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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조커가 폭력적으로 변한 이유? “내 인생이 비극인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의학의 발달로 육체의 병은 더욱 많이 치료할 수 있게 되었는데, 오히려 마음의 병은 더욱 고치기 어려워진 것 같아요. 병든 마음을 먼저 살펴야 마음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질환도 고칠 수 있어요.

 

 

명상하는 이들 사이에 자주 얘기되는 ‘인디언 우화’가 있다. 체로키 인디언 할아버지가 손자와 나누는 대화다. 주제는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다툼. 할아버지·손자의 대화치고는 제법 심오하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다툼은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는 두 마리 ‘늑대’ 사이에서 벌어진단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지. 악한 늑대는 분노·시기·질투·슬픔·유감·탐욕·오만·죄의식·열등감·거짓·거만함·우월감, 그릇된 자존심이란다.”

할아버지는 다른 한 마리의 늑대에 대해서도 함께 알려준다.

“다른 한 마리는 착한 늑대다. 착한 늑대는 환희·평화·사랑·희망·평온·겸손·친절·자비심·공감·관대함·진실·연민·믿음이란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손자의 질문이 당돌하다.

“어느 늑대가 이기나요?”

할아버지의 대답이 절묘하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크리스토퍼 거머 지음 [오늘부터 나에게 친절하기로 했다] )

이 우화에는 인디언 문화의 오래된 지혜가 담겨 있다. 단지 옛날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선악의 대결은 영원한 주제다. 선악이 대립하는 상황과 원인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나의 밖에 있을 수도 있고 내 안에 있을 수도 있다. 마음챙김 명상은 우선 내 안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지금 악한 늑대와 착한 늑대 둘 중에 어느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가?

영화 [조커]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문제작으로 보이는데 필자는 이 우화를 떠올렸다. 내면의 악을 강렬하게 표출하는 주인공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영화의 긴장도를 높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그가 파국을 맞기 전에 인디언 할아버지처럼 따뜻한 지혜를 전해주는 이를 만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 속에 그를 위로하는 심리상담사가 등장하지만, 조커와의 대화는 겉돌기만 할 뿐이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영화 [조커]의 주인공은 현실과 망상의 구분이 잘 안 된다. 내면의 악을 표출하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영화의 긴장도를 높인다. / 사진: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조커는 일종의 정신분열 환자로 설정돼 있다. 현실과 망상을 수시로 오간다.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과 동경이 망상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받은 학대의 아픈 기억이 그의 마음속 깊이 잠재돼 있다. 극중 그의 엄마도 정신분열 환자다. 조커는 살면서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다고 토로하는데 엄마는 어릴 때부터 그를 ‘해피(haply)’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웃음을 강요했다고 한다.

 

‘엽기적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육체는 성장했어도 마음속 깊이 내장된 고통은 수시로 불쑥불쑥 솟구친다. 두 손가락으로 양 입가를 끌어올리는 피에로의 웃음은 즐거움이 아니라 울음의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조커(joker)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웃음을 주는 사람이다. 영화는 여러모로 역설적이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라는 주인공의 독백도 그렇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본래 코미디물 전문이었다고 하는데 그런 경력의 감독이 만든 새로운 코미디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비슷한 대사를 찰리 채플린이 이미 던져 놓았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볼 수도 있고, 멀리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인생에서 어느 것이 삶의 진짜 모습일까?

조커는 따뜻한 타인의 위로를 갈구하는데, 그에게 돌아오는 타인의 반응은 차가웠다. 무관심이라고 해야 할 텐데 이해를 원하는 그에겐 냉대로 느껴진다. 웃음을 모르는 조커의 꿈이 코미디언으로 성공하는 것이라는 설정도 역설적이다.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 남을 웃길 수 있을까?

조커가 자신의 코미디 노트에 적어 놓은 “나의 죽음이 삶보다 가치 있기를”이란 문장에선 죽음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죽음은 아무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절대적 평등의 세계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이 동경의 대상이 될 순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죽기(well-dying)를 바라는 것은 잘 살기(wellbeing) 위해서 아닌가. 죽음은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능을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 영화는 죽음 쪽으로 기울어 있는 듯하다. 죽음과 불안과 광기는 영화의 전반적 분위기를 이끈다.

죽음은 명상의 중요한 소재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는 평소 명상을 했다고 하는데 유명한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죽음을 언급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외부의 기대, 모든 자부심, 모든 난처한 상황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죽으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당신이 무엇인가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 죽음에 대해 “당신이 죽으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당신이 무엇인가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나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에는 이미 죽음이 들어와 있는 셈이다.

인디언 우화와 비슷한 이야기를 에리히 프롬도 제시한 바 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이면서 명상에도 관심이 많았던 프롬은 저서 [인간의 마음]을 통해 ‘인간은 늑대인가, 양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체로키 인디언 할아버지가 말한 나쁜 늑대와 착한 늑대가 프롬에게선 늑대와 양으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프롬은 인간의 선악을 실체로 보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는 모순이라고 본 것 같다. 개개인의 마음속에 선을 행하려는 경향과 악을 행하려는 경향이 다 들어있다는 얘기다. 두 경향 가운데 어떤 것이 우세한가에 따라 선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게 되기도 한다.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프롬의 문제의식은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 사회가 삶을 사랑하는 구조인가 아니면 죽음을 지향하는 구조인가? 이 선택도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선택 앞에 열려 있는 문제인데,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개인이든 사회든 자유로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점이다.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에리히 프롬.

 

마음의 크고 작은 스트레스는 육체의 질환으로 연결된다. 마음챙김 명상으로 스트레스를 줄이는 연습은 건강한 몸의 출발이 될 수 있다. 육체의 병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사회적 질환도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될 수 있다. 사회를 만들고 운영해가는 인간의 마음이 병들면 사회도 아프게 될 것 아닌가. 지금껏 사회를 고치려는 수많은 시도가 실패한 원인은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음 개혁이 사회 개혁의 선결 조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챙김 명상은 마음 개혁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챙김 혹은 마음 개혁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대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호흡에서부터 시작한다. 일상적이라고 해서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호흡 없이 우리는 한시도 살 수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한 호흡 사이에 있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잠시 그 행위를 멈추고 자신의 호흡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편안한 자세로 눈을 지그시 감아 봐도 좋겠다. 깊이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이렇게 기원해보자. 나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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