는 중국도, 한국을 비롯한 주변 나라들도, 대립보다 협력을 위주로 하던 역사 속의 ‘천하’를 되찾기 바라는 마음으로 ‘오랑캐의 역사’를 쓴다. 강대하지 않은 존재라도 자기 자리와 자기 역할을 가지던 천하가 회복되고 확장돼 인류가 더 큰 평화를 누리기 바라는 마음이다. 이번 연재 ‘오랑캐의 역사’를 쓰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 바란다. ‘중화(中華)’와 ‘외이(外夷)’를 대립관계가 아닌, 같은 문명권 안의 상호보완적 관계로 볼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융적만이(戎狄蠻夷)의 역사’를 바라보기 위한 첫 관문은 국경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동북아의 어느 시대에나 천하는 중화와 외이(外夷)로 구분되고 양자 간의 관계는 대립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를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본다면 종래 시각의 틀로 포착할 수 없었던 의미를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5방(方) 사람들, 즉 중원과 4방 오랑캐는 모두 자기 특성이 있어서 억지로 바꾸지 못한다. 동방 사람은 이(夷)라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신을 한다. 음식을 날로 먹기도 한다. 남방 사람은 만(蠻)이라 하는데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발이 엇갈리게 한다. 음식을 날로 먹기도 한다. 서방 사람은 융(戎)이라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문신을 한다. 곡식을 먹지 않기도 한다. 북방 사람은 적(狄)이라 하는데 깃털과 털로 옷을 해 입고 굴속에서 산다. 곡식을 먹지 않기도 한다. 중원과 이·만·융·적, 모두 자기네 거처와 음식·의복·도구·기물이 있으며 5방 사람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中國戎夷, 五方之民, 皆有性也, 不可推移. 東方曰夷, 被髮文皮, 有不火食者矣. 南方曰蠻, 雕题交趾, 有不火食者矣. 西方曰戎被髮衣皮, 有不粒食者矣. 北方曰狄, 衣羽毛穴居, 有不粒食者矣. 中国, 夷, 蠻, 戎, 狄, 皆有安居, 和味, 宜服, 利用, 備器, 五方之民, 言语不通, 嗜欲不同.)”
[예기(禮記)] ‘왕제(王制)’ 편의 이 구절이 오랑캐를 중국으로부터의 방위에 따라 동이(東夷)·남만(南蠻)·서융(西戎)·북적(北狄)으로 구분한 근거 문헌이다.
연재 제목에 ‘오랑캐’란 말을 썼는데, 이 말을 제한된 가치 중립적인 의미로 쓴다는 사실부터 밝힌다. “이민족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보통 쓰이지만, 여기서는 夷·蠻·戎·狄 네 글자의 공통된 훈(訓)으로서 ‘오랑캐’, 중화(中華)와 구분되는 주변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우리 민족도 당연히 오랑캐의 하나다.
엄밀한 분류학적 근거에 따라 네 방향 오랑캐를 서로 다른 글자로 표시한 것 같지는 않다. 서로 다른 방향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질 것이라는 오행설(五行說)의 관념에 따른 규범적 호칭일 뿐이다. 우리에게 얻어걸린 글자 ‘이(夷)’에 벌레나 짐승 대신 활이 들어 있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 큰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겠다. (근년의 갑골문 연구에서 ‘夷’ 자가 방석 위에 꿇어앉은 사람 모습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진나라 통일 이후 ‘안과 밖’, 중국과 오랑캐 경계가 뚜렷해져
역사 초기의 화이(華夷) 관념을 보면 중국 본토의 황해 연안이 동이 지역, 장강 이남이 남만 지역이다. ‘화하(華夏)’, 즉 중화의 영역은 지금의 허난(河南)성 범위를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이 개념은 춘추시대 전까지 유효했다. 당시의 동이는 하·상·주(夏商周) 왕조체제에 편입되지 않은 동쪽의 여러 부족을 가리켰다.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며 중국 동해안이 모두 화하에 편입되자 비로소 바다 건너 한반도에 사는 사람을 동이로 부르게 됐다. 마찬가지로 장강 유역의 초(楚)나라, 오(吳)나라, 월(越)나라가 춘추시대에 중원으로 들어오자 남만의 영역은 더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후세의 외이(外夷, 夷·蠻·戎·狄을 총칭하는 말)에 관한 논설 중에는 화하와 외이의 차이가 아주 큰 것처럼, 마치 외이는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인 것처럼 본 것이 많다. 청(淸)나라의 입관(入關)으로 만주족(滿洲族)의 천하가 되었을 때 정복자를 미워하는 한족(漢族) 민족주의 논설에서 그런 경향이 극에 이르렀다.
옹정제(雍正帝, 1722~1735 재위)는 이런 풍조를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으로 반박했는데, 화하와 외이의 차이가 본질이 아니라 문화의 차이일 뿐이라는 주장을 중국의 고대 문헌으로 뒷받침했다. 당대 민간의 주류 학자들도 그 주장을 수긍했다. (옹정제 때인 1730년에 시시한 반청(反淸) 음모 하나가 발각되었을 때, 옹정제는 그것을 제국 이념 홍보의 기회로 삼아 ‘대의각미록’을 반포하고 주모자 증정(曾靜)이 “사악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므로 죄를 벌하기보다 깨우쳐줄 대상”이라며 너그럽게 처분했다. 그러나 5년 후 제위를 이은 건륭제(乾隆帝)는 즉위 절차가 끝나기도 전에 이 일의 재조사를 명령하고 결국 증정을 능지처참에 처했다.)
화이(華夷) 간의 차이를 크거나 작게 보는 주장의 충돌은 역사적 변화에 일부 원인이 있다. 춘추전국시대까지 천하는 여러 선수가 함께 뛰는 운동장이었다. 화하가 주전 선수라면 외이는 후보 선수였고, 화하가 1부 리그라면 외이는 2부 리그였다. 외이는 언제라도 교체 투입이 가능한 선수였고 리그 승격이 가능한 팀이었다. 반면 진(秦)나라 통일 이후로는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해졌다. 한(漢)나라 초기에 흉노(匈奴)에 시달리면서 외이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심리가 중국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흉노 이후에도 중화제국에 대한 외이의 위협은 북방으로부터 거듭거듭 닥쳤다. 선비족(鮮卑族)의 북위(北魏), 거란족(契丹族)의 요(遼), 여진족(女眞族)의 금(金), 몽고족(蒙古族)의 원(元), 만주족의 청에 이르기까지 한족의 천하 지배를 위협하고 전복한 것은 모두 북방 오랑캐였다. 만리장성이 다른 방면 아닌 북쪽에 설치된 것이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연한 일로 그냥 넘어가지 말고 한 꺼풀 더 벗겨보자. 다른 방면보다 북쪽에서 심각한 위협이 많이 제기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초기 중국=황하문화권’ 아닌 황하·장강·파촉 문화권
중국 문명의 본질은 농업문명이다. 석기시대까지는 농업과 수렵·채집 사이의 생산성 차이가 아직 작았다. 농업사회가 다른 사회들을 압도할 조직력을 키울 만큼 잉여생산이 크지 않았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생산력이 크게 발전하면서 농업사회의 치밀하고 거대한 조직이 시작되었다. ‘고대국가’의 발생으로 표현되는 이 단계가 중국에서는 하·상 왕조로 기록됐다.
상나라 탕왕(湯王)이 하나라를 정벌할 때 천여 개 나라가 따랐는데,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정벌할 때는 백여 개 나라가 따랐다고 한다. 무왕이 탕왕보다 인기가 덜했던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나라’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숫자가 줄어든 것이다. 온 천하의 지지를 받은 것은 탕왕이나 무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주 무왕 때의 백여 개 나라 중 태반이 지금의 허난성 영역에 있었다고 보면 한 나라의 크기는 우리의 일개 면이나 군 정도가 보통이었을 것이다. 아직 도시국가 단계였다. 나라의 크기는 계속해서 커지고 숫자는 줄어들어서 영토국가 단계로 나아갔다. 춘추시대에 접어들 무렵에는 대부분 지역이 영토국가에 편입됐고, 전국시대에 접어들면 7웅(七雄)을 비롯한 10여 개 영토국가가 중원(中原, 화하의 영역)의 모든 땅을 나눠 가진 상태가 된다.
‘중원’의 범위도 넓어졌다. 중국에는 초기 농업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 여러 곳 있었다. 그중 넓은 지역으로 황하 중류 유역, 장강 중·하류 유역과 장강 상류 유역을 꼽을 수 있다. 청동기 문명의 발전에 따라 이 세 지역에서 나란히 ‘나라(國)’로 불리게 되는 큰 정치조직이 자라났다. 이 단계에서는 세 지역의 문명 수준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상호 접촉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다른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다. 황하(黃河)문화권과 장강(長江)문화권, 파촉(巴蜀)문화권이었다.
중국 문명 초기의 역사기록이 황하문화권 중심의 서술로 남아있는 것은 청동기시대 후기 이래 문명권의 통합이 황하문화권의 주도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문명이 ‘황하문명’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고고학 발굴과 연구의 진행에 따라 황하문화권은 초기 중국 문명권의 일부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왔다.
황하문화권이 주도권을 쥐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철기(鐵器) 보급이 황하 유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여러 해 동안 검토해 왔다. 중국의 철기시대에는 세계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는 광석에서 추출한 철괴(鐵塊)를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망치로 두들겨 모양을 빚어내는 단조(鍛造)가 오랫동안 주종이었는데, 중국에서는 높은 온도로 녹여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주조(鑄造)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단조가 수공업이라면 주조는 공장공업이라 할 만큼 생산성이 높은 방식이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철기의 사용량이 다른 지역보다 많아서 여러 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사실을 한나라에서 철기가 소금과 함께 중요한 전매품목이 되고 수출금지 품목이 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철기시대 진입의 의미가 특별히 컸다는 점을 생각해서, 춘추전국시대의 변화에도 큰 배경 조건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 근년에 춘추전국시대의 유적 발굴이 많이 이뤄졌는데, 철기 유물이 대량으로 나온 곳은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유적뿐이다. 철기의 대량생산이 그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므로 춘추시대 이전에 황하문화권이 중화문명의 주도권을 쥐는 과정과 연결시킬 수 없다.
청동기시대 말기에 급격한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일반적 현상이었다. 지중해 동부 지역의 ‘후기 청동기 대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 현상이 서양 고대사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기원전 12세기 전반기의 짧은 기간에 그리스의 미케네, 바빌론의 카시트,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이집트 왕조 등 당시의 문명 중심지가 거의 모두 파괴되거나 몰락한 사실에 관심이 쏠린 것이다. 여기에서도 변화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있지만 철기의 출현과 그에 따른 전쟁 양상의 변화에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
장강문화권이 춘추시대를 통해 중화문명권에 합류한 사실은 초(楚)·오(吳)·월(越) 세 나라의 등장에서 알아볼 수 있다. 세 나라 모두 중원의 기존 세력에게 ‘오랑캐’ 취급을 받았지만 강대국의 위용을 뽐냈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에서 그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송나라 양공은 춘추오패(春秋五覇)에 꼽힐 만큼 큰 위세를 떨친 군주였으나 초나라에 뜻밖의 패전을 당해 몰락했다. 송군이 포진한 앞에서 초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며 양공의 좌우에서 공격하기 좋은 기회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양공은 “상대의 어려움을 이용하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라며 거절했다. 초군이 강을 건너와 대오를 정비하고 있을 때 좌우에서 다시 공격을 권했으나 양공은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하여 모든 준비를 갖춘 초군이 공격해 오자 송군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고사는 양공 개인의 지나치게 어진 품성만이 아니라 송·초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중화의 일원을 자부하며 전쟁에도 격식을 차리는 송나라와 ‘이기는 게 장땡!’ 이라며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초나라의 차이다. 공자는 “오랑캐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 찾아서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전쟁 방식에는 확실히 오랑캐의 가르침이 통했다. 춘추 초기에 비해 춘추 말기의 전쟁은 ‘너 죽고 나 살기’의 오랑캐 방식으로 옮겨가 있었다.
또 하나 큰 문화권인 장강 상류의 파촉(巴蜀)은 기원전 316년에 진(秦)나라에게 정복당했다. 막대한 생산력을 가진 이 지역에서 진나라가 거둔 변법(變法)의 성과가 이후 백년간 진나라의 통일 사업을 뒷받침해 주었다.
춘추시대 이전에 장강문화권은 ‘남만’, 파촉문화권은 ‘서융’이었다. 오랑캐의 이름을 가졌지만, 화하와 비슷한 수준의 농업문명과 정치조직을 발전시키고 있던 지역들이었다. [예기] ‘왕제’에 “중원과 이·만·융·적, 모두 자기네 거처·음식·의복·도구·기물이 있으며 5방 사람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고 하여 5방의 서로 다름만을 말하고 우열(優劣)을 논하지 않은 것은 농업문명권이 아직 중원에 모두 포괄되지 않고 있던 이 단계의 상황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농업 생산력 발전은 중국의 오랑캐 흡수 원동력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는 동안 황하문화권·장강문화권·파촉문화권 등 기존의 중요한 농경 지역이 모두 ‘중원’으로 통합되었다. 그에 따라 전국시대 이후의 외이는 농경문화를 갖지 않았거나 비중이 작은 부족들이 되었다. 그러나 농업기술과 농기구의 발달에 따라 전에는 농업화가 어렵던 외이 지역으로 농경문화가 꾸준히 퍼져나갔고, 중원은 그런 외이 지역을 단계적으로 흡수하면서 계속 확장되었다. 한반도는 농경문화가 고도로 발달된 뒤까지도 바다로 떨어져 있어서 중원에 흡수되지 않은 특이한 지역이었다.
황하와 장강 유역의 중원에 자리 잡은 농경문명은 천여 년에 걸쳐 남해안, 지금의 푸젠(福建)성과 광둥(廣東)성 지역으로 확장해 나갔다. 이 남방 지역의 초기 농업 발달이 늦었던 조건으로 두 가지가 흔히 지적된다. 온난·습윤한 기후 때문에 숲이 빽빽해서 개간이 어려웠으리라는 것과 강우량이 많은 곳의 대규모 개간을 위해서는 배수(排水)라는 고난도 수리(水利) 기술이 필요했으리라는 것이다. 철기 보급이 이들 조건의 극복에 큰 역할을 맡음으로써 농경문화의 남방 확장이 순조로워졌다는 설명이 따른다. 남방은 중국 문명이 꾸준히 진격해 나아간, 방어보다는 공격의 방향이었다.
중국 문명의 확장이 동쪽과 남쪽에서 바다에 막혔다면, 서쪽은 산악과 사막에 막혔다. 티베트 고산지대와 신장(新彊)·칭하이(靑海)의 건조지대는 농경만이 아니라 어떤 산업에도 적합하지 않은 곳이어서 인구가 희박했다. 바다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인간 활동의 장벽이었다.
북쪽은 변화의 여지가 큰 방면이었다. 정북방에서 동쪽으로는 강우량이 꽤 되고 지형도 평탄한 지역이 넓게 펼쳐져 있다. 많은 유목민이 생활할 수 있는 초원지대가 있고,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농경사회가 자라날 수 있는 지역도 많이 있었다. 흉노(匈奴)로부터 선비(鮮卑)·돌궐(突蹶)·거란(契丹)·여진(女眞)·몽고(蒙古)·만주(滿洲)족에 이르기까지, 중원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 오랑캐의 대부분이 이 방면에서 나타났다. 장성(長城)이 필요한 방면이었다.
중국-오랑캐 관계사 기록은 중국 쪽에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있다. 중국 입장에서 남긴 이 기록에는 중국의 우월성을 강조·과장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 경향은 오랑캐와 중국의 차이를 크게 보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화이(華夷) 관계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경향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중국 기록 내용에 비해 오랑캐와 중국 사이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고, 양자 간에는 공유하는 것이 많았으리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북방의 만리장성은 화이 대립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현장이었다. 화이 관계가 이질적 존재들 사이의 단순한 대립관계가 아니었으리라는 내 추정을 이곳에서 제일 먼저 확인해 본다. 대립이란 것 자체가 공유하는 것이 꽤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다. “소 닭 보듯” 하는 이질적 존재들 사이에는 대립조차 일어나기 어렵다.
만리장성을 쌓는 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인 중국 왕조는 한나라와 명나라였다. 한나라에는 흉노라는 숙적이 있었고 명나라는 몽골족과 오랫동안 다투다가 나중에는 만주족에게 유린당했다. 흉노·몽골족·만주족은 당시의 중국과 얼마나 떨어진 거리에 있었을까? 나중에 더 세밀히 살펴보겠지만, 오늘은 약간의 실마리를 뽑아두겠다.
진 시황이 흉노에 대비해서 장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시황이 경계한 것은 ‘호(胡)’였다. [사기]에 ‘동호(東胡)’로 나오는, 당시에 흉노보다 강성한 세력이었다. (흉노를 ‘호’의 일부였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흉노건 동호건 전국시대에는 그리 큰 세력이 아니었다. 인접한 제후국인 조(趙)나라와 연(燕)나라가 오랫동안 그럭저럭 통제하던 작은 세력들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진나라의 통일 무렵에 갑자기 중원 전체를 위협하는 큰 세력으로 나타난 것이 어찌 된 일일까.
전국 말기 중원의 대혼란을 피해 많은 사람이 북방으로 달아났다.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넘어온 것도 그런 상황 속에서였다. 망명자 중에는 큰 세력을 이끈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있었다. 한나라 초기에는 한왕(韓王) 신(信)과 연왕(燕王) 노관(盧綰) 같은 제후들까지 흉노로 넘어갔다. 그런 망명자들이 많은 선진기술을 가지고 갔을 것이다. 제철(製鐵)을 비롯한 생산 기술부터 정치 기술과 병법(兵法)까지. 대규모 기술 유입이 아니라면 이 시기 흉노의 급속한 세력 확장을 설명할 길이 없다.
중국 떠나 북으로 간 망명자들, 부메랑 되어 중국 위협
[사기]의 ‘흉노열전’편에 중항열(中行說)이란 인물이 보인다. 문제(文帝) 때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에 귀순한 환관인데 사마천은 이렇게 적었다. “그는 선우(單于)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인구와 가축의 통계를 조사하여 기록하도록 시켰다.” 유목사회에 없던 행정 기술을 전파해준 것이다.
진나라·한나라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게 된 많은 사람에게 흉노는 대안을 제공했다. 한왕이나 연왕에게는 만족할만한 신분과 생활양식을 보장해줄 수 있었고, 중항열 같은 인물에게는 경륜을 펼칠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전혀 이질적인 야만사회라면 그런 조건이 불가능하다. 당시의 흉노가 중국 문명을 이미 상당 수준 받아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망명자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이고, 바로 그래서 중화제국을 위협하는 큰 세력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명나라 경우에는 몽골족 아닌 만주족에게 천하를 넘겨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천하를 차지한 이후 명나라를 내내 위협한 것은 몽골족이었다. 황제를 포로로 잡은 일도 있고 북경까지 쳐들어온 일도 있었다. 그러나 1644년 만주족이 북경을 접수할 때 몽골족은 일부가 그 밑에 편입되어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신흥세력인 만주족이 결정적 단계에서 주도권을 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결정적 이유를 몽골족보다 만주족 사회가 중국 문명에 더 접근해 있어서 중국인들이 대안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다는 점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차이는 농업화의 수준이었다고 본다. 만주족의 주된 구성원이 된 거란족과 여진족은 10세기 초에서 12세기 초까지 북중국을 통치한 일이 있고 몽골족은 12세기 초에서 13세기 중엽까지 중국을 통치했다. 농경문화가 전파될 기회였다. 그런데 몽골족의 본거지인 초원지대는 너무 건조해서 농업화가 힘든 반면 동북 지역은 농업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만주족이 동북 지역에 세운 후금(後金)은 상당 규모의 농업사회를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에 좌절감을 느낀 중국 지식인과 기술자에게 대안이 될 수 있었다. 1644년에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오삼계(吳三桂)가 쉽게 문을 열어준 이유 하나는 만주족이 선포한 청나라가 중화제국의 체제에 접근해 있었다는 것이다.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의 천하에서도 그는 장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있던 것이 몽골족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만리장성은 대단히 강한 아우라를 가진 문화유산이다. 사람들이 장성을 제일 많이 참관하는 곳이 베이징 동북쪽 교외에 있는 바다링(八達嶺)인데, 놀라운 위용이다. 그런 웅장한 성곽이 도시 하나를 감싸도 대단한 물건인데, 그것이 1만 리도 넘는 길이로 뻗어 있다니!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바다링에서 장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장성은 위대한 성벽이며, 위대한 민족이라야 이런 것을 세울 수 있다.” 고통과 치욕스러운 역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기 위해 장성을 들먹인 것이다.
닉슨의 이 말은 줄리아 로벨의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The Great Wall, China against the World, BC 1000~AD 2000)](김병화 옮김, 웅진지식하우스)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장성에 관한 많은 정보가 담겨 있고 이 글을 쓰는 데도 참고가 된 책이므로 이 책에 관한 생각을 조금 적어둔다.
2006년 이 책이 나왔을 때 흥미로운 주제이기에 얼른 구해 보았다. 막상 읽기 시작하자마자 깜짝 놀랐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나왔으면 크게 환영받았을 책이다. 백 년 전의 선교사들보다 자료 수집을 좀 더 체계적으로 했다는 것 외에는 사고력과 분석력에 아무 차이가 없다. 무엇보다 중국을 깔보고 중국 문명의 가치를 낮춰보는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을 관철하기 위해 자료를 멋대로 재단하는 난폭함에는 백 년 전 선교사 중에도 낯을 붉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제일 큰 가르침을 얻은 선학 중에 영국의 조지프 니덤, 프랑스의 자크 제르네, 그리고 영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조너선 스펜스가 있다. 그래서 유럽의 학풍을 은근히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데, 오염에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중국 때리기’가 연구비·학위·교수직을 얻기에 유리한 조건이 지금까지도 서양 학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리장성은 단순한 구조물 아닌 하나의 제도
2006년 나온 로벨의 책 참고서목에 1997년 나온 패멀라 크로슬리의 [만주족의 역사](The Manchus, 양휘웅 옮김, 돌베개 펴냄)가 빠져 있는 점도 눈에 띈다. 로벨이 그 책의 존재를 몰랐다고는 상상할 수 없고, 입맛에 맞지 않아서 무시한 것 아닌가 의심된다.
로벨의 책에 좋은 관점도 많다. 장성을 쌓은 목적이 방어만이 아니라 공격에도 있었다는 관점은 훌륭하다. 그런데 목적이 공격‘에만’ 있었던 것처럼 우기는 건 지나치다. 중국의 호전성을 규정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느낌이다.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에서 산시(陝西)성까지, 일찍부터 중원에 포괄된 지역의 북쪽으로 둘러쳐진 장성은 분명히 방어용이다. 그러나 그 서쪽으로 간수(甘肅)성 깊숙이, 둔황(敦煌) 부근까지 세워진 부분은 농경 지역을 방어하는 목적이 아니다. 한나라 때 세워진 장성의 이 구역은 서역(西域)과의 교통로로서 감숙회랑((甘肅回廊)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붙은 이 교통로는 기원전 2세기 말 장건(張騫)이 개척한 이래 중국에 가장 중요한 육상 교역로가 됐다. 해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 실크로드가 가장 중요한 통로가 떠올랐다. 인도를 포함한 서역은 중국 부근의 가장 큰 문명권으로서 한나라 때부터 중요한 교역 상대가 되었는데, 실크로드 대부분은 사막과 고산지대를 지나기 때문에 크게 방해되는 세력이 없는데, 유일한 위협세력이 흉노 등 북방의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막기 위해 장성을 이어 쌓은 것이었다. 그런데 로벨은 이 구역의 특성을 장성 전체에 적용시키려 든다.
북경에 가까운 바다링 언저리 장성의 위용에 대해, 로벨은 장성 전체가 그런 웅장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데 무척 공을 들였다. 그 책이 2006년이 아니라 1906년에 나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이유다. 1793년에 영국 사절 매카트니는 건륭(乾隆)황제를 만나러 북경에서 열하(熱河)로 가는 길에 장성의 위용에 감동해서 장성에 사용된 석재의 양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모든 건물에 사용된 분량”과 맞먹고, 높이 2m 두께 60㎝의 벽으로 지구를 두 바퀴 감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했다. 이것은 5000㎞ 길이의 장성 전체가 자기가 본 곳처럼 두께와 높이가 각각 10m 전후에 이르는 석축일 것으로 가정하고 계산한 것이다.
그런 환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큰 석재와 벽돌을 쓰는 그런 웅장한 축성법은 대포가 많이 쓰이게 된 명나라 때 북경 등 제국의 중심부를 보호하는 구간에만 사용된 것이었다. 명나라 이전에 세워진 성벽은 진흙과 돌멩이 등 현장 부근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갖고 최소한의 전술적 우위를 목표로 간략하게 건설되었다. 간수성과 랴오닝(遼寧)성 등 변두리 구간은 더 허술했다.
또 하나 로벨은 억지스럽게 장성의 효용성을 부정한다. 장성을 세운 중국인을 사악할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한 존재로 규정하려 드는 것이다. 장성이 제구실을 못한 일이 역사를 통해 여러 차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구실을 한때가 더 많았다. 제구실 못한 것이 특이한 일이기 때문에 기록이 남게 된 것이다.
장성은 돌로 쌓은 구조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제도로서 의미가 있다. 구조물 자체가 방어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구조물을 이용하는 군사제도가 효능을 가진 것이었다. 제국을 옹위하는 제도는 일시적 상황이 제국을 쉽게 무너트리지 않도록 막아준다. 그러나 제국의 근거가 무너질 때는 제국의 한 부분인 제도가 어떻게 혼자 버틸 수 있는가?
1644년 청군의 입관 장면을 보자. 요동(遼東) 지역의 숱한 방어선이 무너진 뒤까지 장성은 버텼다. 명나라가 무너져서 장성이 뚫린 것이지, 장성이 뚫려서 명나라가 무너진 것이 아니다. 북경이 이자성(李自成)에게 유린당할 때 오삼계는 당시 중국인을 대표해서 선택을 내린 것이고, 그 선택의 기회는 장성 덕분에 주어진 것이었다. 명나라가 잃어버린 천하를 이자성의 천하로 만들 것인가, 청나라의 천하로 만들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다.
장성은 중화제국이 존재한 2천여 년 동안 화하와 외이 사이의 장벽으로 서 있었다. 다른 어느 방면에서도 볼 수 없는 굳건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 굳건한 장벽도 소통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안팎의 상호관계에 절제를 가함으로써 변화를 순조롭게 만든 효용도 장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화와 오랑캐 사이의 관계에서, 보다 긴밀하고 유기적인 측면을 찾는 작업의 초입에서 장성을 둘러싼 교섭 관계를 먼저 떠올려본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7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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